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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할아버지, 고맙 습니다”
게시물ID : history_205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ckk
추천 : 5/7
조회수 : 4925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5/05/02 07:15:26

2008년기사지만 

당시 일제시대는 한민족의 축복이라며 독립군을 테러단체 취급하던 뉴라이트들이 재개발 뉴타운등을 외치며 국회의원에 대거진출하면서 


기사말처럼 

이완용 먼 친척인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화재청장를 하던 시절 기사인데..참..그렇네요...ㅡ


암튼 최고의 재태크라는 매국 나라팔아먹기..


중국에선 그러다간 죽어서도 시체를 파내서 갈아서 태워없애고


미국이나 유럽등에서도 엄격한 처벌을 한다지만


대한민국은 너무나 관대한듯..ㅡ


http://m.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687


http://media.daum.net/zine/newsview?newsid=20080814102419567


“친일파 할아버지, 고맙 습니다”


광복 63주년이 지나도록 우리 사회에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속설이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과연 현실은 어떨까. ...


.....구한말 내각총리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은 병탄 후 중추원 고문으로 백작 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받았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일선 동화의 결실을 손상하는 경거망동과 황당무계한 유언 선동을 중지하라"고 만세운동 비난 담화를 발표해 그 공로로 1920년 후작으로 승작했다. 1926년 이완용이 사망한 후 귀족 작위와 재산은 손자 병길이 습작했다.


이병길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이완용의 직계 종손인 이윤형씨가 상속권자다. 일제 때 일본인 고위 관료 자녀의 교육기관이던 경성제1사범대 부속학교를 거쳐 동성고교와 홍익대를 나온 그는 광복 뒤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 말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발탁으로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 뒤 17년간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국내에 들어와 이완용 땅찾기 소송에 뛰어들어 한때 승소 판결로 수십억원을 챙기기도 했다.

한편 이완용의 셋째 손자(이병길의 동생)인 이병주씨는 1962년 9월21일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가 일본 정부에 생활 보장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그를 귀화시키고 환대했다. 일본에 귀화한 이병주의 아들 이석형씨는 1979년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있던 이완용 부부의 묘를 파내 화장해버렸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일왕이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쓰여 있었다. 작업하던 인부가 이 관 뚜껑을 인근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전달해 한동안 역사 자료로 소장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던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이 소식을 듣고 내려와 원광대 총장을 설득해 가져다 태워버린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친일 사학자라고 비판받던 고 이병도 박사는 이완용과 우봉 이씨 집안 친척이다. 고 이병도씨의 두 손자가 현재 서울대학교 이장무 총장과 이건무 문화재청장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씨의 오랜 땅찾기 작업은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국가 귀속 조처로 현재는 주춤한 상태다....(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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