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23년대에 태어났다.
태어나기 10년도 전에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고,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조선인'이었던 적이 없었는데도 사람들은 나를 조선인이라고 불렀다. 집안이 크게 부유한 것은 아니었으나 소위 '가난한 소작농' 또한 아니었다. 부유한 지역유지였던 일부 조선인들과 부유한 일본인들이 살던 읍내의 웃동네와, 그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허름한 집에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살던 아랫동네 사이에 우리 집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자면, 아랫동네 아이들은 대체로 나를 싫어했던 것 같다. 그중 일부는 나를 원수처럼 대하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아이들에게 원수취급을 받을 일을 한 기억은 없다. 모두 다 그렇게 심하게 나를 미워한 것은 아니고, 대체로는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들과 안면몰수를 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늘상 비아냥은 들었고, 그게 기분이 나빴던 것은 기억이 난다.
나는 웃동네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보통 비슷한 집안환경과 재력의 아이들이었던 만큼,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일본인 아이들과 조선인 아이들이 반반 정도 섞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도 나는 똑같은 상황이었다. 조선인 아이들과는 동무였지만 일부 일본인 아이들은 나를 아주 우습게 보곤 했다. 대체로 일본인 아이들은 나와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나를 못살게 굴거나 한 것 같지는 않다. 그중 일부와는 친구이기도 했고.
선생님은 일본인이었다. 수업은 일본어로 받았다. 집에서는 조선말을 썼지만, 일본인 친구들과 놀 때면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쓰곤 했다. 선생님은 조선이나 일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냥 언급 자체를 피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말끝마다 황국 황국 천황 천황 대일본 대일본.. 이런 식으로 수업을 받은 적은 없다. 역사 시간에는 대체로 어떻게 해서 일본이 아시아에서 제일가는 국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설명받고는 했고, 조선도 그와 같은 길을 밟아야 할 거이라는 말에 일본인 아이들이 조선인 아이들을 돌아보며 웃었던 것에 기분이 나빴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본토(일본)에서 곡물거래를 하는 일본인 사장의 현지 고용인으로써 전라남도 각지에서 생산된 쌀을 사들이는 일을 했다. 그 쌀을 생산한 대가 받는 소농들의 급여가 적은 편임은 아버지도 알고 계셨다. 때로는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를 일본인 앞잽이라고 욕하기도 했으나,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특별히 '동포'를 등쳐먹거나 하려고 한 적은 없어다. 다만 고용인으로써 월급을 받으면서 어머니, 할머니, 나, 그리고 세 명의 동생을 먹여살리시는 처지였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본다면 속으로는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다.
어머니는 충청도 출신이었다. 말씨가 느려서 그런건지 천성도 느긋하신 편이었다. 사람을 끄는 인품이 있으시니, 윗동네 일본인들 부인네들 몇 명과 꽤 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끔 사치품가지 등을 선물받으신 적도 있고, 읍내나 시장에 가끔 그 부인들과 함께 가서 안내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녀석이 "애비도 에미도 앞잽이"라고 놀렸기 때문에 그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팬 생각이 문득 난다. 내가 알기로 어머님은 그런 종류의 사례는 "염치가 없다"면서 받지 않으려고 하셨고, 이후 일본인 부인네들은 보통 현물로 사례를 하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받으셨다.
...
내가 열 세살이 되던 해, 본격적인 진학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나는 공부를 꽤 하는 편이었고, 선생은 내가 예과를 통한 고등과정을 치룬 후 일본 본토나 만주방면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 대동학원이나 건국대학 둘 중 하나를 목표로 해보라면서 꿈을 크게 가지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나는 고등문관과정처럼 거창한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조선 땅에 남아서 기회를 찾아봤자 할 만한 일도 없었고, 아버지는 건강으로 인해 일을 오래 더 할 수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예과 과정은 썩 어려운 편은 아니었지만, 2년 동안 매우 우수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일본인들과 경쟁할 만큼 명석한 조선인들이 모이는 과정이기 떄문이 아니었을까. 하긴,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끝내 대동학원에 들어갈 수는 없었고, 결국 나는 경성제대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이 때가 내 나이 열 여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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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을 할 만큼 일본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항일을 할 만큼 세상의 모순을 명확하게 느끼기도 힘든
그 중간지대에 있던 이 사람은 차후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차라리 일본에 깊이 동화되거나, 차라리 일본에 대한 분노를 몸에 새기는
명백한 색채를 품은 사람이었다면 그 인생을 논하기에 쉬우련만
이러한 '회색지대'의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이 따지고 보면 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적다는게 참으로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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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출처 | http://cafe.daum.net/Europa/38b2/2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