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은 당시 다른 여객선들과 마찬가지로 우편 운반선이기도 했으며, 등기우편물 200개를 포함해 3364개의 우편행낭이 적재돼어 있었습니다. 이 우편행낭의 처리를 위해 미국 우편원 3명, 영국 우편원 2명이 탑승했었으며, 타이타닉의 우편원들은 모두 우편원 생활 15년 이상 된 베테랑이었습니다.
이들은 빙산 충돌 당시 미국 우편원 오스카 스콧 우디의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배가 침수되기 시작하자 곧장 우편행낭을 쌓아둔 방으로 내달려 그곳에서 우편행낭들을 꺼내 갑판 위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발목 위로 점점 차올라 위험이 고조됐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다른 선원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만류해도 묵묵히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죽었으며 생일이 사망일이 된 우디의 시신에서 현장에서 목숨을 바쳤음을 보여주는 유품인 우편물의 행선지를 표시해 주는 전표가 발견됐습니다. 780만통의 편지들 또한 수장되었습니다.
3등실 승무원 존 에드워드 허트를 포함해 여러 승무원들과 갑판선원들은 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길을 잃어 헤메는 3등실 승객들을 배 밖으로 안내하고 구명조끼를 배포했습니다. 또 3등실 승객들이 있는 곳에서 해치를 열기 위해 보내진 선원들도 있었지만 전부 행방불명당했다고 합니다.
아이를 포함해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한 선원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프레드릭 플리트는 빙산을 맨 처음으로 발견한 견시 당직자로 당시 레지널드 리와 함께 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쌍안경 열쇠를 구군가가 항구에 두고 와서 맨눈으로 봐야 했는데 달빛도 없었는 데다가 파도까지 잔잔해서 견시들이 맨눈으로 빙산을 식별하기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6번 구명보트에 탑승해 살아남았지만 사건 후에 빙산을 빨리 발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부인이 죽자 자살했습니다. 레지날드 리는 생존자들 중 폐렴으로 가장 먼저 죽었습니다.
배의 조리장 찰스 조그힌은 충돌 이후 혹시나 모를 상황을 위해 생존자들이 구명보트에서 먹을 빵을 마련했고, 구명보트 10호에 탈 수 있었지만 본인은 이미 선원들이 충분히 있다면서 거절했고 술을 마시며 승객들을 구명보트에 태우는 것을 돕고 수십개의 의자를 바다에 집어 던졌습니다. 배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선미 끝에 메달려있었습니다. 참고로 술을 많이 마시고 선미가 가라앉을때 머리를 적시지 않은 덕분에(?) 상당히 2시간 동안이나 바닷물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온을 유지해 뒤집어진 접이식 보트 B에 매달려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타이타닉호 승객들의 희생정신 (& 노블리스 오블리제)
해럴드 & 울프 사의 설계 감독이자 타이타닉의 설계자인 토머스 앤드루스는 보증으로 탑승한 관계자들 중 하나였습니다. 빙산 충돌 당시 설계도를 보고 있었다고 하며 배의 보고상황을 보고 5구획에나 물이 들어가고 있어 배가 길어봐야 몇시간을 버틸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렸습니다. 승객들의 구명보트 탑선과 뜰 만한 물건들을 던지는 것을 계속해서 도왔습니다. 침몰하기 10분 전에 1등실 흡연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습니다. 다른 보증으로 탑승한 관계자들도 전부 죽었습니다.
(각각 아치발드 버트, 윌리엄 스티드)
이때 흡연실에 고귀하게 남기로 한 사람은 앤드루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승객들도 있었습니다. 미국 군인이자 언론인이었으며 구명보트 대피 당시 선원들의 혼란 제지를 도왔던 아치발드 버트는 같은 1등석 승객들인 아서 라이어슨, 프랜시스 D 밀렛, 클라렌스 무어 등과 함께 카드 게임을 계속했습니다.
당대 저명한 언론인이었으며 이전에 구명보트의 필요성에 대해 경고하는 사설을 쓴 적 있던 윌리엄 T. 스티드는 조용히 독서를 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윌리엄 스티드는 과거에 헤이그 특사를 도와준 몇 안되는 외국인이었다고 합니다.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저민 구겐하임은 자신은 살 수 없음을 직감하자 현지처와 하녀를 보트에 태우고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 "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비서 빅터 기길리오(이집트계 이탈리아인)와 같이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의 딸 페기 구겐하임이 여기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콜렉션한 예술 작품들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의 초석이 되었습나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노부부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이 좋은 노부부였습니다. 주변에 있던 지인이 노부부가 함께 승선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함께 승선하라고 권유했지만 이시도르는 "나는 다른 이가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네" 라고 말하며 승선을 거부하였습니다. 그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부인인 아이다 스트라우스도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하고 하녀 엘렌 버드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보트에 태운 뒤 남편과 함께 죽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둘이 함께 껴안고 누워있는 장면으로 등장합니다.
배에서 가장 부자였던 승객이었던 존 제이콥 애스터 4세는 자신과 30세나 차이나는 17살의 임신한 두 번째 아내(자기 아들보다도 나이가 적었다고 합니다)와 함께 신혼여행으로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후에 승객들의 구명보트 탑승을 돕고 아내를 태우지만 거절당하자 배에 조용히 남았습니다. 이후 우리에 갖혀 있던 배의 애완견들을 풀어주었다고 전해지며, 배의 굴뚝이 쓰러질때 깔려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렛 몰리 브라운은 남편이 금광을 발견한 덕에 순식간에 떼부자가 되었습니다. 침몰 당시 배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과 선원들을 열심히 도왔고 6번 보트에서 보트를 돌리자고 주장했으나 당시 보트를 맡고 있던 로버트 히친스(침몰 당시 조타수)가 거절했습니다. 이후 타이타닉의 별명을 따 이후 '가라앉지 않는(Unsinkable)' 몰리 브라운이라고 불리며 사교계에서 활약했습니다. 불행히도 말년에 재산이 크게 줄면서 어렵게 살다가 호텔에서 고독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1등실에 타고 있던 예비역 육군 대령이자 소설가 및 아마추어 역사학자였던 아치발드 그레이시 4세는 열심히 배를 돌아다니며 승객들의 환기구에 빨려들어갔다가 뜨거운 열기로 인해 빠져나와 뒤집어진 접이식 보트 B에 매달려 생존했는데 후에 소설가 및 집필가의 경력을 살려 자신의 경험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타이타닉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책을 썼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렸습니다. 타이타닉호에서 겪은 후유증이 겹쳐 얼마 후 사망했습니다.
토마스 바일즈 신부는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2등석에 타고 있었으며 침몰 전날 2등실과 3등실 승객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설교 내용도 침몰과 관련되었다고 합니다) 침몰 당시 승객들의 구명보트 탑승을 돕고 백명의 넘는 신자들의 고해성사와 미사를 봐주다가 영화에서처럼 선미에 남아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죽었습니다. 생존자의 증언으로는 이때 천주교, 개신교, 유대교를 가리지 않고 다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존 하퍼 목사는 침례교도로 18세부터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침몰 당시 여동생과 6살짜리 딸을 데리고 있었으며 유일한 보호자라 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탑승을 거부했으며 사람들을 구명보트로 안내하는 동시에 선교를 했다고 합니다.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구명보트로!"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와중에도 구명조끼도 남에게 건내주고 선교를 계속하다가 얼어죽었습니다. 이때 선교받은 사람들 중 한명은 후에 돌아와서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로테스 백작부인 뇨엘 레슬리는 젊은 귀부인으로 미모로 명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침몰 당시 여성이고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노를 열심히 저었고 이 동안 선원들과 3등실 승객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으며 구조된 후에도 음식과 담요를 나눠주는 등 가난한 승객들을 보살펴 모든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생존)
에디스 에반스는 1등실의 승객으로, 마지막 구명보트가 내려질때 자신도 탈 수 있었지만 가족이 있는 여성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배에 남아 죽었습니다. 생존하지 못한 네명의 1등실 여성 승객들 중 하나입니다.
카르파시아 호의 선장 & 선원들의 구조작업
카파시아 호(화이트 라인 사의 경쟁사 커나드 소속)의 헨리 아서 로스턴 선장은 열정적이고, 신앙심이 깊고, 결단력 있는 모습 때문에 선원들에게 존중받았고 "전기불꽃"이라는 별명도 붙었습니다. 사건 당시 로스턴 선장은 58마일 정도 떨어져 있던 타이타닉가 구조 신호를 보냈음을 무전사 해럴드 커텀에게 보고받자 주저하지 않고 즉각 전속력으로 현장을 향해 달릴 것을 지시했으며, 철저하게 구조 준비의 태세를 갖췄습니다. 왜 한국 해경은 여객선 선장보다 못할까? 빙산 탐지를 위해 견시 선원들을 추가로 배치시켰고, 생존자들을 위해 복도로 통하는 문들이 열려지고 밧줄과 사다리가 달아놓아졌고, 의사와 승무원들이 배 곳곳에 배치되고, 따뜻한 음식과 담요가 준비되고, 승객들의 양해를 구하고 빈 방들이 준비되었습니다. 또한 증기엔진의 동력을 속도에 집중하기 위해 배의 난방 시스템을 전부 끄라고 지시했고, 그 결과 정상적인 속도인 14.5 노트보다 높은 17.5 노트로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4시간 30분 동안에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했습니다(5명은 구명보트에서 죽었음). 배는 생존자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 담요, 의료 서비스를 곳곳에 제공했으며 여러 배의 선원과 승객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한 후 속도를 줄이고 침몰 현장으로 돌아가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지만 이미 무리였습니다. 로스턴 선장은 고국으로 돌아와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나 거절하고 대신 선원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이 밖에도 질서있게 명령을 따른 선원들이나, 구명보트를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한 승객들이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앞선 가장들도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