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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10가지 잘못된 상식들
게시물ID : history_205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jpmc3
추천 : 17
조회수 : 2936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04/29 20:53:11
 
1.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의 수공
 
수나라 군사를 청천강에서 댐 혹은 물을 막아터트려 수장시켰다는 인식들이 많습니다. 명백한 오류죠. 그 당시에 댐을 건설할 정도로 수만명의 인명을 살상할정도의 토목기술은 없었습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의 경우 청천강을 건너던 있던 병력을 공격하여 진을 흐트리고 공격하는 겁니다. 즉 진의 대열이 중간정도 되었을때 공격하여 상대방의 허리를 끊고 공격하므로 용장이나 맹장이라도 진이 흐트러지기 쉽고 물속이라 발을 헛디딜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2. 강감찬의 흥화진 전투 귀주대첩

그리고 강감찬의 흥화진 전투와 귀주대첩을 혼동하는 양반들이 많습니다. 강감찬의 흥화진 전투때 물길을 일시적으로 막았다가 진이 흐트러지게 되고 그것을 보고 총공격을 하는 겁니다. 즉 대형 수공을 통해서 수몰시키는 게 아니고 진을 흐트러지게 만들고 상대방에게 공포를 주어 낙오병이 생기게 만들고 진의 대형이 흐트러짐에 따라 총공세를 퍼부어 인명을 살상하는 전략입니다. 귀주대첩의 경우 평원전이자 대회전입니다. 고려 20만 요나라 10만 대군이 격돌한 전투입니다. 당시 요나라 최강 기마부대 10만 (황제 친위군도 있었음 ) 고려 20만 대군이 격돌했습니다. 당시 요나라 군대가 송나라 군대를 쳐 바르고 있을 시기였고 최강 군대였습니다. 이에 반해 고려는 기마군이 요나라에 비해 딸렸습니다. 게다가 소배압은 전쟁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었고 강감찬은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신출내기에 불과했습니다. 팽팽한 싸움이 이어지다가 판관 김종현이 1만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 균형이 깨지고 요나라 군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2. 행주대첩

행주대첩 싸울것이 없었던 여인네들이 돌을 주어 담아서 이긴 전투라고 알고 있는데  ㅡㅡ : 한마디로 말해서 .... 당시 조선군대 4천명에 불과했고 일본군이 3만명이었습니다. 행주대첩의 가장 큰 요인은 화력때문이었습니다. 즉 대포를 이용한 엄청난 화력전을 구사하고 목책을 둘러 놓아 근접전을 최대한 회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근접전을 하게 되고 화살이 떨어져 돌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백성들이 돌을 집어던져서 싸운 것은 아닙니다.

승리요인은 목책과 화력의 집중에 있었어요. 근데 소개 되기는 백성들이 돌을 던져 이긴 전투라고 말하는게 참 .... 그렇네요.

3. 왜군들의 조총덕분에 패했다.

기가 막힙니다. 왜군들 대다수가 조총으로 무장했어야 하는데 왜국이 무슨 엄청난 부국도 아니고. 많이 봐줘야 30%도 안될겁니다. 왜군들이 이렇게 이긴 이유는 1. 선택과 집중 2. 전략과 전술 3. 단병접전 능함 4. 조선 국방체계의 문란 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전부터 첩자를 보내 탐문하고 준비했지만 조선 조정은 왜변 수준으로 인식하고 대비하였기에 허둥댔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단병접전을 하게 되면 왜군들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또 조선에게는 조총보다도 더 화력이 좋은 대포들이 즐비했습니다. 현자 지자 천자 총통이 있었고요. 게다가 조선은 조총이 헌상되어 이게 조총이구나 이미 사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병력들은 훈련되지 않았으며 축성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전쟁에 대한 준비가 매우 미흡했고 군 지휘권에 대해 체계가 미흡했으며 (이순신과 원균의 싸움에서 보듯 지휘권을 두고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조선 조정이 전쟁을 오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화력과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보급을 끊어버리는 유격전이 발생하자 왜군 역시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4. 조선 선조의 파천 부당한가?

최고 국정 지도자가 도망간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한 사실이지만 선조가 파천한 거 자체는 흠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왕조사에 파천은 많았습니다. 고구려 동천왕도 도망갔고 백제도 고구려의 공격에 못이겨서 수도를 옮겼고 고려 현종도 수도가 함락당하자 도망갔으며 고려 공민왕역시 홍건적의 난을 피해 경북 안동으로 도망간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파천을 못해서 제대로 도망가지 못해서 왕조의 불운을 가져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이 사로 잡히면 전쟁은 끝난겁니다. 후대 인조는 도망도 못가서 남한산성에 갇힙니다. (남한산성에 곡식이라도 있고 강화도 함락만 안당했어도 질질 시일만 끌었어도 삼전도의 굴욕을 없었을 것) 근왕병은 속속 깨지고 북방 정예군 원수 김자점은 병력 안죽이고 거기다가 ... 강화도 함락크리...

남한 산성은 천혜의 요새였고 상당히 잘 싸웠습니다만 청군은 재네들 굶어 죽을때 까지 기다리자. 그래서 손들고 나왔어요.

만약 선조가 붙잡혔다면 ...  ㅡㅡ : 이건 임화군 순화군이 잡힌 것과는 게임이 다릅니다. 물론 명나라도 토목의 변 사건처럼 황제가 붙잡힌 적도 있었습니다만 그때는 명나라 조정이 베이징에서 굳건하게 잘 버티고 있어서 그런거고요. 조정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면 그때부터 전쟁끝입니다.

(그런뒤에 의주에서 명나라로 넘어가겠다는 건 정말 리얼 병신짓 수차례 선위파동이나 전쟁영웅들을 끔살 하는것 이순신을 백의종군 시킨 것 ... 이런 병크들을 욕먹어도 쌉니다. )

5. 고종은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암군이었다.

고종 본인이 매관매직과 부패했던 임금이다. 라는 서술에는 동의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나라 팔아먹은 암군이다. 라는 절대로 동의할수가 없습니다. 고종 자신이 헤이그 밀사를 보내 일본에 부당한 압력에 대해서 항의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망명 가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일제의 지배에 찬성했더라면 민비가 일본에 의해서 죽지 않았겠고 자신과 세자도 일본 낭인에 의해서 구금당하고 쥐어 터지지 않았겠죠.

고종은 끝까지 저항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 헤이그 밀사 의병투쟁 독려 등등 고종의 부정부패에 대해선 말할수 있지만 고종은 끝까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조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6. 무인정권의 항쟁 ? 과연 민족적 저항일까?

무인정권에 대해서 잘 서술하지 않는데 1차 몽골 침입을 제외하곤 국가의 핵심인 경군이 나서는 전투가 없습니다. 방호별감을 파견해서 지구전과 유격전을 지휘하는 정도 였습니다. 1차 침입 당시 고려의 군대는 5만 -6만정도 였는데 이들은 엄청난 전투 머신이었습니다. 동선령 전투나 귀주 대첩 자주성 전투 등이 유명하죠. 몽골의 침입은 사실이나 고려 정부는 몽골의 침입에 손을 놓고 집권자 최우는 강화도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한국사에서 외적이 침입하는데도 제 백성이 죽던 말던 놀던 애들이 애 들입니다.

조선조 선조나 인조보다 더 나쁘고 더 최악인 상황이 고려조에 발생한 겁니다. 백성들은 살기 위해서 저항했습니다. 근데 국가는 이들을 위해 해준 것은 없습니다. 최충헌은 오히려 자신의 문객중에서 공병조직으로 들어가겠다. 처벌했습니다.

그리고 삼별초도 민족적 정기 보다는 자신의 안위 때문에 저항했습니다. 삼별초는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진도로 거점을 옮겨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의 행적들을 보면 민가를 약탈하고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던 존재였습니다. 이들이 국왕의 명령에 따라 개경으로 환도하면 운명은 결정되어 진 것이었습니다. 이전 무인정권 집정자들이 우려하던 것 처럼 그들은 제거 1순위 대상이었습니다.

7. 서희의 담판은 말로만 이루어진 결과였나?

서희의 말빨로 강동 6주를 얻어냈다. 그 이면에는 안융진에서 중랑장 대도수가 이긴 것은 잘 말하지 않습니다. 안융진의 승리가 서희의 말빨을 세워준겁니다.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두자 이제 말로 해보자는 겁니다. 실제로 싸워 이긴 사람들의 말을 신뢰하지 지고 있는데 강화협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냥 때리면 되는데 ...
 
8. 우리민족 빨간 김치 대대로 먹어온건가?
 
우리민족은 대대로 백김치를 먹었고 임진왜란때 고추라는 게 전래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마는 영조때 감자는 헌종때 들어옵니다. 의복역시 말이 많은데 몽골 침략기에 몽골양이 유명해지면서 이게 들어옵니다. 소주도 마찬가지 아라비아 반도에서 먹던 술이 아락주 소주가 된것이죠. 옷 의복 음식 등등의 기원을 조사해보면 고유한 우리 것이 아닌 다른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이땅에서 우리식으로 변형하여 만든 문화가 존재합니다.
 
9. 조선 노예제 떡밥 ? 그건 사실과 틀리다.
 
조선노비들- 서양의 노예들과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솔거 노비 외거보니 관노비 그 성격이 무척이나 다릅니다. 반역을 저지르거나 삼강오륜을 범해서 떨어진 즉 유교적 질서를 부정해서 떨어진 노비들이 아니고서는 부당하게 노비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솔거노비는 집주인과 같이 생활하는 노비들이었고 외거노비들은 매년 신공이라고 해서 돈만 지불하면 되는 거였죠. 관노비 역시 서양보다 해방이 빠릅니다. 순조때 관노비를 다 해방시키고 갑오경장때 노비는 원칙적으로 폐지됩니다.
 
10. 한국전쟁 의의로 한가지 소득이 있었다.
 
한국전쟁은 봉건적 의식을 완전히 타파한 전쟁입니다. 해방후 시기만 하더라도 양반 - 상놈 의식이 아직도 남아있었던 시대였고 토지를 기반으로 하여 신분을 속박하는 게 남아있던 시기였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후 봉건적의식 자체가 무너져버린것입니다. 지주계급이 완전히 카운터 펀치를 먹었습니다.
일단 전쟁을 하면서 토지기반이 소멸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이동하게 되고 그 이동성은 계급을 소멸하게 만듭니다.
 
계급이 소멸하게 된 계기는 의의로 토지개혁덕분입니다. 토지개혁으로 북한군이 말하는 토지개혁이 먹혀들어가지 않게 되죠. 농민들은 자기땅을 소유하는 데 비하여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엄연히 국가소유이지 개인의 소유는 아닙니다. 게다가 토지개혁으로 인해서 남아있던 지주계급들은 상당히 위축된건 사실인데다가 피난길에 먹고 살길이 없어서 과거처럼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난후에는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정책 덕분에 지주계급은 완전히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한국 전쟁의 유일한 빛이라고 한다면 봉건의식과 봉건 지주의 소멸이라고 말해야 옳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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