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를 보면 재미있는 것을 많이 알게 됩니다.
고려 6대 왕 성종이 4대 왕 광종의 셋째딸과 결혼했다는 거 알고 계신가요? 근데 이 분은 이미 결혼을 한 번 하고 딸까지 낳은 상태였었습니다(이 딸은 7대 목종의 왕비가 됩니다). 즉 과부가 재혼해서 왕비가 된 거에요. 그것도 제1비. 게다가 광종은 성종의 삼촌 삼촌이 장인 조선 성종의 반응이 궁금하다
여기에 재미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고려는 사위와 외손까지 음서로 나갈 정도로 외가, 처가의 영향력이 막강하던 시대입니다. 즉, 외손이 친손와 다를 바 없었다는 거에요. 이는 왕실이라도 해도 예외는 아니라서, 공주의 아들이 다음 왕위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고려 왕실은 모든 공주를 왕씨 왕족에게 결혼시켜서 외척의 왕위계승 주장을 미연에 방지합니다.
그러나 이런 훈훈한 근친혼 풍습은 원의 사위국이 되면서 깨지게 됩니다. 원 세조를 모셔 보겠습니다.
“당신의 나라에서는 여러 왕씨王氏들이 동성同姓간에 혼인하는데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 이미 우리와 더불어 한 집안이 되었으니 우리와 통혼通婚을 해야 한다. 그렇치 않는다면 어찌 일가一家의 의리라고 하겠는가?”
뭐 이래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공민왕들은 원 황실의 공주와 결혼하게 됩니다. 두 명 빠졌는데 걔네는 너무 어렸어 조선 예종이 아니야
1타로 충렬왕은 무려! 원 세조의 사위가 됩니다. 그러나 아내인 제국대장공주는 남편보다 더욱 막강한 권력을 휘두릅니다. 덕분에 기가 눌린 충렬왕은 정사는 제껴두고 사냥과 여자를 즐기면서 살게 됩니다. 특히 궁인 무비無比를 총애했다고 하죠. 이 때문에 제국대장공주와 충렬왕은 사이가 나빴습니다.
제국대장공주는 1297년 5월 39세로 죽습니다. 이 때 세자(이후의 충선왕)가 원에서 귀국해, 무비를 죽여 버립니다. 세자는 1296년에 원 공주와 결혼한 새신랑이라 떠오르는 별이었거든요. 왕은 마누라 죽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고. 처갓집 파워 뚜두둥
그래도 세자는 아버지와 잘 지내고 싶었나 봅니다. 다음 기록을 보시지요. 병주고 약주고
1297년 (충렬왕 62세/ 충선왕 22세)
세자가 죽은 진사(進士) 최문(崔文)의 처 김씨(金氏)가 자색이 있다고 하여 왕에게 바쳤으니, 대개 무비(無比)가 죽었으므로 그를 위로하여 풀어주려 한 것이었다. 후에 〈김씨를〉 숙창원비(淑昌院妃)로 봉하였다.
-고려사절요 권21 충렬왕(忠烈王) 23년 8월 미상
숙창원비 김씨는 위위윤치사 양감의 딸로 자색이 있었다. 진사 최문에게 시집갔으나 일찍이 과부가 되었다. 제국공주가 죽고 세자(충선왕)가 (충렬왕에게) 각별한 총애를 받은 무비를 죽였다. 세자가 충렬왕을 위로하고자 하여 김씨를 바치니 (충렬왕이) 후에 숙창원비로 봉했다.
고려사 권89 후비열전 권2
(원문: 淑昌院妃金氏, 尉衛尹致仕良鑑之女, 有姿色. 嘗嫁進士崔文, 早寡. 齊國公主薨, 忠宣爲世子, 疾幸姬無比專寵, 斬之, 欲慰解忠烈意, 以金氏納之, 後封 淑昌院妃 . 忠烈薨, 忠宣祭殯殿, 遂幸妃兄金文衍家, 與妃相對移時, 人始訝之. 後十餘日, 移御文衍家, 蒸焉, 未幾進封淑妃.)
근데 이거 조선 시대에 작성된 겁니다. 유학자들은 심성의 올바름과 절제의 미덕을 사랑하시는 분들이라 어지간히 예쁘지 않으면 예쁘다고 안 써줍니다. 진짜 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충렬왕은 무비는 잊고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무비보다 이뻤나보다 숙창원비를 총애합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 절을 하는 법이죠. 왕이니까 통 크게 벼슬을 퍼줍니다. 백수 처남에게 공무원을
문연은 어렸을 적 스님이 되었다가 후에 환속하였다. 30년이 지났으나 벼슬을 하지 못했다. 여동생은 숙창원비로 충렬왕의 총애를 얻어, 이에 좌우위산원에 제수되었으며, 검의사랑찬성사에까지 벼슬이 올랐다.
고려사 권103, 신하열전 권16
(원문: 文衍, 幼爲僧, 後歸俗. 年踰三十, 不能自振, 女弟 淑昌院妃 得幸忠烈王, 卽授左右衛散員, 驟遷至僉議侍郞贊成事)
총애는 충렬왕이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충렬왕의 여자는 총 5명이었는데, 제국대장공주는 이미 죽었고 진짜 조강지처 정신부주 왕씨는 제국대장공주가 시집오기 전에 먼저 충렬왕과 결혼한 만큼 나이가 많았거든요. 그래도 충렬왕보다 11년 더 산다 시비 반주는 무신 최의의 시비였는데, 역시 나이가 많았습니다. 무비는 잊은 것 같고 숙창원비는 김취려 장군의 손녀인 만큼 가문도 좋고 미인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과부
1305년 (충렬왕 70세 / 충선왕 30세)
승려 소경(紹瓊)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함께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고려사절요 권23 충렬왕(忠烈王) 31년 4월 미상
1307년 (충렬왕 72세 / 충선왕 32세 )
정축. 왕이 원(元)에서 도착하여 숙창원비(淑昌院妃)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노익장
고려사절요 권23 충렬왕(忠烈王) 33년 5월 14일
충렬왕은 1308년 7월 사망합니다. 숙창원비는 이제 조용한 데서 한적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1308년 (충선왕 33세)
왕이 빈전(殯殿: 왕의 시신을 놓아두는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마침내 김문연(金文衍)의 집으로 행차하여 숙창원비(淑昌院妃)와 상대하며 시간을 보내자 사람들이 비로소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숙창원비는 김문연의 누이였다.
고려사절요 권23 충렬왕(忠烈王) 34년 10월 8일
왕이 빈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김문연의 집에 행차하여, 숙창원비와 상대하여 시간을 보내니, 비는 김문연의 누이이다.
(원문: 王祭殯殿, 遂幸金文衍家, 與 淑昌院妃 , 相對移時. 妃文衍妹也)
고려사 권33 충선왕(忠宣王) 즉위년 10월 8일
이 기록상의 왕은 둘 다 충선왕입니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여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지요.
왜 다시 즉위했냐고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습니다. 제국대장공주가 죽고 숙창원비를 맞아들인 후, 충렬왕은 자신이 이 빠진 호랑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1298년 아들에게 양위했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은 새부인 계국대장공주보다는 원래의 세자비였던 조비를 총애했죠. 이에 계국대장공주가 조비를 질투해 원에 고발하는 한편, 왕의 정책이 반원적이라고 폭로합니다. 이 틈을 타 충렬왕의 세력들이 충렬왕을 다시 즉위시키려고 힘을 쓰죠. 결국 충선왕은 쫓겨나고 10여 년간 원에 머무릅니다. 한국판 逆 아서스: 아버지도 할 수 있다 충렬왕은 여기에 막타를 가하려려 합니다. 지금까지 읽으셨다면 느끼셨을 테지만, 이 시기 고려왕의 권력은 원 공주에게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를 다른 남자에게 개가시킨다면? 뭐야 이 막장은? 그러나 이 작전은 충선왕이 원의 황위 계승전에 뛰어들어 승리자 중 한 사람이 되면서 실패했죠.
어쨌든,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법합니다. 이해는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렇잖아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 듣고 원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입니다. 시신도 아직 안 묻었고, 할 일도 많을 텐데 젊은 계모와 노닥거릴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10여일 후,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幸金文衍家, 蒸 淑昌院妃 , 未幾, 進封爲淑妃.
왕이 김문연의 집에 가 숙창원비와 정을 통하고 숙비로 책봉하였다.
고려사 권33 층선왕 즉위년(1308년) 10월25일
여기서 蒸은 '윗사람 범할 증'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수양제가 아버지를 죽인 후 아버지의 후궁인 선화부인에게 몹쓸 짓을 할 때 사관들이 이 글자를 썼죠. 뭐야 이 막장은!!!
고려사절요를 보시면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 수 있습니다.
김문연(金文衍)의 집에 행차하여 숙창원비(淑昌院妃)와 사통하였다. 다음날 감찰규정(監察糾正) 우탁(禹倬)이 흰 옷을 입은 채 도끼를 쥐고 짚단을 묶어놓은 뒤 상서하여 간언하였다. 근신이 상소문을 펼쳐놓고 감히 읽지 못하였는데, 우탁이 소리를 지르며 말하기를, “경은 근신이 되어 미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행에 영합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 경은 그 죄를 아는가.”라고 하였다. 좌우가 두려움으로 떨었고 왕에게는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창원비에게〉 봉작을 더하여 숙비(淑妃)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권23 충렬왕(忠烈王) 34년 10월 24일
즉, 아버지의 총비와 좋은 시간 보내고 다시 자기 후궁으로 삼자, 우탁이 너 미쳤냐고 격분하며 상소했다는 얘기입니다. 흰 옷은 상복입니다. 상복을 입고, 도끼를 쥐고 짚단을 묶어놓고 상소했습니다. 내가 오늘 죽어도 할 말은 하겠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극단적인 분노가 보입니다. 아무리 고려 풍속이 자유분방했다고는 해도 이건 선을 넘었잖아요.
아버지를 묻기도 전에 계모와 정을 통한 상황입니다. 부끄러워했다고는 했지만, 충선왕은 결국 숙창원비를 숙비로 삼았습니다. 속궁합이 좋았던 걸까요? 10여 년 전 기껏해야 한두 번 봤을 텐데, 잊지 못했었던 걸까요? 조비가 있어서 참았나 아니면 빈전에서 소복 입은 숙창원비를 보고 아련아련에 반했던 걸까요? 몽골 풍속에는 아버지가 죽으면 생모를 제외하고 아들이 나머지를 취한다고 하던데, 그걸 따른 걸까요? 그럼 정신부주 왕씨와 시비 반주는
어쨌든, 숙비는 이번에도 화려하게 총애를 받습니다.
그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갖 자태로 요염을 떨고 아첨을 하니 왕이 그것에 혹하여 정사를 보지 않았다. (왕이) 명하여 팔관회를 멈추고, 원의 황태후에게 사신을 보내 그녀에게 고고姑姑를 하사하게 했다. 고고는 몽고의 귀부인들이 사용하는 머리장식의 이름이다. 늘 왕의 총애를 받아 황태후에게 그리 청한 것이다. 비가 고고를 쓰고 원의 사신과 재추 이하를 위해 연회를 열었다. 비단을 쓰라고 비에게 하사하였으니, 4월 8일까지 연회를 즐겼다.
등을 크게 달아 후원에 불산을 만들고, 현악기와 관악기를 갖추어 스스로 즐겼는데, (거기에 설치한) 노란 주렴과 수를 놓은 장막은 모두 왕의 물건이었다. 이를 본 사람이 시장 같다고 했다. 3일 만에 비로소 파하였다. 비가 어머니의 걱정을 겪자 재추를 불러 연회를 열었으며, 또 은자를 법회에 베풀자, 재추가 또 같이 놀았다.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비가 때로는 원나라 사신을 위해 연회를 열고, 때로는 박연朴淵에 가서 놀고, 때로는 사원에 가 스님들을 먹이니, 그 출입에 법도가 없었고, 수레와 의복과 장식이 공주와 다를 바 없었다.
고려사 권89 후비열전 권2
(원문: 妃日夜百態妖媚, 王惑之, 不親聽政, 遂命停八關會. 元皇太后, 遣使賜妃姑姑. 姑姑蒙古婦人冠名, 時王有寵於皇太后故, 請之. 妃戴姑姑, 宴元使, 宰樞以下, 用幣賀妃. 嘗以四月八日,
張燈後園設火山, 具絃管以自娛, 其黃簾繡幕, 皆供御之物. 觀者如市, 三日乃罷. 妃嘗居母憂, 邀宴宰樞. 又如銀字院設法會, 宰樞亦與焉. 時王在元, 妃或宴元使, 或遊朴淵, 或如寺院飯僧. 出入無度, 車服衣仗, 與公主無異.)
팔관회는 태조 왕건이 성대히 치르라 훈요 십조에 적어놓기까지 한 고려의 최대 행사 중 하나입니다. 그걸 폐지하면서까지 숙비와 같이 있었던 거죠. 충선왕은 스스로 선물 셔틀이 되는 건 물론, 원 황태후까지 동원해서 숙비에게 애정을 과시합니다. 재추는 재신과 추밀, 모두 2품 이상의 고관입니다. 숙비의 권세를 엿볼 수 있죠. 노란 주렴과 수를 놓은 장막이 왕의 물건이잖아요? 조선 숙종이 제 물건 멋대로 갖다 썼다고 정승을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를 감안하면(다만 이 이야기는 실록에 없습니다)....... 얼굴 한번 보고 싶다
숙비도 늙은 충렬왕보다는 젊은 충선왕이 더 좋았던 모양입니다. 충선왕의 다른 왕비 순비와 다툼을 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연회장에서 옷자랑을 하기 위해 다섯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고 합니다. 귀여운 수준이다 후궁견환전 생각해봐 충선왕에게 다른 여자들은 더 있었지만, 순비는 1308년 시집왔습니다(이분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3남 4녀를 보았습니다). 숙비도 1308년 충선왕의 비가 된 것을 감안하면, 일종의 기싸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식은 없고요.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앙리 2세-디안 드 푸아티에 나이차였으면 더 재밌었을지도
재밌게 읽어 주셨으면 감사합니다.
ps. 숙창원비, 숙비에서 숙淑은 맑다, 깨끗하다, 어질다, 아름답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청순미였나 봅니다.
ps2. 충선왕도 처갓집 말뚝에 절했습니다. "비가 또한 충선왕의 총애를 얻자, 왕이 숙비에 봉하고, (김)문연은 검의중호를 주었다. 원나라는 신무장군, 진변만호를 주고, 삼주의 호랑이 부절을 하사하였으며, 언양군에 봉하였다. 후에 원에서 독로화(禿魯花)를 따르니, 진변만호부다루가치가 더해졌다. 封王淑妃, 拜文衍 僉議中護. 元授信武將軍·鎭邊萬戶, 賜三珠虎符, 本國封彦陽君. 後率禿魯花如元, 又加鎭邊萬戶府達魯花赤" - 고려사 권103, 신하열전 권16
ps3. 김문연은 의외로 평가가 좋습니다. "작은 일에 거리끼지 않고 도량이 커서 구부러진 성격이 없었다. 늘 숙비가 좌우와 더불어 크게 사치함을 보고, (이를) 가라앉히고 하지 못하게 했다爲人豁達無迂曲, 每見淑妃左右太侈, 抑止之."- 고려사 권103, 신하열전 권16
ps4. 고려사절요는 국편위의 해석을 가져왔습니다만, 고려사는 해석이 아직 없어 임의로 제가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원문이 같이 들어갑니다. 비교해서 보시고 틀린 점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살짝 고칠게요
ps5. 머리장식 고고는 오늘날 족두리라는 얘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