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의자에 앉아서 잉여짓좀 하다가 뭐 볼만한거 없나 하고 뒤적거리던 중에 이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사실 굉장히 오래전에 사서 읽었던 책이긴 한데, 그냥 끌리더군요.
이 책은 김한규 교수의 대표 저서로 그 페이지 수만 800장이 넘는 두껍기 두꺼운 책입니다. 딱 봐도 5cm는 넘어 보이는 군요. ㅎㅎ
이 책의 가치는 기존의 중국적인 세계질서에 대해서 '역사공동체'란 개념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서술되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지금 까지 전통시대의 국제질서는 대표적으로 '조공책봉'으로 대변되었는데 대중에게는 이것이 일방적인 속신관계로 비춰지는 경우가 잦았고 또 학계에서는 중국적인 세계질서를 오직 이 '조공책봉'만으로 단일화해서 해석하려는 경향이(대부분이 일본 학자들이고 좀 오래전 이야기 지만..)있어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한규 교수의 천하국가는 상당히 판을 깨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또 의미있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전체적인 이야기를 소개하는건 무리인거 같고 이번에 눈여겨 봤던 김한규 교수의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개념과 조선의 대 중국 외교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1. 역사공동체 개념
사실상 이 책의 관통하고 있는 주제인데, 전통시대에 '중국'이나 '한국'의 용어적 사용은 결코 중원에 위치한 나라나 한반도에 위치한 나라를 단독으로 부르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통시대에 불려지는 중국이나 한국은 역사공동체의 개념에서 이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된 옛 중국은 과거에 다원적 요소로 구성되어져 있었습니다. 중국이라고 해서 지금의 중공을 생각하고서 하나의 국가체 혹은 집단으로 생각하는것은 역사적 접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국가의 이름이 아니라 역사공동체의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그 역사적 범주를 명확하게 파악하여 정확한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이해도 가능합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역사공동체와 또 다르게 요동을 중심으로 하는 요동 역사공동체 등이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성의 기반이라면 이들 역사공동체의 국제적인 위치를 이해하는 것은 곧 역사 인식의 시작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각 역사 공동체를 구성한 복수의 국가 혹은 정치 세력들은 중심된 국가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소책봉조공 체제를 운영하면서 별개의 작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고 이러한 작은 세계들이 다시 중국이라는 역사공동체를 중심으로 대책봉조공체제를 운영하면서 누층적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라는 식입니다. 이런 경우 각 역사공동체가 중국이란 거대한 역사공동체에 결합하는 양상도 각기 다르게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잘 알려진 조선의 대 중국 외교와 일본의 대 중국 외교를 조공책봉이라는 단일한 시스템 하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중국이란 역사공동체가 구축되는 체계에서 각자의 위치를 설정함으로서 그 위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2. 고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구조적 특성
조선 이야기 한다고 해놓고 왜 고대 이야기냐고요? ㅎㅎ
이게 말은 고대 동아시아인데 전통시대의 동아시아가 구성되는 중국의 국제질서를 소개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원문 발췌입니다.
"동아시아를 구성한 중국과 그 구성원들은 중국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그 바깥의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별개의 세계를 형성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중국은 이들 사이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특수한 운영 체제를 가동했는데, 당시 힘의 중심이 중국에 있었기에 중국이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책봉하고 조공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중국의 국가와 주변 국가들은 책봉조공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로 구성된 고대 동아시아 세계는 안정된 세계 질서를 구축 유지할 수 있었으니, 당시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책봉 조공'체계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실제에 있어서 각 세계와 중국세계와의 관계는 다원적이었고 그 역학관계도 다양했다. 예컨대 중국과 지리적으로 근접한 지역은 군현 체제로 내속되어 편호제민화 되었고 그보다 밖의 완강한 국가는 봉건적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외신의 지위를 받았고, 그 중간에 위치한 국가들은 군현제와 봉건적 내용을 갖춘 절충적 체제안으로 편입되었다. 결국 중국이 중심이된 동아시아세계는 절대자를 자칭하는 중국과 실제로는 대등하고 독립적인 隣敵國도 있었다. 이 인적국의 존재는 세계질서상의 모순물이기도 했지만 중국 국가와 화친체계를 구성하여 그 한 축을 이루고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질서 안에서 국가들은 일정한 위상을 제도적으로 공인 받음으로써 대내 대외적으로 정치적 안전과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뿐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의 구성원들이 함께 창출한 문화를 나누어 향유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를 확보할 수 도 있었다."
<중국의 국제질서상의 단계>
1단계 : 군현에 편입되어 편호제민화
2단계 : 변군이나 기미부주체제
3단계 : 외신 책봉
4단계 : 인적국으로서 화친체제 유지.
3. 조선의 대명외교.
명과 조선의 관계는 요동이나 운남 토번과 다르게 조선이 경제적인 이득을 보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조선이 중국과 책봉을 맺는 이뉴는 '중국적 세계질서'에 의해 구축된 집단 안보체제에 참여함으로써 국가 안보를 보증맏고 책봉이라는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여 국내의 정치적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으며, 조공과 회사를 통해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른 중국의 고급한 문화를 수입 향유하고 중국의 물자와 자국의 물자를 교역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조선은 당시 역성혁명을 일으킨 관계로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라려는 정치적인 동기가 크게 작용한 것이 이유로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조선의 대 중국 외교 전형적인 '책봉조공'관계임과 동시에 전형적인 事大字小관계였습니다. 명에 대한 조선의 사대는 세종의 지극사대로 대변될 수 있는데, 이런 조선에 명은 자소로 응답하려 했으니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항왜원조'입니다. 임난당시에 명의 만력제가 대규모 부대를 파견한 사건 말이지요. 물론 이 사건을 단순히 자소로 이야기 할 수는 없으나 어찌 되었던 이 사건의 기조는 자소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어찌 되었던 조선의 대 중국 외교는 사대자소로 이야기 될 수 있으며 이는 앞서 말한 책봉조공 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었습니다. 실제가 어떠하던 책봉조공의 관계는 신속의 관계입니다. 헌데 사대자소의 관계는 지금 으로 따지만 핵우산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미국의 안보질서에 부응하면 미국은 대한민국에 핵우산을 씌워 그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전자가 관념적으로 군신을 설정하는 개념이라면 후자는 극히 현실적으로 강대국과 약소국을 설정하는 국제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두개의 서로 다른 인식은 왕왕 충돌 하곤 합니다. 한 예로 여진은 조선에 조공을 보내고 조선은 이에 회사하며 관직을 수여하곤 했는데, 이는 중국의 질서를 모방한 '기미'체제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는 '人臣無外交'(신하들 사이에서는 사사로운 교류를 하지 않는다.)의 원칙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중국에게 조선의 여진에 대한 기미는 자신들의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되는 것이지요. 결국 이 사건은 조선에 적극적으로 입조했던 건주여진의 동산과 이만주가 조선과 명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죽음으로써 사실상 비극으로 끝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건의 배경은 앞서 말한 것처럼 조선이 자신들을 명과 대국과 소국의 독립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로도 조선은 여전히 일본이나 여진을 교린의 대상으로 여겼고 자신들의 독립적인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해 갑니다.
청의 대 조선 관계는 조금 특이합니다. 일전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청과 조선의 관계는 일단 무력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잘 알려진 삼전도의 굴욕이지요. 이 굴욕에서 조선은 청의 구체적인 조공 액수를 전달 받게 됩니다. 특히나 청 태종은 이 삼전도 이후로 조선국왕 인종의 책봉 허가하여 앞선 조선의 중국 외교와 다르게 강압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시작합니다. 조선 숙종때에는 청과 조선간의 국경선을 정하고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는데, 재밌는 점은 이런 양국 경계 획장을 희망하고 주동한 측이 청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청이 조선이 여진의 세계와는 다른 독립된 세계에 속한 국가적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순결성을 지키려는 청와 조선 양측의 노력이 존재했음을 확인하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외교는 앞선 명의 그것과는 다르게 분명히 강력합니다. 더 심화되었지요. 이에 대해서 청의 국가적인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 중국의 정복집단으로서 중국과 외부 세력을 진압하고 점령한 국가인 청이 그들의 정복지에 존재하던 다양한 집단에 통합국가적 통치구조와 대외관계를 구사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입관 이후에 요동에 근거를 둔 청은 중원에 기반을 잡은 상태로 강남에서 또아리를 튼 삼번을 맞아 통합을 해야만 했고 복명운동의 정성공을 맞아 대만을 통합해야만 했습니다. 비로소 전 중국을 통합하게 된 청이지만 이후로 청은 또 서역의 갈단을 잡아 죽여 이 지역을 통합했고 이것은 현 중공의 영토적인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렇게 필연적 강력한 통합성을 보일 수 밖에 없었떤 청에 대한 준공식 역사서인 청사고가 기록하고 있는 외이열전인데, 이 열전은 토사, 번부, 속국으로 3종 구성이 되어져 있습니다.
토사의 경우 전통적인 강저(티벳)와 만월(강남과 북 베트남)에 흩어져 사는 공동체에 관한 것이고, 번부는 주로 서역과 북방 초원에 대한 기사이며 마지막으로 속국은 조선과 유구, 월남, 미얀마 등 독립국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들 중에 토사의 경우 청 옹정제의 강력한 개토귀류의 대상이 될 만큼 청에 편호되어져 있던 집단이고 번부은 초원 지역에 설치된 청의 內番입니다. 결국 사실상 독립국으로서 중국적 세계질서를 구성하고 있던 진짜 집단은 마지막인 '속국'열전에 실린 이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런 속국은 기본적으로 기미하는 방책을 유지하여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청의 통합국가적인 구조 속에서 특히나 무력관계로 시작한 조선은 특별하게도 정계비의 사례 처럼 청과 독립된 세계로 인식되었으며 동시에 독립국으로써 국제적인 위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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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용두사미네요.
아무튼 간만히 두꺼운 책 보려니깐 머리에 쥐가 나는거 같습니다 ㅎㅎ
아무튼 기존의 전통시대에 대한 국제 인식을 역사공동체 개념으로 이해를 한 김한규 교수의 인식이 상당히 신선해서 재밌는 책인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