아시겠지만, 임진왜란 (1592) 병자호란 (1653) 이 두 란 떄문에 엄청난 식량난을 겪음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엄청난 문화제가 사라졌습니다. 서적은 물론이고 기술과 건물까지도.
이 두란 직후인 1700년을 기준으로 잡고는 조선은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다라고 하는것, 또한 인구수에 따른 경제력, 그리고 쌀거래로 글을 써서 조선 경제력은 이미 일본에 1700년도에 추월 당했다, 이것에 대한 것으로 사농공상으로 일본은 이미 서양과 교류하며 (조총을 예로들며) 서양 문물을 받았는데, 조선은 그러지 못했으니 조선은 추월 당했고, 일본은 조선과 다르게 상인을 천시하지 않았다 등등.....
다시 읽어보시면 알거 같으시구요.
- 쌀 생산량은 이미 1700년도에 일본이 추월했다.
쌀 생산량의 차이. 1석 = 80kg으로 계산
1700~1750년대 (조선 숙종 145만 결(만국요람) = 약 303만 톤) vs (일본 에도 막부 2580석 = 약 206만톤)(수치출저)
조선이 일본의 50% 더 많은 쌀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무려 50% 입니다.
누가 1700년도 일본은 이미 쌀 생산량이 조선을 넘었다고 하는데, 틀린 주장입니다. 비교적 좋았던 곡창지대였고 농업기술도 좋았던 조선이, 화산 섬나라에 토양도 불리하고 농업기술도 조선에 비해 덜발달한 일본에 추월당한다? 말도 안됩니다.
비슷한 내용을 찾을수 있습니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2599
인구수는 원래부터 일본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이 경제력으로 조선을 이긴다는 것에 증거도 될수 없으며 (조선보다 인구수가 더 많다 = 조선보다 경제력이 크다) 성립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 일본은 이미 서양과 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서양 문물이 들어왔다. 조선이 나라를 닫고 있을때 일본은 더 발전했다
이는 전국 시대 무역을 관리할 정부없어져서 가능했던 것이고, 이떄문에 외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후 도쿠가와 가문이 막부로 들어선 이후에는 쇄국정치를 하면서 이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화를 우려한다는 네덜란드의 말을 듣고 쇄국정책을 펴게 됩니다. 다만 이 쇄국정치가 단순히 교류를 완전히 차단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후에도 조선 중국 네덜란드와는 외교,교역을 했습니다. 이것은 흑선 사건으로 인해 미국에 의해 강제개항되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메이지 이전까지 막부 중앙 정부의 힘을 키우며 폐쇠적으로 시행했습니다.
- 조선의 상인은 천시 받고, 일본은 상인이 우대 받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소리. 조선의 상인은 천대 받지 않았습니다.
실제 조선시대에 사농공상은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였다. 실록을 검색해보면, 성종 대 3건, 연산군 대 2건, 중종 대 2건, 광해군 일기 중초본에 1건, 현종 1건, 헌종 1건, 고종 7건으로 지극히 저조하다.
또한 당시 현실을 살펴보자면 사실 사(선비)만 양반이었고 농공상은 양인이었기 때문에 농공상 사이의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인 중의 일부는 상인 생활을 하다 외국어를 익혀 역관이 되며 중인으로 신분상승을 하기도 하고 공장 중에 재능있는 사람은 관직을 받기도 했기 때문
<엔하위키>
보시다 싶이. 상인은 천대 받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씀 드렸다 싶이 사농공상은 농사를 중요시 여긴다는거지, 이게 상인을 천시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외곡해서 좋을대로 해석하지 말아주십시오.
1700년대 부터 일본은 상인의 발달이 시작되어 이후 무사 계급과 상인 계급이 바뀌게 됩니다. 이는 츠나요시의 화폐계혁의 실패로 인해 나타나게 됩니다. 즉 1700년대 전 상인이 힘을 얻기전까지는 일본이나 조선이나 상인 계급은 그냥 양인에 또이또이. 이후서부터는 상인이 힘을 얻으며 득세하게 됩니다.
저번 처럼 저렇게 광고도 부탁드립니다
출처 | 참고 http://news.donga.com/3/all/20090202/8690797/1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pn=3&num=133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