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간다. 엊그제 카페테리아에서 회의를 마쳤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난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지수와 경석이랑 같이 진행을 하고, 인터뷰 자료를 가지고 난 지금 701번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다. 인터뷰 도중에 특유의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선생님 가난한 학생들에게 용돈 좀 주세요!’라는 폭탄을 투하한 지수의 망언을 빼고는, 지금까지는 무난하다. 대략 도착하면 저녁 6시반정도가 되려나... 문득 서울 남쪽 끝에 위치한 내가 신촌까지 가야한다는 불공평한 처지가 생각나 한숨을 짓는다. 분명 출발을 5시20분정도에 했는데, 지금 시간으로 볼 때 - 휴대폰을 열어보니 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나머지 4명은 아직 출발할 생각도 안하고 있을 것이다. 아놔, 이건 해도해도 불공평하잖아. 게다가 난 약속장소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단 말이다. ‘독수리버거’라니, 그런 상호명이 있긴 한건가?
‘그래도...’
그래. 그래도. 이상하게 나의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에는 끊임없이 기대감이라는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단지 오늘 과제를 하여 밤을 새러 가는 것일 뿐인데, 뭐가 기대가 되는 것일까. 아니, 사실은 안다. 내가 왜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지. 언제부턴가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나를 신경쓰이게 만드는 한 사람. 나는 어느 새 그 사람을 의식하고 있었다. 분명히, 나는 지금 버스 의자에 걸터앉은 이 순간에도,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다. 이제 부인할 수 없다. 수업 시간에 경석이나 지수 옆에 앉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이 조금씩 희석되는 것만 해도 그렇고, 목요일 저녁이 되면 어떠한 이유인지 시간이 느리게 가는것처럼 느껴지는 것만 해도 그렇다. 사실 그 카페테리아에서의 회의 후 우리는 무언가 급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냥 만나면 인사만 주고받는 것이 고작인 다른 조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만나면 뭔가 대화거리가 생기면서 - 하다못해 지난주 드라마 내용같은 잡다한 소재들까지 - 수업시간에서까지 떠들어서 강사의 인상을 자주 찌푸리게 만들기까지 했으니까. 이래서 말을 놓으면 좀 편해진다는 걸까. 그래서 난 서연누나와 같은 경우에는 어떤 면에서는 반 친구보다 더 친숙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물론 둘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는 이유없이 강의실 곳곳에 있는 남자들의 곱지 못한 시선을 받기도 하였고. (나중에 알고보니 인문대에 들락거리는 예쁜 여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나를 신경쓰이게 만드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일단 전날, 금요일의 일이다.
“안녕하세요~”
하면서 강의실로 들어와보니, 우리 조원 중엔 서연누나 혼자 앉아있었다. 자리는 다 맡아놓은것 같아서, 난 자연스럽게 누나가 맡아놓은 앞자리에 가서 가방을 풀고 앉으려고 했다. 그래, 앉으려고 했는데.
“어..”
응? 뒤에서 뭔가 애교만점인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네?”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누나가 자그마한 입으로 펜을 깨물면서 약간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을 한번 깜박이는 것이 뭔가 귀엽다는 느낌이 든다. ...자꾸 나보다 세 살 많은 사람한테 귀엽다고 하면 뭔가 실례인것 같은데 말이지.
“왜 거기앉아?”
아니 왜 내가 여기 앉냐니 그건 당연히...
“거기 주현누나 자리잖아요.” “그래서 날 피하는거야?"
하면서 볼에 살짝 바람을 불어넣는 누나. 설마, 당신 삐진거야? 아니 왜? - 냐고 묻는 내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는 것을 느낀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빨개지는 것이다. 거참, 뭐지 이 알수없는 생리현상은. 어라, 숨까지 가빠질 필요는 없잖아.
“아뇨 그런건 아니죠.” “됐어 농담이야.”
죄송하지만 그런 표정으로 농담이라고 말해봤자 설득력이 없습니다 - 하며 난 어쩔 수 없이(냉큼) 그 사람 옆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런 날 보며 그 사람은 다시 웃는다. 그리고 난 그 빨개진 얼굴을 다잡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가늠해본다.
이 말을 들으면 혹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느낌은 ‘혹시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나?’ 이딴 느낌이 아니다. 적어도, 난 내 분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감정 역시 경계하고 있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나?’ 만큼 바보같은 의구심도 없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기 쉬운 오해도 없다. 그리고 난 단언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나를 동생으로만 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내 분수를 알고 있다. 적어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문제는, 내 마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혹시 이 사람을 좋아하는건가?’. “...”
위험해. 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나의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짐을 느낀다. 아무래도 버스가 사직터널을 지나가고 있나보다.
‘축하해.’
날 향해 웃는, 웃고있는 자그마한 한 여자의 형상. 그 형상이 떠오름과 동시에 난 황급히 MP3을 켜고 이어폰을 귀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형상을 지워보려고 애를 쓴다. 아무것도, 몰라, 나는. 그런 사람, 몰라. 버스는 이제 사직터널로 들어가고 있었다.
*
버스가 신촌역에 정차하자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덕분에 이제 남아있는 사람 숫자는 5명 내외다. 조용해서 좋다는 생각도 들지만, 일단 사직터널에서부터 느끼기 시작한 외로운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아까 갑작스럽게 날 덮친 그 환상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이제 MP3에서는 젊은 여자의 방방 뛰는 목소리가 인상적인 락음악이 나오고 있다. 시작부터 경쾌한 비트가 내 귓가를 자극하면서 보컬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시종일관 신난다는 듯이 떠들어댄다.
‘대체 뭐가 이렇게 신난걸까.’
피식하고 헛웃음이 나온다. 아아, 지금 나. 뭔가 냉소적이구나. 그런데, 이제 슬슬 물어봐야하지 않을까. 도대체 ‘독수리버거’라는 곳이 어딘지 나 모르는데. 핸드폰을 열고 문자를 일단 쓴다.
[야 독수리버거가 어디야 그런데]
그리고 수신자를 지수에게로... ... 왜일까. 여기에서, 내 손가락이 멈춘 이유는. 잠시동안 생각해본다. 지금 내가 왜이럴까. 아니, 물론 알고있다. 내가 왜 멈추었는가는 알고있다. 난, 지금 서연누나에게 물어보고 싶다.
“...”
왜, 나는 서연누나에게 물어보고 싶은걸까. 물론 인정한다. 이 사람, 나하고 잘맞는 점이 많다. 나하고 만난지 한달도 채 안됐는데도 조원들끼리 모이면 나하고 가장 이야기를 많이한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이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런 문자를 반 친구가 아닌 이 사람한테 보내려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머리와는 달리 손가락은 바삐 움직이고 있다.
사실 독수리버거가 어딘지 나름 짐작은 가긴 하는데 말이지 -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신자를 서연누나로 바꾸고 전송을 누른다.
“...”
답장이 온다. 바로다. ‘정말?’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빠르다.
[너 몇 번타고 오는데?]
바로 답장 보내주지. 마침 차도 막혔는데, 잘됐구나.
[701번이요.] [너 신촌거리 와봤어?]
가봤지. 열몇번은.
[...아, 한 두세번이요.]
그런데 난 지금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지.
[그럼 그 차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음에 쭉 오면 보여.]
아, 거기구나. 대충 감이 온다. 사실 거기서 문자를 끝내도 되는건데 말이지 - 하지만, 뭔가 좀 아쉬운 느낌이 있어서, 난 다시금 답장버튼을 누르고 만다.
[‘독수리버거’라고 써져있어요?] [아니-_-]
이 사람, 이모티콘도 쓰는구나.
[어, 그럼 어떻게 가요?]
... 갑자기 문자의 맥이 툭하고 끊어진다. 문자가 올 시간이 됐는데, 안온다. 뭐야, 답답하니까 결국 무시모드냐. 알아서 찾아오라는건가. 그런데 이건 이사람답지 않은데? 여태까지 친절한 모습만 보여줬는데, 이러면 좀 어색하지 않나...하고 생각하면서 별수없이 버스가 종점에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이 사람을 귀찮게 만든걸까? 내가 괜한 짓을 한걸까? 서서히 나의 머릿 속에 부정적인 피드백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려 할 때, 문득 바지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
뭐냐...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바라보니, 전화기엔 11자리의 핸드폰번호와 함께 다음과 같은 네글자가 써져있었다.
‘서연누나’
엥. 뭐지, 갑자기.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받는다. 물론 목소리가 떨리거나 이러진 않는다. 웬일인가... 싶은 마음에 핸드폰을 연 것일 뿐이다.
“여보세요?”
하지만, 전화기 저편에서는 그냥 웃음소리만 들려온다. 딱 소리만 들어봐도 서연누나, 맞다. 이 귀여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알아챌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왜 전화를 걸고 그냥 웃는건지 설명이라도 좀 해줬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