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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게시물ID : freeboard_20360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택시운전수
추천 : 8
조회수 : 927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24/11/28 12:25:10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서울에서 택시 운전수 노릇을 하는 임 기사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평택에(자그마치 85km이다) 들어간답시는 어느 아가씨를 평택역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평택역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결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미군인 듯한 양코장이를 홍대입구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번에 8만 원, 둘째 번에 7만 원 - 아침 댓바람 부터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임 기사는 미터기에 8만 원, 그리고 7만 원이 결제될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15만 원 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맥주 한 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임신한 아내에게 순댓국 한 그릇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그의 아내가 임신으로 배가 부르기는 벌써 석 달이 넘었다. 입덧을 해서인지 평소에 식사를 거의 못 하고 있었다. 그나마 순댓국을 먹을 때 만큼은 입덧을 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그렇다고 삼시 세끼를 순댓국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태여 먹으려면 못 먹을 바도 아니로되 아내는 매 번 돈을 들여 순댓국을 사먹기에는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임 기사가 아내에게 먹고 싶은 것은 참지 말고 먹으라고 말 해도 그때 뿐이었다. 아내는 더 큰 집으로 이사갈 돈을 모으기 위해 지금도 그냥 찬 물에 밥을 말아먹고 있을 터였다. 오늘은 그런 아내에게 순댓국을 잔뜩 사다 줄 수 있었다.


사납금 15만 원을 입금한 임 기사의 마음은 푼푼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창문에 흐르는 빗물을 와이퍼로 닦으며, 홍대 클럽거리를 돌아나올 때였다. 휴대폰에서 카카오T!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목적지를 보니 경기도 일산이었다. 못 해도 3만 원은 나올 거리이다. 손님 위치로 가니 젊은 남자가 택시에 탔다


아마도 여자를 꼬시러 홍대 클럽에 왔다가 여의치 못 하자 포기하고 귀가하려 함이리라. 이제 가기로 작정은 하였건만 비는 오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에는 밤새 술을 마신 몸이 피곤해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휴대폰 앱으로 택시를 불렀음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왜 입에선 술냄새와 담배냄새가 풀풀 나고, 비록 대학교 과잠일망정 노박이로 비를 맞으며 임기사의 택시에 탔으랴.


"아저씨 최대한 빨리 좀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 말씀입니까.”하고 임 기사는 잠깐 주저하였다. 그는 이 우중에 강변북로를 타고 자유로를 거쳐 일산까지 가기가 싫었음일까? 처음 것, 둘째 것으로 그만 만족하였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행운 앞에 조금 겁이 났음이다. 그러나 눈 앞의 돈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임 기사는 손님을 태우고 상수역에서 강변북로로 빠지는 길로 들어섰다.


아침 8시가 넘자 강변북로는 막히기 시작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가는 동안 뒷자리의 손님은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님이 임 기사에게 말했다.


"아저씨,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그러는데 잠깐 창문 좀 열어도 되나요?"


"예, 물론이죠."


임 기사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손님이 창문을 열자 주위 차들이 내는 소음에 차 안이 시끄러워졌다. 손님도 목소리를 높여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임 기사는 내비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휴대폰의 불륨을 높여야 했다. 그러자 차 안은 더 소란스러워졌다. 운전을 하던 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시큼한 냄새가 났다. 임 기사가 룸미러로 손님을 힐끗 봤으나 손님은 아무 내색도 없이 전화통화를 계속 하고 있었다. 임 기사는 열어 둔 창문으로 바깥의 냄새가 흘러 들어오나 싶어 그냥 운전을 계속했다.


탄현역 근처에서 손님이 내리고 난 후 3만 원이 넘는 요금을 결제하는 순간 제 말마따나 20km나 되는 길을 비를 맞아 가며 질퍽거리고 온 생각은 아니하고, 거저나 얻은 듯이 고마왔다. 졸부나 된 듯이 기뻤다. 제 조카 뻘밖에 안되는 어린 손님에게 몇 번 고개를 숙이며, “안녕히 가십시요.”라고 깍듯이 인사했다.


그러나 빈 택시를 털털거리며 이 우중에 돌아갈 일이 꿈밖이었다. 노동으로 하여 흐른 땀이 식어지자 굶주린 창자에서, 물 흐르는 창문에서 어슬어슬 한기가 솟아나기 비롯하매 3만 원이란 돈이 얼마나 괜찮고 괴로운 것인 줄 절절히 느끼었다. 탄현역을 떠나는 그의 손길은 힘 하나 없었다. 온몸이 옹송그려지며 당장 그 자리에 엎어져 못 일어날 것 같았다.


“젠장맞을 것! 이 비를 맞으며 빈 택시를 털털거리고 돌아를 간담. 이런 빌어먹을, 제 할미를 붙을 비가 왜 택시 유리창을 딱딱 때려!”


그는 몹시 홧증을 내며 누구에게 반항이나 하는 듯이 게걸거렸다. 그럴 즈음에 그의 머리엔 또 새로운 광명이 비쳤나니 그것은 이러구 갈 게 아니라 이 근처를 빙빙 돌며 차 오기를 기다리면 또 손님을 태우게 될는지도 몰라란 생각이었다. 오늘 운수가 괴상하게도 좋으니까 그런 요행이 또한번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하랴. 꼬리를 굴리는 행운이 꼭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내기를 해도 좋을 만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경기도 택시 기사의 등쌀이 무서우니 지하철 역앞에 섰을 수는 없었다.


그래 그는 이전에도 여러 번 해본 일이라 바로 지하철 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지게, 사람 다니는 길과 버스 전용차선 틈에 택시를 세워놓고 손님이 택시를 발견하고 다가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하자 정류장에 있던 손님들이 버스로 몰려들었다. 잠시 후 버스에 미처 타지 못 한 손님 중 하나가 임 기사의 택시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조수석 창문에서 임 기사에게 상암동까지 가냐고 묻는 손님에게 임 기사가 택시에 타라고 말하자 손님은 뒷문을 열고 택시에 타려다 소리쳤다.


"기사님! 뒷자리에 누가 토를 해놨는데요?"


임 기사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네? 토요?"


임 기사가 몸을 돌려 뒷자리를 확인하니 아까 손님이 앉아있던 자리가 토사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좀 전에 났던 시큼한 냄새는 토사물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아니! 이 사람이 토를 했으면 했다고 얘길 해야지 말도 안 하고 그냥 가버렸네!"


그동안 택시에 타려던 손님은 다른 택시를 발견하고 그 곳으로 가버렸다. 임 기사는 눈 앞에서 놓친 손님이 아쉽기도 하고, 또 세차를 해야 할 일이 막막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앞으로 남은 예닐곱 시간 동안 더 이상 영업을 하지 못 하게 된 것에 짜증이 났다.


“손님이 있는데 왜 태우지를 못하니, 왜 태우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

출처 현진건 님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인용하고 일부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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