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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과 인조.
게시물ID : history_202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jpmc3
추천 : 5
조회수 : 204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4/03 15:57:01


광해군은 성군은 아닙니다. 수많은 옥사와 궁궐중건 폐모살제 유교적 약점을 들어내놓고 특히 측근 인사에 실패했습니다. 반정당시 자신의 경호대장 이흥립이 눈감아주고 안막아버리니까요. 11번이나 훈련대장을 바꾸고 권간 이이첨을 쳐내지 못하고 이이첨이 난을 일으켰나 합니다. 뿐만 아니라 수 차례 고변이 있었으나 후궁과 연회한다고 추국청을 통해 빨리 잡아들이면 됐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결국 행동력 있는 이괄이 광해군을 체포해버립니다. 반정이 일어나고 수많은 북인 인사들이 썰려나가고 의주와 북방을 잇던 외교길도 막히고 특히 국방력은 처참하게 갈려버리죠.


광해군은 성군은 아니지만 뚜렷한 치적이 많습니다. 조선왕조로 보면 못해도 성종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선조보다는 통치를 잘했습니다. 대신에 측근 관리를 잘못했죠. 인사정책에서는 실패했습니다. 아버지 선조는 위기관리에서는 실패했지만 통치는 그럭저럭 한 편이고 인사정책은 상당히 잘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붕당을 통해서 견제했습니다. 동인이 우세했지만 서인을 완전 버린것이 아니고 서인을 완전 기용했지만 다시 서인을 내쳐버리고 다시 동인을 등용하고 이런 작업을 수차례 합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자신을 민 세력이 북인이었기에 북인과 손잡았고. 문제는 광해군은 남인을 내쳐버리는 우를 범했다는 겁니다.


폐모살제라는 명분을 줘버린것이죠. 사실 영창대군은 죽어도 할말이 없는데 인목대비의 존재는 계륵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실 왕이 계비를 후궁으로 격하시킨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 계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는 법은 없었죠.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 같은 경우가 그런케이스 입니다. 이성계가 죽은 후 후궁으로 격하 서모로 대우 합니다. 엄연히 왕비였는데도 ... 이거에 남인이 반대하고 이항복 이원익이 갈려나가버리자 광해군의 정치력은 급격하게 쇠락해버립니다.


임해군을 갈아버리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 까지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왕의 정통성에 흠이 가질 않습니다. 세조는 동복 형제를 죽이고서도 괜찮았고 성종은 두형을 제쳐놓고 왕위에 올랐으며 태종 이방원은 무려 5남 출신에 이복동생 둘을 죽여버리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를 왕위에서 내려버리고요. 게다가 자신의 서모는 후궁으로 서모로 격하해버립니다. 석물을 광통교에서 넣어버리고.


근데 폐모는 달랐습니다. 인목대비의 존재는 광해군의 아킬레스 건이었죠. 만약 조정에 남인이 남았다면 북인정권이 그토록 전횡을 일삼이기 힘들었죠. 영화 광해처럼 서인이 주도적이었는데 아닙니다. 광해군의 왕권은 상당히 강했고 수 많은 옥사를 스스로 주도한 측면이 큽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왕으로서 할일을 다합니다. 중립외교라는 명목하에 파병은 했으나 수틀리면 항복. 게다가 후금(청)에 이해를 구하는 듯하나 북방군 양성


광해군은 이방원보다 뒤지지 않습니다. 다만 광해군이 이방원보다 못한건 측근관리 실패와 인사정책 실패입니다. 다 못믿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반대로 인조는 뭐냐 ? 한마디로 인조는 조라는 호칭을 붙이면 안되는 인물입니다. 종은 덕을 나타내고 조는 공이 많은 사람을 나타냅니다. 오히려 광해군은 덕은 적으나 공이 많은 인물이었기에 조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인물이죠. 그리고 태조를 제외하고는 조를 붙이치는건 원칙적으로 안되는 겁니다. 근데 조선이 그걸 무시하니까 명나라도 따라서 무시하기 시작했죠.


인조는 한마디로 인사정책 실패 측근관리 실패 외교정책 실패 했습니다. 그런데 왕위는 어떻게 유지했느냐. 광해군이 잘 도망갔으면 광해군도 그들을 제압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도망도 못갔고 측근도 안믿었죠. 이에 반해 인조는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잘 도망갑니다. 그 차이입니다. 근데 이괄의 난때는 잘 도망가던 인사가 선조처럼 잘 도망도 못가서 망해버립니다.


일단 이괄을 2등으로 책록한 거 부터 에러입니다. 이괄이 없었으면 반정이 성공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들네미를 잡아온다고 하면 안되죠. 본인을 서울로 돌아오게 만든 뒤에 잡아야 했는데 이괄이 바보입니까? 자신이 최강 북강군 1만 2천을 쥐고 있는데 아들네미 잡아오라고 선전관 몇놈 붙이면 되는거냐 ? 이말이죠. 게다가 정묘호란 터지고 나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군대의 반란을 염려해서 훈련도 중지 감시만 해댑니다. 광해군은 비위을 맞추면서 성 수축 북방군 양성 인물들을 파견해서 교섭하고 대응해 나갈 준비를 하는데 인조는 북방군 날려버리고 힘도 없으면서 청나라를 자극합니다.


그리고 시기는 너무 어려워집니다. 명나라가 그전까지만 해도 영원성에는 명장 원숭환이 가도에는 모문룡이 있었으나 모문룡의 패악이 극심해서 원숭환제거 - 그런 원숭환을 숭정제가 제거 해버립니다. 광해군 시절과 달리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줄 형편도 안됬고 청나라가 엄청 몰려 있었습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영토와 인구는 늘어났고 명분도 얻었습니다. 몽골을 정벌하면서 징기즈칸의 전국옥새를 얻었고 항복한 한인들도 많고 근데 먹고 살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명나라 교역 아니면 조선 교역을 해야 하는 판국인데 명나라는 길이 막혔고 조선은 말을 안듣습니다.


정묘호란 당시에는 서쪽 국경에서 군대를 못 빼올 정도로 압박이 심했지만 압박도 느슨해졌고 먹고 살 거리도 필요했습니다. 청나라의 목적은 조선 멸망이 아니라 조선이 쌀배달에 충실했으면 그리고 배후에는 공격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청나라는 교역이 필요했었죠. 청나라의 주요 목적은 니들은 명이냐 청이냐 가 아닌 쌀배달 해줄거냐 안해줄거냐 그리고 배후에서 중립으로 있을 거냐 말거냐 하는 겁니다. 광해군은 칭신이라도 해서 전쟁을 막기위해 노력할 인물이죠. 그리고 설사 전쟁이 나도 북방에 깔아놓은게 많아서 도망가기도 수월했을 겁니다. 청나라 목적은 당연히 우리 배고파 밥줘. 그래 밥줄게 대신 우리는 당신들을 절대 안침 ㄴㄴ 그냥 우리는 니네들이 잘크면 칭신해줄게요. 이런식으로 가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죠.


선조는 도망이라도 잘갔는데 인조 이 병신은 강화도는 김경징에게 북방군 원수는 김자점에게 줍니다. 그리고 둘다 병크를 저지릅니다. 김경징은 강화도 방어를 개판으로 해서 소현과 봉림이 잡혀버리고 자신은 남한산성에 묶여버리죠. 남한산성이 강하고 튼튼하면 뭐합니까 먹을 쌀이 없는데 그리고 근왕군은 쌍령에서 개발리고.


위험도로 따지면 청나라가 더 위험했습니다. 전쟁이 석달만 넘었도 청나라는 정말 간당간당 했습니다. 왕은 친정했고 서쪽은 비워있고 나라에 먹을건 떨어져가고. 이에 비해 선조처럼 잘 도망가기라도 했으면 적어도 고려 현종처럼 나주까지 도망이라도 잘 쳤으면 전쟁은 장기화되고 전쟁의 결과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텐데 .....


그리고 난후 인조는 사실상 친청정책을 유지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 소현을 골로 보내리고 자기 손자 자기 며느리도 하늘나라로 보내버리고 ......


광해군은 자기 자식은 안죽였습니다. 인조는 자기가 실패해서 나라를 망치고 결국엔 아들까지 볼모로 보내고 아들이 돌아오자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만들고 자기 손자 자기 며느리도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겨우 아들 한명 살아남죠. 그 결과로 효종의 정통성이 상당히 의심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인조는 그냥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왕조 최악의 임금이고 최악의 군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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