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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산(崖山): 원나라와 송나라의 마지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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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3
조회수 : 356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4/26 12:24:15
글: 조세룡(趙世龍) 
 
송-원전쟁은 오래 끌었다. 1235년부터 1279년까지 45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덕우2년(1276년) 원나라군대는 임안성(臨安城)으로 몰려오고, 사태후(謝太后)는 5살된 어린 황제 송공제(宋恭帝)를 데리고 성문을 열고 몽골군에 투항한다.
 
양숙비(楊淑妃)는 자신의 두 아들 익왕(益王) 조하(趙昰)와 광왕(廣王) 조병(趙昺)을 데리고 도망쳐서 금화(金化)에서 대신 육수부(陸秀夫), 장세걸(張世傑), 진의중(陳宜中), 문천상(文天祥)등과 만나고, 복주(福州)에서 7살된 조하가 황제에 등극하니 그가 송단종(宋端宗)이다. 연호를 경염(景炎)으로 고치고, 원나라에 항거하는 세력을 규합한다.
 
원나라는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발걸음을 빠르게 하여, 송단종 경염2년(1277년) 복주를 함락시킨다. 남송조종은 천주(泉州)로 도망간다. 장세걸은 배를 빌리려고 했으나, 천주성박사(泉州城舶司) 포수경(蒲壽庚)이 거절한다. 포수경은 원나라에 투항한다. 장세걸은 배를 빼앗아 바다로 나간다. 망명조정은 주강(珠江) 입구까지 표류한다. 심천만에서 태풍을 만나 송단종이 바다에 빠져 하마터면 익사할 뻔한다.
 
이때 놀라서 송단종은 병을 얻는다. 송단종이 병사한 후, 7살된 동생 위왕 조병이 지금의 홍콩 대서산(大嶼山) 매와향(梅窩鄕)에서 등극하고 연호를 상흥(祥興)이라 한다. 좌승상 육수부와 통군총사령관 장세걸의 호위하에 조병은 애산(崖山)까지 도망쳐서 계속 원나라에 항거한다.
 
당시 애산은 섬이었다. 대륙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았다. 송나라군대는 송황제등을 이 곳에 모신다. 서산에 임시로 행궁 30여칸을 짓고, 군대막사 3000칸을 지어서 문무백관들이 거주하도록 한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남송조정이 애산에 있는 기간동안, 사병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선박을 제조하고, '초시(草市)'를 열어 무역을 하였다고 한다. 각지의 의병들이 속속 찾아와서 20여만명이 결집한다. 이들 병력을 나누어 애산의 주위에 주둔시킨다. 대부분은 선박안에서 거주했다. 필요한 양식은 광동서부와 해남도등지에서 조달했다.
 
원나라군대의 장홍범(張弘範)이 조양항(潮陽港)을 떠나서 갑자문(甲子門)에 도착했을 때, 애산은 그 첩보를 얻는다. 누군가 장세걸에게 건의한다. "원군이 전선으로 애산의 바다로 나가는 입구를 막으면, 송군은 진퇴유곡이다. 당연히 먼저 이 곳을 점거하여 적을 맞이해야 한다. 이기면 국가의 복이고, 지면 서쪽으로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장세걸은 초산(焦山)에서의 참패를 겪어서 이미 송나라의 잔여세력에 대한 희망을 버린 상태이다. 20만의 무리를 보유하고도, 애산의 바로 향하는 입구를 통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천여척의 전선을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여 서로 큰 밧줄로 묶어서 사방을 방진의 수채로 만든다. 나무로 만든 전선의 양측은 빈틈을 메워서 원군의 불화살이나 대포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했다. 조병의 어선은 방진의 가운데 두었다. 이 곳을 사수하겠다는 모양새였다. 실제로는 떠돌아다니는 망국의 심리상태는 남송군민의 투지에 영향을 주고, 이 전투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이긴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인 전략은 없었고, 진다면 그냥 함께 순국하여 살신성인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유량생활을 마감하는 것이다.
 
후세의 병법가들은 장세걸의 이런 조치에 세 가지 실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첫째, 애산의 천험요새를 차지하고서도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의 통제권을 포기했다. 이는 전쟁의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그냥 내준 형세이다. 둘째, 천여척을 굵은 밧줄로 묶어서 수채를 만들었는데, 비록 역량을 집중하기는 했지만, 기동성, 주도권을 잃었다. 이는 송군을 적의 앞에 그대로 드러낸 것과 같았다. 얼마든지 공격해도 되는 것이다. 셋째,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방진을 묶어놓아 배를 빼내어 멀리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객관적으로 장홍범이 남송잔여세력을 소탕할 수 있게 하는 국면을 조성해준다.
 
장홍범이 수군을 이끌고 도착한다. 과연 그는 애산의 남쪽 바다입구를 막고 장악한다. 그리고 북쪽에서 송군이 퇴로를 차단한다. 그리고 육지의 담수수원과 양식공급로를 차단한다. 해상이 송군은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한다. 10여일의 방어전에서, 장병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바닷물로 목을 적시며 싸웠다. 바닷물을 마신 사병들은 구토를 하고 얼굴이 부었다. 장병들이 모두 피로하여 전투력이 격감한다.
 
원군이 송나라배에 뛰어오른 후, 이동할 수 없고, 기동성이 없는 송군은 육지전투에서 자신들보다 우세한 원나라병사들과 근접전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신속히 이동할 수가 없었다. 죽어라 싸운 결과는 송군의 궤멸이었다. 병마가 혼란에 빠진 와중에 정력(定力)이 약한 문인승상 욕수부는 진정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빠르게 살신성인하여 충신이 되는 길을 택한다. 자신의 차자식을 바다에 빠지게 하고 황급히 어린 황제 조병을 등에 업고 바다로 뛰어들어 순국한다.
 
원래 아직 싸울 힘이 남아있었고, 혈전에서 승리를 거둔 장세걸이 병력을 이끌고 황제를 맞이하러 을 때, 어린황제는 이미 승상의 등에 업혀 바다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병사들의 사기는 흐트러지고, 송나라의 대세는 이미 끝나버렸다.
 
겨우 양태후를 구해내지만 "내가 지금까지 욕을 견디며 참은 것은 조씨의 마지막 골육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 일이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무슨 면목으로 더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마며 다음 날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남송의 황제, 태후, 승상이 모두 이 전투로 죽음을 맞이한다. 송군은 더 이상 깃발을 들 사람도 없고, 군심을 흩어진다. 천문도 모르고 지리도 모르는 장세걸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광동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간다. 도중에 폭풍을 만나자 이렇게 울부짖는다: "만일 하늘이 송을 망하게 하려면, 나의 배를 바닷 속에 가라앉게 하소서." 나중에 해릉도부근에서 전군이 모조리 죽는다.
 
송원의 전투는 1235년에 발발하여, 1279년 2월 애산에서 송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근 반세기동안 지속되었다. 이는 몽골철기가 세계를 횡행하며 '황화'의 공포를 드리운 후 가장 오랜기간동안 싸우고, 가장 힘들게 싸우고, 가장 골치아프게 싸운 전쟁이었다. '세계역사상 4대해전"중 하나로 불리우는 애산해전은 23일간 지속되며, 쌍방이 투입한 병력은 50여만이었다. (여기에는 참전한 외곽의 군수물자수송인원이 포함된다.) 참여한 전선이 2000여척이다. 최종적으로 송군이 전멸하고, 전선이 천척이상 침몰한다. 이는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해전이었다.
 
참혹함을 얘기하자면, 더더욱 심한 것이 전쟁의 승부가 정해진 후이다. 대세가 이미 기운 상황하에서, 전함이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송군은 수백척의 전함을 스스로 침몰시킨다. 10만이 넘는 남송의 군민, 황제, 태후, 승상, 관리, 사병, 부녀, 백성을 포함하여, 잔혹한 몽골정권을 따르고자 하지 않는 자들이 속속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원나라에서 편찬한 <송사>에는 객관적으로 이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7일후, 바다 위에는 십만에 이르는 시신이 떠올랐다...."
 
이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순간에, 십만명이 집단적으로 순국하고, 황제와 태후부터 승상, 대신, 사병 및 보통백성까지 모두 자신의 행동으로 이를 보였다. 이것은 장열한 죽음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주 보기드문 일이다. 이것이 중국한족의 정신이다.
 
송원의 운명을 결정한 양군의 총사령관은 친척으로 당형제간이다. 원나라의 병력을 지휘한 장홍범은 송나라의 총사령관 장세걸보다 몇 살이 많았다. 장세걸은 어려서 부친을 잃고, 일찌기 장홍범의 집에서 같이 공부흘 했었다. 나중에 장세걸은 남송에 투신하여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장씨는 저 장씨만 못했다. 송나라를 멸망시킨 주요장수인 북방한인 장홍범은 군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일찌기 '일자성'을 축성하여, 양양, 번성을 분할시키고, 그후 번성을 공격하여, 양양성을 지키던 송나라군대가 투항하도록 만든다. 나중에 강남 초산전투에서 그는 다시 송나라장수 장세걸이 이끄는 송군이 주력을 궤멸시킨다. 1278년, 원세조 쿠빌라이에 의하여 '몽골한군도원수'에 봉해진 후, 군대를 이끌고 복건,광동 두 지역의 남송잔여세력을 공격한다. 해풍 오파령의 전투에서 승상 문천상을 생포하고, 나중에 애산에서 다시 한번 남송함대를 궤멸시킴으로써 남송정권을 철저히 멸망시킨다.
 
송황실을 평정한 후 장홍범은 애산의 석벽에 "진국대장군장홍범멸송어차(鎭國大將軍張弘範滅宋於此, 진국대장군 장홍범이 송나라를 이 곳에서 멸망시키다)"라는 12글자를 새기고 돌아왔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새겨져 있는 글이 "장홍범멸송어차"라고 한다. 100년후 한족이 명나라를 건국하자, 애산에 새겨긴 글자중 보기 싫은 글자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앞에 글자를 하나 더 넣어서 "송장홍범멸송어차"라고 하여 한족인 장홍범이 송나라를 멸망시킨 매국매족의 행위를 했다고 풍자하기도 했다고 한다. 송진종이 전연지맹을 맺기전에 연운십육주는 일찌감치 요나라, 금나라의 땅이었고, 장홍범의 부친인 장유실(張柔實)은 원래 금나라의 장수였는데, 나중에 몽골에 귀순한다. 한족조정인 송나라의 통치하에 살았던 적은 없다. 우수한 천재장수가 적국에서 살면서 적국에서 기용되어 오히려 한족을 망하게 하는데 일조하다니, 이것도 송나라가 멸망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장홍범은 <회양집>을 썼다. <사고전서총복>에서는 그의 시에 대하여 풍격이 남송강호시파와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그의 '술회'시중에 이렇게 송나라를 멸망시킨 과정을 묘사한 것이 있다:
 
마검검석석정열(磨劍劍石石鼎裂)
음마장강강수갈(飮馬長江江水竭)
아조백만전포홍(我朝百萬戰袍紅)
진시강남아녀혈(盡是江南兒女血)
 
검을 갈아 돌로 만든 정이 갈라지고,
말이 장강을 마셔 장강이 말라버렸다.
우리왕조의 백만전포는 붉게 물들었는데,
모조리 강남 남녀들의 피로구나.
 
지금 다시 읽어봐도 간담이 찢어지는 것같다. 아마도 한인으로서 한인을 도살한 인과응보인지, 그는 42세때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음 해에 병사한다.
 
송나라때에는 문인들이 군대를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윤문이 성공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나머지 문천상등은 모조리 실패사례였다. "인생자고수무사(人生自古誰無死). 유취단심조한청(留取丹心照汗靑)"의 충의를 제외하고, 군사기술적으로 본다면, 이런 살신성인의 충신은 국가나 가족에게 실패자이다. 악비와 같은 걸출한 무장을 도살한 송나라가 그후 백여년간 직면한 것은 문인들이 병력을 거느리지만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충우효로 혈류성하(血流成河)를 이루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위 "국파사양장(國破思良將, 나라가 망하니 좋은 장수가 그립다)" 그저 "해상탄영정(海上嘆零丁, 바다위에서 고립무원의 처지를 한탄한다)"할 뿐이다.
 
광동 강문(江門)과 주해 두문(斗門) 일대에는 여러 개의 황송촌(皇宋村)이 남아 있다. 이런 곳들은 기본적으로 조(趙)씨 집성촌이다. 외성이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주해 두문진 남문촌, 대적감촌은 모두 조가촌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족보에는 명백하게 송태조 조광윤, 송태종 조광의 삼형제의 셋째동생인 위왕 조광미(趙光美)의 후예라고 적혀 있다.
 
예를 들어, 신회 삼강진 신강촌, 연화촌의 조씨들은 모조리 송나라 조씨황족의 후예들이다. 시조는 조양소(趙良韶)로 양소의 부친은 바로 건안군왕 조필영(趙必迎)이다.
 
애산전투에서 패배하자, 조필영은 삼강으로 숨어들어 송나라를 복국시킬 방법이 없음을 한탄하며 혈맥을 보존시키기 위하여, 신강촌과 연화촌에 은거하여 후대를 번성시킨다. 조양소는 5명의 아들을 낳았고, 각각 고정의 하로촌, 자계촌 및 사퇴의 아계촌에 가지를 벌리고 자손을 퍼트렸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신회 하로, 태산부석등의 송나라조씨황실후예는 이미 2만여명에 이른다.
 
신회 고정진 애산부근의 한 작은 마을 근처에는 굴껍질로 쌓아만든 비문이 없는 묘가 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원나라에 멸망한 송나라의 양태후 묘라고 한다. 양태후는 순국한 후, 총망한 가운데 송나라장수 장세걸이 그녀를 이곳에 묻는다. 이미 왕조가 바뀌어, 백성들은 감히 그녀를 위하여 비문을 세우지 못하고, 그저 굴껍질로 양태후를 위하여 특수한 묘를 만들어주었다.
 
이 불굴의 태후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월 초이틀(신력 6월 12일)의 양태후 탄신일이 되면, 사방팔방의 백성들이 이 곳으로 와서 절을 한다. 이렇게 오래되다보니, "국모탄(國母誕)"이라는 풍속이 생겼다. 신회의 5개 "남송황족촌"은 신강촌, 연화촌, 자계촌, 하로촌, 아계촌이다. 이곳에서는 국모를 함께 제사지내는 습속이 있다. 양태후는 복건사람이었고, 그녀의 친척들은 지금도 매년 이곳으로 와서 묘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며, 돈을 모아서 묘지기를 두어 묘를 지킨다.
 
송원의 애산해전후, 일부 충의지사들은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고, 조씨황족후인을 탈출시켜 보호했다. 그리고 성과 이름을 숨기고 애문 부근의 주해, 두문의 남문, 대적감과 신회 고정, 삼강, 사퇴등 당시 '옛전쟁터'의 주변 마을에서 살았다. 한족이 몽골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나서야 그들은 자신의 원래 성을 회복한다. 애산의 부근에는 여러개의 조씨 황족촌이 생겼고, 송나라 18명의 황제영위가 마을의 조씨조사(祖祠)에 영구히 모셔져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남문촌에 있는 명나라 경태5년(1454년)에 건축되기 시작한 조사이다.
 
이 조씨황족의 갈래는 송태조, 송태종의 친동생인 위왕 조광미의 후예들이다. 남문 조가촌 촌장인 조승화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남송 이종이 재위하던 1234년에 위왕의 후예인 조역부(趙懌夫)는 강서에서 광주부 향산현으로 옮겨와서(중산시, 주해시, 두문현이 소속되어 있음) 현령이 된다. 애산해전때, 조가촌은 수백명의 조가자제병을 조직하여 황제를 도우러 떠난다. 전쟁후에는 주해, 두문, 대적감, 남문등지에 숨어지낸다. 조가촌 사람들은 대부분 위왕의 28대 내지 34대 후손이다. 일부분만이 송태종의 후인으로 신회, 삼강등지오 이주해 왔다. 현재 종사는 정부에서 650만위안을 출자하고, 마을에서 30만위안을 내서 수리중이다.
 
시간은 800년이나 흘렀다. 그 처참했던 대해전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많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신회에서 주해 두문까지의 수십리에 이르는 애문수도,산해하호의 땅모양은 이미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송나라전선이 주둔하고 있던 은주호는 현재 이미 막혀서 모두 육지로 되었다. 신회박물관의 한 직원에 따르면, 현지의 밭에서 일찌기 옛날 선박이 발견된 바 있다고 한다. 이전에 수로에서도 18곳에 고전함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일단 부표를 띄우면, 금방 누군가가 물 속의 물건을 가져가 버린다. 지금은 경비도 없고, 문화재유실을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얼마전 '남해1호'의 해저고고발굴때, 많은 황실관요도자기가 발견되고, 황금허리띠 하나, 용무늬의 팔찌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황실에서 쓰는 물건들이다. '남해1호'의 선미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원래 풍랑에 침몰한 상선이라는 주장이 이런 발견으로 인하여 흔들렸다. 기자와 문화재관리인원들은 '남해1호'가 황실용 관선이라고 보고, 이미 출토된 황실용품은 송나라 망명조정에서 쓰는 어용물건리라고 본다. '남해1호'의 꼬리부분의 큰 구멍과 침몰원인은 아마도 원나라전함의 함포에 맞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곳은 마침 장세걸이 태풍을 만나 침몰했다는 지점과도 그리 멀지 않다...
출처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4dwc&articleno=16153948&maxNo=16153952&minNo=16153943&maxDt=20120815094241&minDt=20120716000758&maxListNo=16153962&minListNo=16153953&maxListDt=20120815102220&minListDt=20120815094455¤tPage=146&beforePage=145&category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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