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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자소설쓰기 - 업데이트는 잊었지만, 계속 쓰고는 있었다죠
게시물ID : freeboard_20343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92%당충전
추천 : 4
조회수 : 62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4/10/26 22:3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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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인류의 얼굴은 줄곧 같은 표정이었다.

기상 이변으로 생존 위협을 받았을 때도, 화성 개척에 열을 올릴 때도, 그곳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도, 늘 같았다.


"화성은 꿈도 꾸지마."


마코토는 완강했다. 포기를 모르고, 욕망대로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인류의 표정 그 자체였다.


"아버지, 거기가 희망이에요."

"아니, 거긴 낙오자나 가는 곳이다."


렌지는 질려버렸다. 여전히 20세기 방식으로 21세기를 버티려는 마코토. 아버지는 어째서 기회를 멀리 할까?


"가업을 이을 필요는 없다."

"가업이요? 이을 수만 있었어도 떠날 생각 따윈 하지 않았죠. 아니, 당장 라멘에 넣을 고명이나 있고요? 우리도 당장 겨우 캡슐이나 먹고 있잖아요! 아버지, 여긴 희망이 없어요!"


렌지의 절규에도 마코토는 굴하지 않는다. 인류의 표정이다.


"너야말로 돌아봐라. 성공한 사람들은 여전히 모두 지구에 있고, 쌀을 먹는다."


결국 등을 돌린 렌지.

그의 얼굴도 같은 표정이다.

 

 

 

38.


번외1  타인에게 제시받은 키워드로 작성한 게임. 

당시 키워드 : 온라인게임, 알약 , 순간이동장치, 유체이탈,음주, 노래방, 개사료 중 4개를 사용하는 것이었으나 전체 사용함.


시작은 개사료였다.

개가 인간의 감기약을 먹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며 트리샤가 알약을 개사료에 섞었을 때, 지구의 종말은 확정되고 말았다.

젠장, 트리샤. 망할 위스키.

취하지만 않았다면 말렸을 텐데, 역시 음주는 해롭다. 덕분에 지구까지 망할 판이다.


개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잊은 채 트리샤는 온라인게임에 접속했고, 위스키에 절었던 난 집에 들어서자마자 개밥 그릇에 얼굴을 묻고 쓰러졌었다. 그렇게 망할 알약을, 개밥을 삼켰지.

밥이 뺏겼단 사실에 화가 난 하워드는 날 보고 짖기 시작했다. 망할 X자식, 너라도 조용했다면! 개소리에 지구 밖에서 도청 중이던 외계인들이 자극 받고 말았다.


"도청이 들통났다! 이건 공격 신호다!"


우주선에서 지구까지 순간이동장치 버튼 한번이면 그만이다. 평소에는 유체이탈을 한 번쯤 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술에 절은 몽뚱이가 원망스러울 뿐. 젠장, 트리샤. 망할 위스키!


벌써 놈들의 그림자가 보인다.



39.


도서관이 사라졌다.

가장 먼저 뉴욕에서 사라졌고, 서울과 런던, 방콕에서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게 도미노의 첫 조각이었다.


결국 책을 잃은 자들과 책을 읽지 않는 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왜 싸우게 된 건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 채. 다들 지성인답지 않게 괴성을 내질렀고, 폭력을 휘둘렀다. 다행히 싸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도서관과 서점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스마트폰도 증발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그제야 함께 고민을 나누었다.


"이러면 앞으로 일은 누가 하고?"



40.


번외2.  제시받은 키워드는  Vip / 연극배우 / 줄기세포 / 대리운전 / 탕수육 / 절친 / 티팬티  역시 전체를 다 사용함.


패가 들어왔다.

J는 펴보지도 않고 대뜸 판돈을 키웠다.


"장 당 천만 씩 더 태우자."


K가 담배 연기를 뱉었다. 6이 2장이었다.


"콜. 근데 그거 알아? 줄기세포 연구자는 티팬티만 입어야 한데. 요즘은 대리운전도 티팬티 입어야만 콜 받는 앱 깔 수 있다 그러고."


T가 카드를 펴보았다. 9가 3장이었다.


"티팬티? 뭐야? Vip 룸 수준이 왜 이래? 그냥, 빨리 끝내자. 받고, 억!"

"좋아! 받고, 억 하나 더! 거기에 내 티팬티까지."


J가 기다렸다는 듯이 베팅했다.


"젠장, 난 사각드로즈라서 다이."

"쇼하네, 콜! 까봐."


T가 칩을 올리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J가 카드를 깠다.

4, 포카드였다.

부들부들 떠는 T 옆으로 K가 다가섰다.


"내 절친 탕수육이 질질 짜잖아. 지 마누라가 연극배우랑 바람났다고. 몸만 줬으면 다행인데, 돈까지 퍼줬다네? 그럼,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다시 빤쭈까지 다 털어서 되찾아주는 수밖에. 새끼야, 빨랑 빤쭈부터 벗어!“



41.


난 기록된 이야기보단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좋다. 예를 들면, 환웅에게 청했던 건 곰과 호랑이만이 아니었고, 인간 중에도 짐승이 되길 바란 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여우와 함께 환웅을 찾아간 타룬의 이야기가 좋다.


어울려 일을 해야 먹고 사는 인간의 삶이 싫었던 타룬은 풀만 뜯고 사는 소가 되길 바랐고, 여우는 고상한 인간이 되고팠다.


환웅은 타룬에게 백일간 양고기를 먹으라 했고, 여우에겐 생강을 먹으라 했다. 둘은 같은 굴에 갇혀 석달 열흘을 약속했지만, 보름도 넘기질 못했다.


여우는 타룬의 양고기 냄새를 견디기가 괴로웠고, 타룬은 막상 소가 된다 생각해보니 새삼 고기 맛이 아쉬워졌다.


결국 이들은 함께 굴에서 나오게 되는데, 허기졌던 여우는 열 걸음도 옮기기 전에 타룬에게 달려들었고, 타룬은 저항조차 귀찮아 덥썩 팔 한쪽을 그냥 내어주었다.


모호한 기록의 매력은 이쯤부터 피어난다.

이후 웅녀 탄생까지 틈새 간극이 백두에서 한라까지니까.


 

 

42.


쥬베이가 먼 하늘을 보며 노래하듯 말했다.


"조선의 활을 가지고 싶어."

"조총이 돌고 있는 세상에 활?"

"꿰뚫는 건 같지만, 날아가는 곡선이 훨씬 아름답잖아! 뱃사람들도 그러던데? 조선은 활이 으뜸이라고!"

"뱃놈들은 전부 물고기밥이 될 뻔했던 놈들이야. 죽다 살아난 것들은 제정신이 아니지. 태반은 과장이야. 정신 차려! 조총은 직접 봤지만, 물 건너 활은 귀로만 들었다고!"


고개는 끄덕였지만, 듣지는 않았다. 하늘로 쏘아진 쥬베이의 시선이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왜국의 검을 가져다 주시오. 우리와는 다루는 자세부터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니 연구해볼 필요가 있소."


이연덕은 바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수평선을 꿰뚫을 것처럼 쏘아졌다.


"검도 검이지만, 저들은 조총이란 신식 무기가 있습니다."

"검은 봤지만, 조총은 귀로만 들었으니 우선 검부터 부탁하오."


뱃사람이 떠났지만, 이연덕은 여전히 바다를 가를 기세로 자리를 지켰다.



43.


수도꼭지의 소원은 말하고 싶을 때 편하게 말해보는 거다. 제발, 마음껏!


"꼬로록, 나도오, 마아알 조오옴 하아자아앗!"


하지만 어림도 없다. 말문이 트이는 순간에는 꼭 주둥이로 물이 쏟아진다. 비워내고 비워내도 계속 쏟아져서 말할 틈이 없다.


수도꼭지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제발 좀 평소에 자신을 잘 닦아주길 바란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머리 위로 물이 부어지는 건 흔했지만, 구석구석 닦이는 건 흔한 경험이 아니었다. 덕분에 수도꼭지는 몸 구석구석에 물때가 끼이는 걸 알면서도 손쓰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있어야 했다.


가련한 수도꼭지!

녀석이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건 세월이 한참 지나 말하는 법을 거의 까먹었을 때쯤이다. 오랜 시간 방치되어 관에 녹이 슬기 시작한 어느날. 낯선 손이 나타나 수도꼭지를 만졌다.


"우와! 이게 얼마만이야! 어? 근데 물이 나오질 않네! 이얏호!"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낡아버린 녀석은 곧바로 교체되고 말았으니까.

 

 

 

44.


소설 속 세상에 갇히는 건 정말 절망적이다. 내가 장담한다. 그건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여러분은 아마 1시간도 못 버틸 거다.

왜냐고? 명확한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여긴 사람들의 얼굴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제대로 된 윤곽이 없고, 옷차림도 매우 획일적이다.


그렇다. 작가의 묘사가 미치지 않는 부분은 죄다 이런 식인 거다. 주인공과 중심 사건 외에는 뭐든 간결하고 엉성하다. 대략적인 이미지로 문장이 채워지니 뭐든 명확한 게 없다. 배가 고파 음식을 먹어도 그렇다. 뭐든 생김새가 엉성하고, 맛이 없다. 정말, 문자 그대로다. 아무런 맛도 나질 않는다.


불완전한 문장 덕에 불명확한 것들로 채워진 세상.

이런 세상이다보니 냅다 도망부터 치고 싶지만,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이야기 진행조차 멈추어 버렸다. 정말 최악이다. 이후로 같은 일상만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나를 제외하곤 세상이 멈춘 채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45.


번외 3  키워드: 프로파간다/  파이프오르간/ 고해성사/ 물티슈/ 이끼/ 엽총/ 역시 전체 다 사용함.


"엽총에서 파이프오르간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났어!"


릭은 자신이 봤던 '늙은 악마'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늙은 악마. 그는 분명 독특하다. 부패한 목회자를 직접 찾아 처단하는 미치광이. 그렇다고 딱히 어떤 프로파간다를 설파하지도 않는다. 그저 쏘고, 부수고, 떠난다.


그런 자를 직접 봤으니 흥분한 건 이해해도 과장은 못 들어주겠다. 총에서 파이프오르간? 신박한 개소리다.


"뇌에 이끼라도 낀 거야? 적당히 해. 총을 쏠 때마다 바람 빠지는 방귀 소리라도 났단 말이야? 뻥도 적당히 쳐야지!"

"정말이야! 그가 겨눌 때마다 그런 소리가 들렸어! 총에 맞기도 전에 상대의 영혼이 먼저 빨려 들어가는 그런 소리였어!"


릭은 완전히 선을 넘어버렸다.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참회자처럼, 손깍지까지 끼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폼이 이젠 역겹기만 하다.


"젠장, 사내가 질질 짜다니! 못 봐주겠군. 물티슈라도 챙겨줘?"


난 늙은 악마의 현상금을 떠올리며 총을 챙겼다.

이건 기회다.

 

 

 

46.


"알라딘은 운이 좋았지. 반지의 지니도 만났고, 램프의 지니도 만났으니까."

"그런데 램프의 지니는 소원을 3가지만 들어주잖아?"

"누가 그래? 아니야, 그렇지 않아. 램프의 지니는 굉장해. 꼴랑 3가지만 들어줄 만큼 능력이 형편 없지도 않고, 쩨쩨하지도 않아.“


애니메이션이 원작인 『천일야화』를 삼킨 시대다. 난 잘 알면서도 아이에게 원작을 읽어주고 있다.

덕분에 아이는 분명 곤란해질 게다. 또래에게 내게 들은 대로 말한다면, 아이들은 비웃겠지. 애니메이션도 안 봤냐고.


"잘 들어. 이건 비밀인데, 이야기는 이야기를 삼킬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사람들은 아닌 걸 진짜로 믿게 되지! 그래서 우리가 있는 거야. 비밀결사대 말이야. 쉿! 정체를 들키면 곤란해. 우린 비밀 조직이니까! 오늘부터 우리가 이야기를 지켜내는 거야!"


아이의 눈이 빛난다.

난 그 눈을 향해 내 욕망을 투영한다.


'너만의 이야기로 세상 이야기를 다 씹어 먹어버리는 거야!'

 

 

 

 

 

 

 

-

 

스스로 정한 숫자가 120 편입니다.

120편 모으기 전까지만 해보자 하고 있는데, 

어쩌다 보니 벌써 47편이네요.

 

다들 좋은 주말 밤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 내 뇌 우동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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