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기유>는 강화도 조약(1876) 이듬 해 새로 바뀐 일본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조선에서 파견한 사신단의 대표 김기수가 집필한 보고서입니다.
해당 보고서에서 재미있는 일화들이 몇 개 있는데요, 그 내용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1. 근대 외교절차 vs 전통 외교절차의 충돌
모리야마 시게루(일본 외교관)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국법에는 각국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8성(省)의 경(卿 장관(長官))을 차례로 찾아보게 되어 있으니, 만약 경(卿)을 만나지 못하면 다만 명함이라도 드리고 돌아오는 것이 예의입니다. 모레 예를 행한 후에 즉시 이 예를 행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므로, 나(김기수)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일찍이 행하지 않은 예입니다.”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각국에서 통행하는 규정인데 무엇이 옳지 않겠습니까? 또 그전의 통신사도 각로(閣老, 과거 막부의 대신들)를 만났으니 옛날에는 이러한 예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통신사의 전례는 나도 알고 있습니다마는, 다만 국서를 관백(關白)에게 드리고 관에서 며칠간을 머물고 있다가 국서만 받아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혹시 각로를 만난다는 것은 붕우(朋友)를 찾아보는데 불과할 뿐이오니 지금에 와서 어찌 예가 되겠습니까? 또 우리나라는 신라ㆍ고려 이후로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이웃 나라와 화평하게 사귀는 것이 모두 전례가 있으니 다만 이 사무만 볼 뿐이며 감히 사적인 교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근년에 와서도 해마다 사신이 북경(北京)에 가면 다만 예부 한 곳에만 일을 보고, 예를 마치면 돌아왔으며, 일찍이 각 부(部)와 성(省)을 차례로 찾아보지 않았으니 전례가 뚜렷하였습니다. 이번 걸음은 우리 주상(主上)의 명령을 받들고 바로 귀국의 외무성에 나아가서 봄에 귀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던 예를 회사(回謝)하고 옛날 신의(信誼)를 수호(修好)할 뿐이며, 다른 성(省)을 차례로 찾아보라는 명령은 받지 못하였으니 다른 예(禮)를 내 독단으로 행하는 것은 나로서는 감히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권대승(모리야마 시게루)이,
“각국의 사신들이 한결같이 차례로 각 성의 장관을 찾아보는 것은 벌써 규례가 되었으므로, 이번 수신사의 행차도 각 성의 경(卿)들은 으레 찾아보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외무성으로서도 또한 말로써는 이것을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각 성의 경들이 만약 모두 수신사를 보려고 한다면 만나보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국법은 근신하고 졸수(拙守)하는 것으로써 규율을 만들었으므로, 감히 자기 단독으로 처리하는 일이 없사오니 지금 이 예(禮 각 성의 경(卿)을 방문하는 일)를 내 단독으로 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귀국이 우리나라와 다시 옛날 신의를 수호(修好)하여 영구히 잘 지내게 되면 두 나라가 한 나라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졸규(拙規)를 근수(謹守)하는 것은 귀국에서는 아는 바이오니 억지로 해서 안될 일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또 이번 걸음은 오로지 귀 외무성의 주선과 편의 제공에 의지하고 있사오니 각 성에서 혹시 말이 있더라도 귀 외무성에서 잘 설명하여 시비의 단서를 없도록 함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원컨대 두 분께서는 깊이 서량(恕諒)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권대승(모리야마 시게루)은 대답하기를,
“앞으로 더 생각하여 편의한 방법을 강구하겠습니다.”
(중략)
고택경범(일본인 외교관)은 또 말하기를,“내일 문부성(文部省)에서 초청한 일이 없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있었습니다.”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그러면 장차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근일에 귀국 조정에서 여러 곳에 와 달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좇아 나아가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듣기에는 문부성은 귀국의 태학(太學)이라고 하니 태학에서 초청하는 것을 또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벌써 이를 승낙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잘하셨습니다. 모레는 원로원(元老院)에서 초청이 없었습니까?”
하므로,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그는 또 말하기를,“승락하였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아직은 승낙하지 않았는데, 원로원은 어떤 사무를 보는 관청입니까? 내가 요사이 몸이 건강치 못하여 명령대로 곧 따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고택경범은,“원로원은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로원 의장(議長)은 곧 우리 황상(皇上)의 지친인 2품 친왕(親王)입니다. 친왕께서 공(公)을 보고자 하여 초청하는데, 공이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므로, 나는 갑자기 화가 나서 얼굴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친왕은 어떤 친왕입니까? 수신사가 비록 하찮은 사람이지만 다른 나라의 봉명사신(奉命使臣)인데, 다만 자기들이 보고자 하면 쉽사리 부르니 체통과 예절로 헤아려 보더라도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내가 비록 피곤도 하지마는, 이 일에 대해서는 단연코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고택경범은 말하기를,“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 말이 잘못된 것입니다. 친왕의 존체(尊體)로서 합하(閤下)를 보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고, 즉 초청한다는 말입니다. 원로원은 곧 우리 조정의 대소사(大小事)를 회의하는 곳인데, 의장은 곧 친왕입니다. 지금 두 나라가 다시 예전 정의(情誼)를 수호하게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제도와 시설을 귀국에 알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집으로 초청하지 않고 원로원으로 초청하는 것이온데, 선생께서는 어찌 지나치게 생각하십니까?”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듯하여, 첫머리 한 마디 실언(失言)한 것은 과히 따질 것이 못되었다. 이에 웃으면서 말하기를,“공의 말이, 친왕께서 나를 보고자 하여 부른다 하기에, 나 또한 대단히 거슬려서 앞에 지나친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 또한 귀국 조정의 후의이오니 내가 어찌 가지 않겠습니까? 공도 이 말로써 미리 알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고택경범은 기뻐하면서 돌아갔다.
2. 양복 입기 vs 전통 의상 입기
대승(모리야마 시게루)이,
“공이 우리나라에 와서 보고 들은 것 중에 응당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한평생 집에서 밥 먹고 있다가 갑자기 만 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오게 되니 물결이 세찬 것이 겁도 나고 배가 뒤집힐까 두려워서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처지였는데, 듣고 본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비웃을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때때로 갑판에 오르매 몸은 흔들려도 먼 데서 부는 바람과 세찬 물결만은 또한 나의 가슴속을 시원하게 하여 주니 이것은 정말 기뻤습니다. 육지에 내려와서는 궁실의 아름다움과 시사(市肆)의 번창함을 보고는 귀국의 부성(富盛)함을 알겠사오니 이것 또한 치하할 만한 일이온데, 괴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있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대승은 웃으면서,
“의복 제도와 배와 수레의 제작은 괴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것이 없지 않을 듯하온데, 이것도 과연 기쁘고 치하할 만한 일입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일찍이 통신사의 기록한 것을 보고 귀국의 제도에 관해서는 대강 알고 있었는데, 저고리와 치마는 넓고도 커서 꾸밈이 없고, 판자(板子)막이와 띠[茅] 울타리는 소탈하면서도 아담하고 빈틈이 없으므로, 한 번 보고도 귀국의 의복과 궁실의 예전 제도를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실로 지금 보고서 마음속으로 사랑하였기에 다른 것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대승은 말하기를,
“이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근일에 제작한 의복과 궁실은 모두가 양제(洋制)입니다. 일본인의 심리는 본래 경박하여 다른 사람이 새로 만든 기물(器物)만 보면 반드시 이것을 사랑하고 갖고 싶어하는 까닭에, 그 좋아하는 그대로 맡겨 두어 익히게 하였을 뿐입니다. 또 전쟁에 나가고 배를 타는 데는 이 옷이 아니고는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의복 제도를 따른 것이오니 이것 또한 그렇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기구(器具)를 편리하게 만든 이유는 삼가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마는, 공의 말씀에 ‘의복과 궁실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바에 따라서 허락하였다.’했는데, 내가 삼가 조롱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렇다면 공 등의 의복도 모두 양제(洋制)이니 공 등도 좋아하는 바가 있어서 이것을 한 것입니까?”
하고는 이내 크게 웃었다. 대승도 웃으면서,
“이것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니 이러한 전례는 조(趙) 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있지 않습니까. 귀국의 의복 제도도 어찌 시대에 따라 변함이 없었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의복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조 강헌왕(康獻王 강헌(康獻)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시호)은 명(明) 나라 고황제(高皇帝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을 말함)와 나란히 건국하여 의복 제도를 한결같이 명 나라 제도를 따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5백 년 동안에 상하 귀천이 모두 같은 규제(規制)를 사용했으며, 혹시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대승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사면에 적국(敵國)이 있으니 또한 이것은 귀국과 비교가 아니됩니다. 우리가 고심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내외의 산하를 보수(保守)하고자 할 뿐이지, 우리나라인들 어찌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해서겠습니까?”
하고는 이내 혀를 차면서 오랫동안 탄식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그 일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앞에 한 말은 농담입니다. 귀국이 고심하며 이 일을 하는 것은 우리도 벌써 촌탁(忖度)한 지 오래입니다.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앞에 한 말은 그저 한 번 희롱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모리야마 시게루가 말하기를,
“이따금 나와서 관람하여 기계의 편리한 것은 모방하고 제도의 타당한 것은 익히십시오. 이것은 공이 도모할 일입니다. 지금은 두 나라가 마땅히 서로 애호해야만 될 것이오니 공이 이것을 보시고 진실로 모방하고 익히고자 하신다면 우리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 우리의 의견을 알려드리겠습니다.”
3. 조선학문에 대해
문부성의 문학료(文學寮)에서 대승(大丞) 구귀융일(구키 류이치,九鬼隆一)는 극진히 나를 접대하였다. 술자리에서 나에게 묻기를,
“귀국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朱子)만 숭상합니까? 아니면 다른 학문도 숭상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학문은 5백 년 동안 다만 주자만 숭상하였을 뿐입니다. 주자를 어기는 사람은 바로 난적(亂賊)이란 죄목으로 처단하였으며, 과거(科擧) 보는 문자까지도 불가(佛家)ㆍ도가(道家)의 말을 쓰는 사람은 귀양보내어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국법이 매우 엄중했던 까닭으로 상하와 귀천이 다만 주자(朱子)만 숭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군주의 도리(道理)대로, 신하는 신하의 도리대로,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대로, 아들은 아들의 도리대로, 형은 형의 도리대로, 아우는 아우의 도리대로, 남편은 남편의 도리대로, 아내는 아내의 도리대로 하여, 한결같이 공자ㆍ맹자의 도리만 따랐으니, 다른 갈림길이 엇갈릴 수도 없으며, 다른 술수(術數)가 현혹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하니,
구귀융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4. 김기수가 본 일본의 빈곤한(?) 학문
서양인과 교통한 후로는, 신당은 우거진 풀밭이 되고 중들은 구렁에 엎어지게 되었으니,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책에 매우 바빠서 이런 것에는 생각이 미칠 여가도 없었으며, 또한 이것은 모두 허문(虛文)이므로 실사(實事)에는 이익됨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들의 옛날 풍속의 숭상은 신도(神道)를 먼저 하고 불교를 나중에 하였으며, 또 불교를 먼저 하고 유교(儒敎)를 나중에 하였는데, 신도와 불교가 이 모양인데 유교는 다시 무엇을 논의하겠는가? 그러므로 아이가 자라 교습(敎習)시킬 적에 나이가 8세에서 15세까지는 그 국문(國文)과 함께 한자(漢字)를 읽게 하고, 한자를 이미 통하면 다시 경전(經傳)은 읽지 않고, 농서(農書)ㆍ병서(兵書)ㆍ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약(醫藥)ㆍ종수(種樹)의 글만 즐겨서 상시로 읽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녀ㆍ상인(商人)ㆍ어린아이들까지도 계척(界尺 문구(文具) 곧 글로 쓴 명령)을 한 번 내리면 성위(星緯 천문(天文))를 헤아리게 되고, 호령 소리가 조금 일어나면 지여(地輿 땅)를 가리키게 되었으나, 만약 공자(孔子)ㆍ맹자(孟子)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면, 이내 눈이 동그래지고 입을 머뭇거리면서 그것이 무슨 말인지조차도 알지 못하였다.
5. 근대적 견학(見學)에 대한 태도
모리야마 시게루가 말하기를,
“여관에서 매우 적적하실 터인데, 나와서 함께 놀며 울적한 마음을 조금 풀지 않으시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성품이 본디부터 고요한 것을 좋아하여 실로 울적한 것이 고통이 되는지는 알지 못하므로, 놀고 구경하는 일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하였다. 모리야마 시게루가 말하기를,
“답답하게도 공은 끝내 나의 고심함을 알지 못하십니까 누가 공에게 구경만 시키려는 것입니까. 지금에 와서 두 나라는 한집안이 되고 말았는데, 우리나라는 사면이 모두 바다이므로, 외적이 이르게 되면 대적해낼 수가 없어서 오늘날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한결같이 남에게 제어만 받을 수 없는 까닭으로, 부국강병의 술책을 다 써서 군대를 많이 두고 기계를 편리하게 만들기를 앞세워 지금에 와서는 병졸도 정예하고 양식도 풍족하며 기계도 아주 새롭게 되었으니 거의 믿고 외적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건대, 귀국 산천의 험준한 것은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겠으나, 오히려 근해(近海)에 외적이 들이닥칠 걱정이 많으니 전혀 방비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경하라고 누누이 말하는 것은 군제(軍制)를 두루 살펴보아서 좋은 것은 개혁하는 것이 한 가지 일이요, 기계를 자세히 보아서 편리한 것을 모방하는 것이 두 가지 일이요, 풍속을 두루 살펴보아서 채용할 것은 채용하는 것이 세 가지 일입니다. 귀국에 돌아가시거든 확실하게 의논을 정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여서 두 나라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여 외환을 방어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대단히 감사합니다. 귀국의 성의는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이번 걸음에 또한 재주 있는 사람 몇 명을 데리고 와서 제도는 입으로, 기기(器機)는 손으로 모방하고, 풍속은 귀와 눈으로 기억하고자 하였으나, 다만 두 나라가 오랫동안 의심하여 멀리하던 끝에 다행히 봄의 일(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의 체결을 말함)이 있게 되었으니 일찍 와서 사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개월 후에는 반드시 귀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것이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이보다 먼저 수신(修信)하고자 하여 갑자기 행장을 차렸던 것이니 실로 이러한 일에는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성규(成規)는 신의를 앞세우고 사공(事功)은 뒤로 하기 때문에 먼저 수신하기에만 서둘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또한 산중의 빈사(貧士)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고 재식(才識)이 전혀 없으니, 비록 손으로 기물(器物)을 잡고 종일토록 만지더라도 실로 어떤 것이 편리하며 어떤 것이 무딘지도 알 수 없으며, 일행의 수행원들도 모두 몸가짐이 근신하고 옹졸하여, 다만 득죄하지 않는 것만으로 준칙을 삼게 되니 그들도 또한 이 사람과 비슷할 뿐입니다. 비록 날마다 유람하고 구경하더라도 다만 몸만 수고로울 뿐 아무런 이익되는 점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은 현재 맡은 일만 마치고 우리나라에 돌아간 후에 잘 의논하겠사오며, 또 귀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다시 확실히 의논할 날이 있을 것이니 하필 구차스럽게 눈앞의 충고만 따라서 갑자기 책임만 얼버무려, 우리에게도 소득이 없으면서 당신들의 후의만 저버리겠습니까?”
하였다. 모리야마 시게루가 말하기를,
“공의 말씀 또한 옳습니다.”
하고는, 이내 자기 나라의 군사가 정예하고 양식이 풍족하므로 외환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뜻을 많이 말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귀국은 이미 이같이 부강하게 되었으므로 외환이 닥치는 것은 마땅히 우리에게 힘을 빌 일이 없는데도, 오히려 이같이 정성스러우니 귀국의 성의는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어찌 이것을 알고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 사람이 재주가 없으므로 실로 갑자기 구경하는 동안에 소득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마는, 바라건대 조금도 의심하고 조격(阻隔)함이 없이, 모든 일을 지시하여 가르쳐 주신다면 이 사람은 마땅히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돌아가서 우리 조정에 보고하겠습니다.”
하였다. 모리야마 시게루가 또 말하기를,
“매양 귀국과 담판할 적에는 말이 지리하고 일을 오래 끌어서 한 가지도 즉시 결정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나라에 이익되는 일은 상하가 한마음이 되어 딱 잘라서 결행하고 머뭇거려 미루는 일이 없습니다. 6개월 후에 세목(細目)을 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혹시라도 그전처럼 지연시킨다면 답답하게 될 것이니 중간에서 교섭하는 사람이 어찌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규모(規模)는 원래 이와 같으며, 귀국처럼 전권대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도 딱 결단하고 실행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소관(小官) 따위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소관은 대관에게 알리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아뢰게 되니 허다한 지연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조심하고 근신하여, 방종하고 자행하지 않는 일은 이것이 우리나라의 한 가지 예전 규칙이므로, 공(公)들의 훗날 일에도 그것을 일마다 청종(聽從)하겠다고는 보장하기 어려우니 이것은 미리 양해하여야 될 것입니다. 대체로 세상에 어떤 일이라도 어찌 다 자기 뜻대로 되겠습니까? 귀국에서 어떤 말이 있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다 들어 주지는 못할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어떤 말이 있더라도 귀국에서도 다 시행하지는 못할 것이니 이것은 대체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오랫동안 앉아 있으니 매우 피곤하므로, 드디어 일어나서 읍(揖)하고 돌아왔다.
원료관(遠遼館)에서 연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궁본소일(미야모토 쇼이치,宮本小一)과 차를 같이 타고 박물원(博物院)으로 향하여 갔다. 궁본대승(宮本大丞 궁본소일)이 말을 전하기를,
“제 집이 관소(館所)와의 거리가 비록 멀지마는, 며칠 내에 귀사(貴使)를 맞이하여 오찬을 대접하고자 하는데, 귀사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귀관의 초청에 감히 빨리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봄의 강화도의 일로써 귀관(貴官)의 명성은 들었사온데, 이 사람이 올 때에 신대관(申大官)께서 또한 부탁하기를 모든 일을 귀공과 서로 의논하라 하였습니다. 이곳에 온 후로 바로 귀관을 친히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려고 하였으나, 형편이 면면(面面)이 다 방문할 수 없으므로 문득 길을 터놓으면 매우 난처하게 될 것이며, 또 혹시 여러 사람이 모인 좌석에서 만날 적엔 혼자 정답게 하는 것도 또한 될 수 없는 일이므로 심심하게 날짜만 보내고 있으니 마음이 근질근질합니다. 이제 다행히 차를 같이 타게 되었으므로 마음속을 터놓고 싶은데 귀관의 의사는 또한 이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이제부터 두 나라는 한집안이 되었는데 귀국 조정에서 나에게 마음대로 유람케 하여 주니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예전 규칙은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는 밖에 나가서 구경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만약 명령을 어기기가 곤란하여 한결같이 방종한다면, 우리 조정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또 비록 병기(兵器)ㆍ농구(農具) 등의 기계로 말하더라도 이 사람은 이미 재주가 모자란 사람이며, 수행원들도 또한 적임될 만한 사람이 없으니 다만 구경만 할 뿐이지 무엇이 이익됨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번 걸음은 다만 수신(修信)하는 것으로 중점을 삼고 모든 유학(遊學) 관계는 훗날로 미루고자 하오니 이 뜻을 양해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궁본소일은 말하기를,
“만약 회답하는 국서에 ‘우리 황상께서 명령하셨으므로 귀하가 자주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조금 구경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귀하에게는 예전 규칙을 깨뜨려 버렸다는 꾸지람은 없을 것이니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것은 더욱 불가한 일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자기 체면을 손상시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같은 지시는 더욱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이 올 때에 우리 주상(主上)의 명령을 받자왔는데, 우리 주상께서는 이 사람의 원행(遠行)하는 것을 염려하시며, 이곳에 와서 유련하는 기일도 15일을 넘기지 못하도록 정녕히 말씀하셨습니다. 벌써 15일의 기일도 멀지 않았으니 바라건대 잘 주선하여 빨리 돌려보내어 이 정한 기일을 넘기지 않도록 함이 이 사람의 소망입니다.”
하니, 궁본소일은 대답하기를,
“두 가지 일은 모두 이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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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종합해봤을 때 이때까지만(1877년) 해도 일본은 조선에 대해 어느 정도 (물론 자국의 국익 때문이지만) 도와주려고 했던 측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국도 이제 막 세이난 전쟁을 거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서구열강이 점점 동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에 겁을 먹은 일본은 조선도 부국강병책으로 근대화시켜 자국을 위한 방파제로 삼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조선 관리들에게 계속 근대적 공장과 군대, 여러가지 기술과 제도 등을 견학하게 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 관리들은 너무 오랫동안 '유교 근본주의'--유교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볼 때 '유교 와하비즘, 또는 유교 탈레반'에 완전히 종속되어 실존하는 세계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외교관들이 계속 수차례 여러 견학코스를 권유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이를 거절하고 또는 보아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1877년 일본에 다녀온 수신사 인원들이 유능하고 깨어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더라면 강국은 못되어도 적어도 식민지화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