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1) 엘비스탄 전투(1277년)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의 손자인 훌라구는 1256년 페르시아에 정착하여 자신의 나라인 일칸국을 세웠으며, 1258년에는 현재 이라크를 다스리던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아바스 왕조의 군주이자 예언자 무하마드(이슬람교의 창시자)의 자손인 알 무스타심을 죽였습니다.
2년 후인 1260년, 훌라구가 보낸 사신이 맘루크 왕조의 수도인 카이로에 도착해 서신을 전달했습니다. 그 서신에는 몽골군이 천하무적이고 어느 나라도 상대할 수 없으니, 맘루크 왕조가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인다는 끔찍한 협박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쿠투즈는 몽골 사신들을 죽여 버리고 그 목을 카이로의 대문인 ‘밥 주웨일라’에 높이 매달아, 결코 항복할 뜻이 없음을 밝혔습니다. 자고로 몽골인들은 사신을 죽인 나라는 반드시 공격하는데, 쿠투즈의 이런 행동을 알게 된 훌라구는 분노하여 이집트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멀리 중국에서 남송 왕조와 전쟁을 벌이던 몽골제국의 황제인 몽케칸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일단 황제가 죽으면 몽골의 황족들은 서로 모여서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대회인 쿠릴타이를 갖는데, 훌라구도 황족이라 서둘러 쿠릴타이에 참가하기 위해 동방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훌라구는 부하 장군인 키트부카에게 약 1만 정도의 병력만 맡겨 놓고, 원정군 병력의 대부분을 이끌고 몽골 본토로 철수했습니다.
첩보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쿠투즈는 제아무리 막강한 몽골군이라도 해도 주력 부대가 떠난 이상,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겨 1만 2천 명의 맘루크 부대와 수만 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 현재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부근으로 진군했습니다.
그리고 1260년 9월 2일, 예루살렘 부근의 작은 마을인 아인잘루트에서 이집트 군대는 몽골 군대를 유인하여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키트부카는 이집트 군대에게 붙잡혀 처형을 당했고, 몽골군은 궤멸 당했습니다.
비록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일칸국의 몽골인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훌라구는 1265년에 죽었고, 그의 아들인 아바카(집권: 1265~1282년)가 일칸국의 두 번째 군주가 되었습니다. 아바카는 아버지 훌라구의 복수를 하기 위해 유럽의 기독교 세력들과 동맹을 맺었고, 그 자신도 동로마의 공주인 마리아 팔레올로고나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또한 아바카는 중동의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인들과도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었는데, 조지아인들은 이슬람 세력들한테 오랫동안 시달려 왔기 때문에 그들과 싸우려는 몽골인들한테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인 1277년 4월, 맘루크 왕조의 술탄인 바이바르스는 시리아에서 룸 셀주크(터키에 정착한 셀주크 제국의 후계 국가)로 쳐들어갔습니다. 이때 룸 셀주크는 몽골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바이바르스는 몽골에 가급적 많은 타격을 주기 위해 일부러 룸 셀주크로 쳐들어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이바르스는 룸 셀주크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군을 엘비스탄에서 공격하였고, 이리하여 엘비스탄에서 맘루크 군대와 일칸국 군대가 전투를 벌였습니다(1277년 4월 15일).
엘비스탄 전투 당시, 맘루크 군대와 몽골군은 모두 1만 4천 명 가량이었는데 몽골군에는 적어도 3천 명의 조지아인들과 그 수를 알 수 없는 룸 셀주크인들의 보조 군대도 포함되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먼저 몽골군이 공격을 했고, 이에 맘루크 군대의 중무장 기병들도 맞서서 돌격했습니다. 전투 와중에 맘루크 군대에 포함된 많은 수의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족) 비정규병들이 죽었습니다. 이때 몽골군은 맘루크 군대의 왼쪽 측면을 노리고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술탄의 군기를 든 사람인 산자키야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맘루크 군대는 부대를 다시 편성하여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바이바르스 자신은 왼쪽 측면을 공격하는 몽골의 오른쪽 측면에 반격하기 위해 몇 명의 군대와 함께 서둘러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바이바르스는 그의 군대 왼쪽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시리아의 하마에 주둔시킨 군대를 불러왔습니다. 그리하여 맘루크 군대는 수적으로 몽골군보다 많아졌고, 몽골군을 포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불리해진 몽골군들은 후퇴하는 대신 말에서 내려서, 죽을 때까지 싸웠습니다. 하지만 결국 맘루크 군대의 포위망이 몽골군을 조여와 대부분의 몽골군은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소수의 몽골인들만이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엘비스탄 전투는 맘루크 왕조의 승리이자 일칸국의 패배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은 6천 명에서 1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조지아인들과 룸 셀주크인들도 2천 명 가량의 인명 피해를 입었던 것에 반해 맘루크 군대의 피해는 그들보다 적었습니다.
한편 엘비스탄 전투 무렵, 맘루크 왕조와 일칸국은 셀주크 군벌인 페르반(Pervane)과 그의 셀주크 군대가 서로를 도와주기를 기다렸지만, 페르반은 자신의 세력을 지키기 위해 두 진영을 상대로 동맹을 맺을 것처럼 굴다가 끝내 어느 편도 돕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비록 승리했지만 바이바르스는 결코 몽골군을 얕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가 위치한 소아시아 반도의 중심부)의 중심부에 있는 카이세리(Kayseri)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1277년 4월 23일에 입장했습니다. 이슬람교의 금식일인 라마단(한 달 동안 낮에는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는 것)이 끝난 것을 축하하는 축제인 이드 알-아드하의 자리에서 바이바르스는 자신의 군대 장교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나? 내 군대의 기병 1만 명이 몽골군 3만 명을 만나면 그들을 이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7천 명의 몽골군을 만났다. 몽골군은 나의 모든 군대에 공포를 불러 일으켰고 내 군대는 절망했다. 몽골군은 우리 군대의 좌측을 쳐부수었다.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그들은 우리를 이겼을 것이다.”
축제가 끝난 후 바이바르스는 룸을 떠나 곧바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갔고 거기서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1277년 7월 1일). 하지만 바이바르스가 죽었어도 맘루크 왕조와 군대는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엘비스탄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 분노한 아바카는 룸 셀주크 동부의 이슬람교도들을 죽이라고 명령했고,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몽골군한테 학살당했습니다. 아울러 아바카는 군대를 보내 바이바르스한테 충성을 선언한 카라만 투르크멘족들이 일으킨 반란도 진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바카는 페르반을 붙잡아서 그의 눈을 멀게 했지만, 몽골 귀족들과 귀족 여성들은 페르반을 죽이도록 설득했습니다.
==================================================================
(2) 제 2차 홈스 전투(1281년)
아바카는 맘루크 왕조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예전보다 더 광범위하게 기독교 세력들을 끌어 들였습니다.
그리하여 1281년 10월 29일 시리아 서부의 홈스에서 일칸국과 맘루크 왕조의 군대가 맞붙은 제 2차 홈스 전투(1차 홈스 전투는 훌라구가 맘루크 왕조한테 패배한 1260년의 일)가 벌어졌는데, 이번에는 킬리키아(현재 터키 동남부 지역)의 아르메니아 왕국과 조지아 왕국에 기독교 무장 집단인 구호 기사단과 소수의 서유럽인 용병들까지 몽골군과 동맹을 맺고 함께 참전했습니다.
또한 다소 충성심을 믿기 어렵지만 셀주크인 보조 부대도 일칸국의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이렇게 제 2차 홈스 전투에 참가한 일칸국과 그 동맹군들의 총 병력은 4~5만 명이나 되었고, 총사령관은 아바카의 동생인 몽케 테무르였습니다.
반면 맘루크 왕조의 군대는 총 3만 명으로 8백 명의 중무장 기병들인 왕실 맘루크 부대와 4천 명의 할카(Halqa 투르크멘, 쿠르드족, 아랍 부족으로 이루어진 기병 부대 ) 부대에 4천 명의 베두인족들과 그 외의 보병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수는 일칸국 군대보다 적었지만, 맘루크 군대의 총사령관은 바이바르스를 따라다니며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친 술탄 칼라운이었습니다.
이리하여 홈스에서 일칸국과 그 동맹군들 및 맘루크 왕조의 군대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전투가 한창이던 와중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국왕인 레오 2세가 이끈 아르메니아인 부대와 조지아 국왕인 데메트리우스 2세가 이끈 조지아인 부대, 그리고 몽골군에 소속된 오이라트족(몽골 서부의 유목민족) 부대가 엘비스탄 전투 때처럼 맘루크 군대의 왼쪽 측면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고, 한때 맘루크 군대의 왼쪽 측면이 흩어질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맘루크 술탄 칼라운이 이끄는 왕실 맘루크 부대가 몽골군의 중앙부를 공격하여 파괴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일칸국 군대의 총사령관인 몽케 테무르는 부상을 입고 도망쳤고, 그의 군대도 무질서하게 후퇴하였습니다.
그러나 맘루크 군대도 피해가 컸던지 칼라운은 패배한 적을 추격하지 않았고, 몽골군을 도운 아르메니아인들과 조지아인들은 안전하게 철수했습니다.
2차 홈스 전투의 정확한 피해 양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전체적인 전황으로 본다면 일칸국과 그 동맹군들이 맘루크 왕조보다 더 큰 피해를 입어서 물러났고, 따라서 맘루크 왕조의 승리로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
(3) 와디 알-카즈나다르 전투(1299년)
한편 2차 홈스 전투로부터 18년이 지난 1299년, 가잔 칸은 6만 명의 몽골군에 4만 명의 조지아인과 아르메니아인들로 구성된 보조 부대가 포함된 총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맘루크 왕조와 일칸국의 국경인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시리아 동부의 도시인 알레포를 점령했습니다. 무려 10만 명의 몽골군과 그 동맹군들이 쳐들어왔으니, 맘루크 왕조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당시 시리아에 있던 맘루크 왕조의 술탄인 알-나시르 무함마드는 알레포 함락의 소식을 듣고는 2~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1299년 12월 22일 오전 5시에 와디 알 카즈나다르에 있는 홈스의 북동쪽으로 진군하여 가잔 칸이 이끄는 10만 명의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사건을 가리켜 3차 홈스 전투, 혹은 와디 알-카즈나다르 전투라고 부릅니다.
3차 홈스 전투는 몽골군을 향해 맘루크 기병들이 돌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몽골 중기병들이 맘루크 기병들한테 맞돌격을 하는 동안, 몽골 궁수들이 말 뒤에 서서 맘루크 군대한테 화살을 쏘았습니다.
전투 초반에 몽골군과 그 동맹군 및 맘루크 군대는 가까이서 백병전을 벌였던 듯합니다. 결국 오후에 맘루크 군대의 오른쪽 측면이 몽골군에 의해 뚫렸고 맘루크 군대는 몽골군에 의해 대오가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궁지에 몰려 패색이 짙어졌습니다.
몽골군은 맘루크 군대의 대열을 뚫고 돌파하여 전장을 완전히 장악했고, 나머지 맘루크 군사들을 쫓아냈습니다.
이 때의 정황을 두고 맘루크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맘루크 군인은 200명만 죽었던 반면 몽골군은 5천 명에서 1만 명이나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맘루크 군대의 오른쪽 측면이 무너졌는데 전체 전투에서 고작 죽은 병사가 200명 뿐이라는 부분에서 사실상 거짓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몽골군이 전장을 장악하고 맘루크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시리아의 도시인 다마스커스를 점령한 사실에서 맘루크 군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맘루크 군대는 남쪽으로 다마스커스를 향해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그들은 1만 2천 명의 마론파(중동의 기독교 종파)와 드루즈파(윤회와 환생을 믿는 이슬람교 이단 종파)의 궁병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물라이 장군이 이끄는 한 무리의 몽골군 별동대는 이집트의 가자 지구에까지 맘루크 군대를 추격하였습니다.
그와 반대로 가잔 칸이 이끈 몽골군 본대는 계속 남쪽으로 행진하여 다마스쿠스를 약탈하였고 곧바로 철수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다른 맘루크 군대가 도착하여 다마스쿠스를 되찾았습니다.
3차 홈즈 전투 이후로 몽골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계속 쳐들어와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나마 1300년에 들어 중앙아시아의 몽골계 국가인 차가타이 칸국이 일칸국을 공격하느라 일칸국이 군대의 대부분을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돌릴 때까지, 소규모의 일칸국 군대가 가자 등지의 팔레스타인 전역을 습격했습니다.
==================================================================
(4) 마르즈 알-사파르 전투(1303년)
와디 알-카즈나다르 전투로부터 4년 후, 일칸국과 맘루크 왕조는 최후의 결전인 마르즈 알-사파르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는 1303년 4월 20일부터 4월 22일까지 다마스쿠스를 두고 일어났습니다.
1303년에 가잔 칸은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그의 장군인 쿠틀루그-샤한테 몽골군을 맡겨서 보냈습니다. 몽골군의 침공 소식을 들은 알레포와 하마의 주민들과 관리들은 다마스쿠스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 2세는 다마스쿠스에 있었고 이집트 본국에 몽골과 싸우러 지원군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맘루크 군대가 이집트를 떠난 사이, 바이바르스 2세는 현지의 이슬람교 신자들로 이루어진 민병대와 함께 몽골군에 맞서 싸웠고, 그러는 사이 이집트 본국에서 파견된 맘루크 군대가 몽골인들이 하마를 공격하는 동안 도착했습니다.
1303년 4월 19일, 마르즈 알-사파르 평야에서 맘루크 군대와 몽골군이 만났습니다.
전투는 1303년 4월 20일에 있었는데, 당시 쿠틀루그-샤의 몽골군은 강 근처에 위치했고, 쿠틀루그-샤의 몽골군 좌익 부대 1만 명의 병사가 맘루크 군대의 우익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공격에 맘루크 군대는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한편 맘루크 군대의 중앙과 왼쪽 부대는 두 지휘관인 에미르 살랄과 바이바르스 알-자쉬나키르의 지시를 받으며 베두인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몽골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몽골군은 맘루크 군대의 오른쪽 측면을 계속 공격했습니다. 그 공격이 매우 강력해서 많은 맘루크 군인들조차 전투가 곧 패배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맘루크 군대의 왼쪽 측면은 끝까지 몽골군의 거센 공격을 견뎌냈습니다.
쿠틀루그-샤는 그의 군대가 승리하기를 바라면서 근처 언덕 꼭대기로 갔습니다. 그가 군대에 명령을 내리는 동안 맘루크 군대는 언덕을 포위했습니다. 이것은 무겁고 격렬한 싸움으로 이어졌고 몽골인들은 언덕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맘루크 군대는 몽골군이 와디 알람 강으로 도망갈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그들의 포위망을 열어 주었습니다. 몽골인들이 강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지원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마르고 지친 몽골인들이 말들과 함께 강에서 물을 마시는 동안, 맘루크 군대가 후방에서 그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정오까지 계속 된 이후의 싸움은 매우 잔인했는데, 다음날 전투는 끝났고 살아남은 몽골군은 달아났습니다.
중세 이집트의 역사가인 알-마크리지에 의하면 전투 후 쿠틀루그-샤는 쿠슈프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잔 칸을 찾아가서 몽골군의 패배를 알렸고, 그 소식을 들은 가잔 칸은 화가 나서 코피를 흘렸다고 합니다.
맘루크 군대는 이집트와 다마스쿠스로 승리의 소식을 보내는 한편, 몽골군 포로들을 사로잡아서 술탄과 함께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로 돌아왔습니다. 위대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이집트 전역에서 가수와 무용수들이 모여들었고, 며칠 동안 화려한 축하 행사가 계속되었습니다.
마르즈 알-사파르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한 일칸국은 더 이상 시리아를 포함하여 맘루크 왕조의 영토에 대한 정복을 완전히 포기하였습니다.
출처 | https://cafe.daum.net/historywar/Nwo/3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