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아... 선생님. 저 성원입니다. 예, 건강히 지내시고 계시온지요. 하하... 안부전화를 드린다는게 이렇게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아니, 성원이가 전화하는데 당연히 고맙지! 목소리만 들어도 이렇게 반가운데 허허]
전화기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역시나. 이 분은 정말 나에게 잘해주시는 분이지만, 그리고 나도 정말 존경하는 분이지만. 실제로 대하면 뭔가 어렵다. 아니, 어려운게 아니라. 뭔가 벽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항상 웃는 목소리와 웃는 표정에서, 나는 가끔씩 그 뒤에 도사리는 소름끼치는 카리스마를 느낀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내가 부탁하는 것을 거절할 분은 아니다.
“선생님.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대학국어 수업을 듣습니다.” [아, 성원이 대학 들어갔지? 아이고 축하한다. 내 너 옷 맞추라고 선물이라도 미리 줬어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금 부탁 들어갈거니까요.
“아...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수업에서 조별 활동으로 서평을 써서 내는 것이 필요해서요...” [아, 그래?] “네. 그런데 제가 염치불구하고 선생님의 ‘내가 만난 세상’을 너무나도 감명깊게 읽어서, 그래서 여기에 대해 찾아뵈어서 몇가지 여쭈어볼 수 있을까합니다.” [오...]
잠시 뭔가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일이 커지는건가 -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은 그냥 놔둬본다. 아니, 놔둘 수 밖에 없다.
[다다음주 금요일 오후 6시20분 내 서재, 어때?]
그리고 2분정도 흐른 후, 굵직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오후 6시20분이라. 생각보다 일이 간편하게 풀리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아, 저야 당연히 시간됩니다. 시간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성원이 부탁인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니. 뭐 선물 갖고싶은거라도 있어?]
딱히 갖고싶은거라면, 여자친구라고 할까나.
“아뇨. 이 인터뷰 자체가 정말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아하하. 역시 말 이쁘게 하는건 여전하구나. 그래, 그때보자.]
그리고 통화가 마무리된다. 핸드폰을 닫은 나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등에서 나온 식은땀으로 안에 입고 있던 런닝이 반쯤은 젖은 느낌이다. 그건 그렇고, 다다음주라. 딱 적당한 타이밍이군. 다음주에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부담없는 조건이다.
‘앞으로 10년을 쓴다면 글쟁이라 말할 수 있겠군.’
문득, 고등학교 1학년 때 내가 글쟁이의 꿈을 키워갈 무렵. 이 분을 처음 만나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의 세 번째 습작을 보여드렸을 때 선생님의 무심한 표정에서 나온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그 때는 정말 무서웠는데. 그리고 지금 이러한 긴장감도, 그 때의 인상이 너무 깊이 남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10년이라, 그리고 나는 이제 3년이 지났다. 글은 계속 열심히 썼다고 자부하지만, 왜 그 분은 나에게 10년이라고 말했을까. 단지, 글을 쓰는 경험에 대해서 나에게 그렇게 말한 것일까.
“...”
어쩌면 그것은, 나의 삶의 무게가 너무 가벼운 것에 대한 피드백일 수도 있을 것이다 -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침대에 눕는다. 아무튼 대학생활이라는 거, 생각보다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에 스쳐지나간다.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도 그렇고.
‘조장님?’
...왜 갑자기 그사람 목소리가 생각나지. 귀엽긴 하다만, 잠잘 때 생각날 정도는 아니잖아?
*
세번째 수업이 있던 금요일 오후. 나는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의 강의실에 앉아 탄식을 내뱉고 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가 - 하는 때이른 허무함도 일조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5명의 자리를 맡게되는 역할’을 맡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의 그나마 세권밖에 없는 책들은 내 앞의 세자리로 분산되었고, 책가방은 내 옆 오른편 자리에 던져놓았다. 이걸로 5명 완료다.
“헤유...”
오늘 수업이 끝나고는 우리 조원들과 두 번째 미팅이 있다. 미팅이라고 하니까 흐뭇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만(사실 오늘 저녁에도 미팅 약속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 흐뭇한 느낌의 미팅이 아닌 말그대로 ‘만남’이다. 게다가 난 지금 이 수업 뿐만이 아니라 다른 수업들 중 조별 수업이 있는 두 개에서도 ‘어쩌다보니 조장을 맡아버린 상황’에 처해버렸다. 뭐, 리더쉽을 기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
그래도 이 학교, 내가 조장인걸 보면 생각보다 ‘인재들의 모임’은 아닌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대략 2/3정도 찬 분위기이다. 우리 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난 그 사람들을 보고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열명 정도는 나한테 와서 말을 붙이며 장난을 걸어오지만, 지금 난 아쉽게도 그럴 기분이 아니다. 글쎄, 그런데 내가 지금 기분이 나쁜건가? 왜 나쁜거지? 자신조차 그 이유를 모르는 짜증만큼 싫은 것도 없는데 말이지.
“아, 성원아.”
덜컹. 이 소리는 의자가 흔들리는 소리가 아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내 심장이 놀라는 소리이다. - 뭐, 뭐야.
“에?”
책상위에 엎어져 잠을 청하려는 자세 그대로 내 이름을 부른 쪽을 돌아본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는, 상상에 맡긴다. 아니, 상상에 맡길 필요 없다. 바보같다.
“에고. 내가 방해했나보네. 졸린가봐~”
방해가 되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웃으면서 내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는 이 사람은, 저번에야 이름을 알게된 그 ‘서연누나’이다. 당초 내 옆에는 경석이를 앉힐 생각으로 뒤쪽으로 앉았지만, 그 계획을 무참히 부셔버린 이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날 보고 눈을 깜박인다. 뭐, 계획대로 되거나말거나 사실은 상관없지만.
“아, 안녕하세요.” “엉. 안 자?” “아뇨, 깼어요.”
그건 그렇고 말을 할때 눈을 많이 깜박이는구나. 그리고 목소리는 여전히 적응이 안된다. 귀엽다!
“자리도 다 맡아주고, 수고했어요오~”
그렇게 말하면서 나한테 음료수를 건넨다. 설마 매점에서 250원에 파는 요구르트는 아니겠지 - 하며 실눈을 뜨며 그 음료수를 보니, 무려 800원에 판매하는 ‘웰치스’다. 이 정도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뚜껑을 따자, 탄산음료 특유의 쏴하는 소리와 함께 포도향이 코를 스쳐간다. 거참, 내가 이거 좋아하는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모금 홀짝거리고 나니, 뒤늦게야 지금 내가 있는 상황에 대한 파악이 되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여기에 이 사람하고 나하고 둘만 있구나. (물론 나머지 수강생들은 알바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상황을 즐기지는 않는다. 즉, 아직 친하지 않은, 알게된지 얼마 안된 사람하고 둘이 있는 것을 싫어한다. 물론 이 옆에 있는 누나야 나쁜 느낌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만, 본래 친하지 않은 사람하고 대화거리를 술술 풀어내면서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것은 나와는 거리가 먼 능력이다. 어쨌든, 일단 뭐라고 말이라도 걸어보자. 내가 이렇게 생각할 동안 이미 저 누나는 책을 펴놓고도 뭘할지 몰라 그냥 펜만 돌리고 있단 말이다.
“저...” “응?”
날 향해 바로 고개를 돌리는 누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난 바로 시선을 돌린다. 일단 눈이, 눈이 너무 해맑다. -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문제는 일단 꺼낸 대화를 어떻게 진행시키냐는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이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하지? ‘저기요’라고 말하려는걸 가까스로 다시 삼켜버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서연씨’라고 불러야하나? 그건 너무 느끼한데? 그러면 ‘서연님’?... 생각하기도 싫다. 지금 인터넷정모하는 것도 아니란말이다. 생각해라, 뭘 말할지 생각해. 아니,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할지 생각해라. 임마, 생각하라고! ...그리고 그렇게 10초간 혼자 머리를 싸매다가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다음과 같았다.
“어떻게 부르면 되려나요?”
망했다.
*
“어?”
나의 물음이 의외라는 듯이 이 누나는 눈을 깜박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리고 난 뒤늦게 내 자신의 물음을 곱씹어보면서 한없이 괴로워하고 있다.
“설마, 날 말하는거야?” “...”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아는 사람은 가르쳐줘라. 제발 부탁이다. 아무튼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해본다.
“아, 내 이름 까먹었어?” “아뇨, 알아요.”
아,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이 느껴진다. 정신차려라 지성원. 너 원래 이렇게 여자한테 말 못붙이는 아이였냐. 아니잖아, 정신차려라. 그런데 도대체 내가 왜 지금 이런 상황에 빠져있는거냐. 생각해보면, 난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아니, 한국인이라면 지금 이 상황이 정말 이해가 안되겠지. 난 그냥...
“그럼 그냥 ‘서연누나’라고 부르면 되잖아?”
...그래. 그렇지. 맞는 말이네. 한국어에 충실한 당신의 실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아, 네. 그럴게요, 누나.” “응..”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누나는 나를 계속 빤히 바라본다. 아무래도, 나를 이상한 사람 뭐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지금의 나로써는 할말이 없다만. 다행히 이 순간에 경석이와 지수가 떠들면서 문을 열고 강의실을 들어옴으로써, 나는 황급히 그 둘을 부름으로써 그 이상한 대화는 마무리지어졌다. 이걸로 일단 수업시간은 넘겨보자. 그 다음은 뭐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하고.
*
수업은 예상외로 빨리 끝났다. 아직 염색을 풀지 않은 몇 명에 대해 감점처리를 하고 10여분간 ‘문인이 가져야할 외적 태도’에 대해 설교를 들은 것만 제외하면, 못 들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우리 다섯명은, 전에 갔었던 카페테리아로 다시 발걸음을 옮겨 차후 일정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 논의가 처음에는 인터뷰 스케쥴만 물어보던 것에서 점점 스케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인터뷰 후 리뷰를 하는 것에서부터 주변 자료 분석, 그리고 PPT로 옮기는 작업. 그리고 발표 준비까지 전 과정을 어우르는 토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밤 한번 새죠?”
새내기가 과열하면 사고를 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고맙구나, 지수야. 이로써 우리는 ‘밤새서 PC방에서 조사작업을 다 끝마치고 PPT까지 해버리자’라는 결론에 다다라버렸다. 애초에 밤을 샌적이 없던 나로써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지만, 날 제외한 ‘알고보니 학교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는’ 4명은 그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다. 반칙이다, 이건. 카페테리아를 터벅터벅 나오면서, 파란 하늘에 외로이 둥둥 떠다니는 구름 한점을 바라보며, 괜시리 고개를 수그린다. 뭔가 피곤하다.
“그런데 다들 연락처를 몰라서 어떡해요?”
그런데 따라나오던 경석이가 갑자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한다. 아,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경석이하고 지수, 나는 서로 안다쳐도, 서연누나와 주현누나는 연락처를 모른다. 물론 해결책은 간단하지만 - 서로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고 서로 교환한다.
“아, 그럼.”
주현누나와 폰을 주고받고, 그 다음은 서연누나다. 자그마한 손에서 핸드폰이 나에게로 건네지자, 괜시리 알수없는 묘한 기분이 든다. 뭐냐, 이 기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