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여나 오해를 살까 싶어 적자면 저격글은 아닙니다,; 그럴 문제도 아니고 이유도 없지요, 두번째로 텐노 헤이카 반자이도 아닙니다, 일본 제국군이 심각하게 물질적, 교리적으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수 없으나 그렇다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것 처럼 무조건 적으로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될만한 이 들도 아니지요.
말 그대로 답글로 달기에는 이후에 나눌 이야기나 여타 문제를 고려할때 옮겨 적는게 낫다 싶은 것 뿐입니다.;
아무튼 노몬한 전투에 관하여 대략적으로 그 배경을 언급을 해보자면 사실 일본 제국이 만주를 석권하고 수천 km에 걸쳐 소련과 국경을 마주한 이래 크고 작은 충돌은 빈번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나 러일 전쟁 이래 무작정 시행했던 강대국의 군대와 같은 팽창이 무의미 했음을 파악하고 독일의 그 것을 따라 보병의 총체적인 화력 강화와 지원에 힘을 쏟아왔던 일본 제국군 그 중에서도 일본의 변방을 지키는 최초이자 최후의 보루이자 러일 전쟁의 16만 호국 영령들을 유일하게 기억하는 이라 자처했던 관동군은 소련군과 기계화 전력과 항공 전력을 포함한 직접적인 크고 작은 충돌은 물론이거니와 사보타지, 납치, 테러등 수없는 충돌을 반복해왔었지요,
이러한 충돌의 정점을 찍은 것이 38년에 벌어진 장고봉/하산 전투입니다, 양 측을 통틀어 장교와 병사를 포함하여 수 천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전투로 사실상 관동군의 오판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비록 관동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나 숙청으로 말미암아 뿌리가 흔들린 소련군과 한번 해볼만 하다고 판단을 내려버렸고, 일단 당시에는 어쨌거나 그럴만 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듬해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겐기치 중장은 만소 국경 분쟁 처리 요강은 발표하게 됩니다, 요지는 국경선이 불확실할때는 해당 지역의 지휘관이 임의로 국경선을 정할수 있었고, 소련군이 국경을 넘으면 전력으로 응대 충돌을 확산하는 한편 격멸하게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요지의 발표가 이루어진지 2주후 몽골군과 교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일본 제국이 자국의 영토라 주장하는 노몬한 마을 어귀에 물을 찾아 온 몽골군 기병들을 격멸한 것으로 이른바 노몬한 사건이라 불리는 이후 노몬한 전투의 시작이 되는 일이었지요.
이 노몬한 전투에 관한 결과는 다 들 아실테니 넘어가고 밀리터리 게시판으로 가야 할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세부적인 답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우선적으로 반자이 돌격이 있겠지요,
러일전쟁 이래 45년까지 모든 일본군의 교범은 결코 불리한 상황에 굴하지 않는 필승의 신념과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어떠한 난관에도 달려들어 마침내 이뤄내는 공세적 사고 등 무형적 가치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강요하였습니다,
드높았던 러일전쟁 당시의 사기는 어느새 유형적 가치의 결핍을 해소할 마스터 피스가 되어 있었고, 급기야는 32년 야전 교범에 다다라 방어를 해야할 순간이 오더라도 줄기차게 공세적 자세를 갖춰야만 승리를 할수 있다는 논리로 정점을 찍게 됩니다.
물론 일본군의 참모들도 바보는 아닌터라 무작정 들이 대봐야 축차 소모가 되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들은 타 병과와의 공조와 보다 원활한 지휘 통제를 위한 통신 수단의 구비와 지원 화력과 백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수 있는 야간전의 강조, 그리고 각 지휘관들의 이를테면 임무형 지휘 체계를 기본 조건을 깔고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일본군의 기술력은 미국과 미국이 먹여 살렸던 소련에 비하자면 참담하기 이를데가 없었고, 초급 장교들은 중일 전선에서 줄기차게 갈려나가고 있는 바람에 단기 속성 과정으로 찍어내다시피한 장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42년 기준으로 오로지 35~6% 남짓한 장교들만이 사관학교를 그 것도 4년제 정규 교육 과정을 나올 정도로 그 질은 계속하여 떨어져만 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악한 자원과 삼각 편제를 강요할 정도로 부족했던 재원은 공세적 자세에 필요한 새로운 장비를 공급하는데 매우 인색하였지요.
이 것이 바로 타 국가의 보병들이 행한 돌격과 일본 제국군이 행한 돌격이 똑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극명하게 다르게 나아갔던 이유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보병들을 가장 중요한 전력으로 여겼던 일본 제국군, 관동군이 노몬한에 처한 현실은 더욱 참담했습니다, 시작부터 6월의 장마로 인하여 수십 km를 진흙뻘에서 행군해야 했음은 물론이거니와 통신 수단의 부족으로 전령이 포화를 뜷고 달려야 했으며, 부족한 군수 물자와 공세적 교리는 그 들로 하여금 참호속에서 부득이 하게 전차를 향하여 육탄 돌격을 감행하게 만들었고 항복해야 할 시기에 돌격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부족한 병력수로 비스킷 처럼 얇게 만들어진 방어선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기갑 부대는 무전기, 조명탄, 기타 관측 장비가 부족하여 호기를 놓쳐야 만 했으며 타격력은 보장되나 부족한 명중률을 자랑했던 화력은 적 전차와의 교환비를 극명하게 만들어갔습니다, 지휘관을 말하자면 부족한 정보는 상황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고 요충지에 배비된 적의 지원 화력은 아군의 전력을 착실하게 깎아내려갔습니다.
물론 742고지에서의 한 때 처럼 그 들이 바랬던 이상적인 전투를 치룬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대개는 적들이 원하고 바랬던 환경에서 낙후된 교리에 따라 참호를 파고 싸우다 죽어갔습니다.
그 이면의 사실을 살펴보자면 정보 부족과 편견이 아무래도 주요한 원인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 들은 사실 앞서 총공세와 관련된 전문을 감청한바 있으나 명확한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들이 예측한 바의 2배는 족히 되는 전력이 몰려왔지요,
일본 제국군이 생각하기로는 유지가 불가능한 보급선을 수 천대의 트럭이 메웠고 좋지 않은 기상 상태와 낮은 시계는 일본 제국군의 항공 정찰을 차단하였습니다, 대대에 존재하지 않는 정보 장교는 소대나 분대에서 취득한 귀중한 정보를 허공에 날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 소련군에 과거의 겨험들은 지휘관 들이 다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악조건이 모여 사실상 붕괴를 야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컨데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일본 제국군은 소련 특유의 제병협동 전술에 대응할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다만 그 근간은 유형적 가치와 물자의 결핍을 상쇄하기 위한 무형적 가치로 덮여 있었고, 부족한 물자와 인력을 고려한 단기전 그 것도 공세적인 자세를 갖추었으며, 각 지휘관의 임무형 명령 체계, 그러니까 각자의 판단을 중시한 결과 노몬한 전역에 있어 진지전을 택하였으며, 그 들이 늘 판단해온바 대로 또 과거에 경험하고 파악했던 그 것에 따라 철도와의 거리가 절대로 멀수 없었던 소련군을 가정했습니다만
현실의 소련군은 제병협동과 장기전을 교리로 삼았고 그 뼈대로 막강한 랜드리스 등으로 수 천대의 트럭을 동원할수 있었으며,일본 제국군에 비하자면 압도적으로 뛰어난 적응력을 바탕으로 기동전이라 부를만한 전차 운용을 보여줬습니다,
뭐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상황을 가정하고 그 상황에 따라 움지여야 했으며 부대 운영이나 전술적 판단 보다 지도력이 강조된 일본 제국군 보다는 양호했던게 사실이지요.
더 축약하자면 이렇습니다.
현실적으로 인력, 자원, 재원 그 모든 분야에서 열악하였던 현실에 따른 합리적 판단 아래에 일본 제국군은 나름 선전을 벌였습니다만 이건 뭐 소모전을 하자고 달려든 셈이었고,(사실 관동군에서는 대규모 교전이나 치명적인 교환을 제회한 그러한 소모전을 포함한 '접촉'을 통하여 소련의 기세를 꺾을수 있고 꺽어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기는 했었습니다만) 정신적 가치는 결코 유형적 가치의 저울 반대편의 추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