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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누가 항복하는지 헷갈리게 만드는 남북전쟁 기록화들.
게시물ID : history_204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피터제길슨
추천 : 12
조회수 : 1792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04/25 16: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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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들은 남북전쟁의 종결을 알리는 장면입니다. 1865년 4월 9일 버지니아 주 아포마톡스(Appomattox)에서 남부연합군의 총지휘관인 로버트 리가 미 연방군 육군 총사령관인 율리시스 그랜트에게 항복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밝은 회색의 제복에 머리와 수염이 하얀 인물이 리, 그 맞은편에 있는 남색 제복의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군인이 그랜트입니다. (실제로 리는 1807년 생, 그랜트는 1822년 생으로 리의 나이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어째 그림의 구도나 인물들의 위치, 포커스 등을 보면, 승리자인 그랜트가 아니라 리를 그림의 주인공처럼 잡아 둬서 그림만 얼핏 보면 대체 누가 항복하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지요. 우선 남북전쟁이란게 편견과는 달리 '흑인 노예들의 인권 때문에 벌어진 도덕적인 전쟁'이 아닙니다. 북부와 남부의 경제 격차(이것도 단순히 '노예제를 폐지하면 남부에겐 피해를, 북부에겐 노동력의 이익이 되어서'로 치부할 수준이 아닌 복잡한 문제), 연방과 각 주들의 권한 대립(미국에서 연방 정부의 권한과, 각 주의 자치권 간의 균형 문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정치적 문제입니다) 등 여러가지 원인이 있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도 남부와 북부 간의 전쟁 책임에 대해 논란이 매우 크며, 당시 남부의 주요 인사인 제퍼슨 데이비스 등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재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버트 리의 경우엔 남북전쟁 당시 그 혼자의 힘으로 남부 군대가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유능하고 또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 적군인 연방군 내에서조차 리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후대 사람들이 기록화를 그릴 때도 차마 로버트 리를 '비굴하게 항복한 패장'의 모습으로 그리기는 곤란했겠지요. (그린 화가가 남부 출신이라면 더더욱 그럴테고.) 항복 당시에도 그랜트는 이를 인정해서 다른 항복 조건을 달지 않고 남부군 장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는데, 바로 리와 그랜트의 외모(...)입니다. 로버트 리는 평상시에 항상 신사답게 절도있는 모습을 가지려 했고, 옷매무새 또한 전쟁터에서도 항상 옷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고 다녔습니다. 반면 그랜트는 초급 장교 시절부터 서부 오지를 전전하면서 알콜 중독에 걸릴 정도로 거칠게 살아온데다(그랜트를 좋아하지 않는 남부에서는 그를 '술주정뱅이'로 폄하할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그랜트는 죽을때까지도 술과 담배를 즐겼음) 자질구레한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던 양반이라 옷도 너저분하게 대충 입고 다녔습니다. 그것도 명색이 육군 총지휘관이란 신분으로서 적군의 총지휘관의 항복을 받아내는 자리인데도......



후일담으로 전쟁 후 그랜트는 전쟁 영웅이란 이미지에 힘입어 대통령에도 당선됩니다. 다만 대통령 시절의 평가는 좋지 못했는데 본인은 청렴하고 선량한 인물이긴 했지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친척과 측근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미국에선 "사람이 좋았던 훌륭한 군인이지만, 대통령감은 아니었음"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한편 리는 명목상 '반란군'이었던 전과 때문에 사형을 당할 뻔도 했지만 이건 그랜트가 '리를 처형하려면 내 총사령관 직책부터 잘라야 할 것'이라며 펄펄 뛰어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리는 고향인 렉싱턴에 있는 워싱턴 대학 학장을 지내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학생 중에는 남부 출신으로 리의 부하였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쟁 때 북군 병사였던 학생들도 많아서 전쟁 때 서로에게 총칼을 겨눴던 사람들이 리의 아래에서 학교 동문이 되었다는 훈훈한 이야기. 워싱턴 대학은 현대에는 이름이 리의 이름을 붙여 '워싱턴 앤 리 대학'으로 바뀌어서 남부에서 유명한 명문대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 때 이 워싱턴 대학은 여학생을 받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리의 책임(?)이 있었습니다. 리는 대학 학장에 취임한 뒤 학교의 교칙에 대해 '따로 교칙은 없으며, 모든 학생들이 신사답게 행동하기 바란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사람들이 "여자는 '신사'가 아니기 때문에 다닐 수 없다"고 받아들였다나요? 뭐 여자가 마음대로 대학교에 다닌다는 생각 자체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여학생의 입학을 막던 작자들이 리의 발언을 핑계삼을 가능성도 있지만요. 물론 현대의 워싱턴 앤 리 대학은 남녀공학이며 여학생도 자유롭게 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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