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는 중동의 이슬람국가들 중에서 가장 정교분리를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평가를 듣는 나라이다. 하지만 인구의 절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인 만큼 역시 세속과 종교의 충돌은 있어왔는데 그중에서도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론과 모든 생물들은 하등생물들에서 점점 진화하여 지금에 이르렀다는 진화론은 제일 많이 충돌하는 부분이다.일찌기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터키는 그동안의 체제에 대한 모순과 불만, 새로운 민족주의와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군주제가 폐지되고 무스타파 케말을 초대대통령으로 하는 터키공화국이 설립되었다.
"과학은 삶의 가장 믿음직한 안내자다"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아타튀르크라는 성에서도 엿보이듯 국부로 추앙받는 케말은 강력한 정교분리정책을 펼쳤고 이는 교육정책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던 전통교육들은 폐지되고 탈종교적인 학교들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창조론의 격렬한 반발이 시작되었다.
기존의 교육체계에서는 제도적으로 진화론교육을 막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인 분위기와 종교신앙 등으로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은 금기시되었고 거의 모든 학교들이 창조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 창조론은 기독교의 창조론과 크게 다르지 않아 모든 생물들은 신이 그 종류대로 창조했고 이 세상의 역사는 대략 6천년 정도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외 대홍수와 바벨탑 이야기 등이 사실인양 학생들에게 교육되었다.
그런데 케말이 학교내에서의 창조론 교육을 금지하고 대신 진화론을 가르치도록 하자 성직자들을 중심으로한 보수적인 이슬람교도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특별히 진화론이 반발의 초점이 된 적은 케말의 집권 동안은 별로 없었고 또한 케말 본인의 명성과 다른 복잡한 내외사정들로 인해 그후 진화론 문제는 수십년간 심각하게 거론되지 않게 된다.
현재까지도 터키 이슬람주의를 이끄는 보수파 거두 알리 마자헤브
가라앉았던 진화론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때는 1957년이 되서였다. 보수적인 동부지방의 이슬람 성직자들이 민주주의적인 원칙에 따라 국민들이 원한다면 공립교육에 창조론을 포함시켜야 된다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 소송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강하게 내세우는 터키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고 패소해야만 했다.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비롯하여 수천권의 진화관련서적들을 이스탄불 광장에 쌓아놓고 판결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책들을 불태웠지만 이런 행동은 오히려 창조론자들에 대한 터키국민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심어줄 뿐이었다.근본주의자들은 법적으로는 창조론 교육을 실행할 수 없음을 알고 대중설득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57년 분서사건으로 인해 심어진 부정적인 모습을 벗고자 자선사업과 빈민구제사업을 벌임과 동시에 학교에서 창조론을 교육할 교사들을 양성하여 학교들에 취업시키는 방법으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고 이슬람교도가 절대다수인 터키에서는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창조론에 기울 수밖에 없었다.창조론에 대한 제일 좋은 선전도구는 바로 음모론이었다. 즉 진화론은 이교도(기독교와 유대교)들이 이슬람을 파멸시키기 위해 만든 음모라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중동전쟁 등으로 인해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로 흐르던 시대상황을 겨냥한 것으로 실제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창조론자들은 65년, 전과 같은 방법으로 진화론만을 교육하는 법처제에 대해 위헌소송을 제기했고 명망높은 무프티인 하잘 아크타는 4만명에 달하는 지지자들을 데리고 승소를 위한 야외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판결은 전과 같았다. 창조론은 종교이므로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공교육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창조론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더 많은 지지자들과 백만인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며 68년에 다시 소송을 제기했지만 판결을 뒤집지는 못했다.68년 소송은 좀더 극단적인 행태를 보였는데 그들은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재임용탈락운동과 이스탄불 광장에서 다윈의 동상화형식까지 벌였지만 이것이 폭동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한 경찰이 공포탄까지 쏘며 강제해산작전에 돌입하자 이리저리 밀리다 두명이 밟혀죽는 비극도 있었다.
비록 재판에서는 이기지 못했지만 창조론이 가진 영향력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야쿰 체틴 사건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사건의 원흉 야쿰체틴
야쿰 체틴 사건이란 법조계비리사건으로 야쿰 체틴이라는 변호사출신 로비스트가 판사와 검사를 상대로 비리사건을 저질러 노동착취혐의를 받던 아랍계 대기업 "파자티 뱅크"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조종한 사건이다. 후일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65년 재판에서 창조론자들의 소송을 기각한 판사인 야세르 오르한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으므로 창조론자들은 판사들이 진화론자들에게 뇌물을 받고 일부러 자신들의 소승을 기각시켰을지도 모른다는 논지의 음모론을 펴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70년대 초 터키의 경제불황과 대규모실업사태로 창조론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당시 범죄가 급증하고 한층 더 심각해진 냉전으로 인해 불안해진 사회분위기 때문에 창조론자들은 이 사회적인 위기는 오직 신만을 섬기는 신앙으로만 극복할 수 있고 이것을 저해하는 공교육의 진화론 교육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시 한 통계에 따르면 터키국민의 79%가 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논쟁이 이렇듯 커지자 74년, 당시 많은 인기를 자랑하던 "아세나요 후쿠티예 쇼"(120분 토론 쇼)에서 이 문제를 주제로 생방송 토론을 벌이게 된다. 당시 진화론 진영에서는 출연자를 섭외하는데 많은 애를 먹었는데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지지했지만 과반수의 국민들이 창조론을 지지하는 마당에 신변에 위협을 느낄 염려로 인해 방송에 출연하기를 꺼린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스탄불 분자생물학과 교수인 일한 아케나지 교수가 출연하기로 했고 창조론 진영에서는 쿠르드계 이란인 무프티, 오마르 야쿠프 엘하자딘이 출연했다.이 쇼는 방송전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왔고 많은 과학자들이 진화론의 승리를 장담했지만 대신 아케나지 교수의 신변을 걱정했다고 한다. 이 방송에 대한 소식은 해외에도 일부 알려져 한 그리스 신문은 사설에서 "터키는 중세시대로 후퇴하는가?"라는 마치 터키에서 당장에 창조론 교육이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비꼬는 왜곡된 뉘앙스의 글을 싯기도 했다.방송당일인 74년 9월 17일, 방송국 앞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전경들이 배치되었고 방송국 앞 광장에는 수천명의 창조론 지지자들이 모여 "알라 외의 다른 신은 없다"를 외치며 야외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계절은 아직 가을이었지만 한겨울급인 영하 7도까지 기온이 내려가는 바람에 여성 한명이 거의 동사직전에 구급차에 실려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렇듯 열띤 분위기에서 시작된 방송토론은 시청률이 기록적인 45%까지 치솟기도 하였다.이 토론에서 진화론측은 되도록 과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며 과학적인 토론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고 창조론측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과학문제에서 되도록 비껴나는 대신 진화론으로 인해 야기된 우생학과 제국주의, 불신앙 등 주로 진화론이 역사적으로 끼쳤던 해악들을 부각시키며 상대방을 논박하려 하였다.방송시작 45분째가 되자 갑자기 뜨거운 토론현장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다. 창조론 진영의 엘하자딘이 터키는 진정한 신정국가인 오스만 제국 시절에 신의 영광을 받아 강대국이 되었지만 이교도인 케말이 정교분리정책을 실시하고 진화론을 가르치면서 지금같이 쇠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이 갑작스러운 발언에 출연자들은 당황했고 사회자인 지힌 루스토는 서둘러 토론을 중지시키고 방송을 끝내게 된다. 알다시피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국부이자 민족영웅이었고 그를 모독하면 법적인 처벌을 받을 정도로 그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은 대단했다. 그런데 엘하자딘은 토론 중 흥분을 못이겨 위와 같은 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
엘하자딘의 발언에 분개해 시위를 벌이던 군중들
이 사건으로 인해 터키인들은 격분했다. 엘하자딘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숨어다녀야 했고 루스토와 제작자인 아젤 숭구르는 방송에서 사임을 하기까지 했다. 동시에 창조론자들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로 여태껏 유리하게 돌아가던 여론이 순식간에 반전되는 바람에 많은 영향력을 상실해버렸다.엘하자딘은 이란으로 도망쳐 그 뒤 비난의 대상을 케말에서 터키인 전체로 바꿔 이교도인 케말을 옹호하는 터키인들은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등의 극단적인 발언을 여러차례 했고 터키정부는 빗발치는 여론에 못이겨 이란에 엘하자딘 신변인도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거절당했다.터키에 대한 증오를 여러차례 드러낸 엘하자딘은 그후 79년 이란 혁명 때 테헤란에서 실종되었는데 수많은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혁명 때의 혼란상황을 틈타 테헤란의 터키교민들이 살해했다는 말부터 터키정부가 납치했다는 말까지 여러 소문들이 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아무튼 이날의 사건 이후 터키의 창조론자들은 십여년간 조용하게 지냈다. 대중들을 선동하여 정부를 압박해 진화론 대신 창조론을 공교육에 포함시키겠다는 계획은 흐지부지되었으며 오히려 창조론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더욱 강해진 것이다.
터키 창조론의 새로운 도전, 오반 만수르
하지만 창조론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창조론은 87년 오반 만수르라는 남자의 등장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데 바로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시작한 것이다.이런 움직임을 시작한 만수르는 미국 하버드대 토목건축학과를 졸업하여 박사학위를 딴 유학생 출신의 엘리트로 미국에 있는 동안 IRC 등 창조과학계열의 단체들의 활동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아 고국인 터키에서 비슷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열역학 제2법칙이나 방사성동위원소 측정법의 오류,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등의 과학적인 면을 창조론과 접합시켜 창조과학이라는 단어를 처음 터키에서 사용했으며 여태껏 신앙적인 면에만 매달리던 창조론자들의 모습과 차별된 태도에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다.그는 자신의 저서인 『진화는 어째서 그른가? ; 창조주의 과학적인 설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그동안 백년여년 전 이교도 영국인 찰스 다윈에 의해 주장된 진화론은 그 기초적인 의도가 불순하고 그릇된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서 막강한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과 인종차별, 인간의 존엄성 상실 등의 수많은 부작용을 발생시켰다. 하지만 진화론은 여태까지 과학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썼기에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아 결국 지금과 같은 전쟁과 부도덕의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먼저 필자는 지금까지의 창조론자들의 접근방식이 일부 틀렸다는 것에 동의하는 바이다. 신께서는 지극히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창조론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신앙적인 것에만 매달리거나 초과학적인 기적 등으로만 창조를 설명하려 한 것이다.창조론은 엄연히 과학이다. 세상 도처에 신의 창조를 증명하는 증거들이 널려 있으며 신께서는 기적만을 만드시지 않으시고 지극히 합당하며 과학적으로 창조를 하셨다. 진화론자들은 신의 존재가 없다고 미리 결론부터 내려놓고 발견되는 증거들을 자신들의 주장에 끼워맞춤으로서 결국 여기저기 모순점들이 드러나고 이에 반해 창조론은 계속되는 과학의 발전으로 창조야말로 단 하나의 진리였음이 밝혀져 더욱 신뢰를 얻게 되는 것이다."사실상 만수르의 주장은 당시 미국의 IRC 등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지만 이런 식의 과학적인 접근법은 터키에서는 생소했기에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그의 주장을 환영했다. 이제 그들은 대중들에게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기적 뿐이 아닌 엄연한 과학이라고 설득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것이다.
모든건 미제놈들의 탓이다!
만수르의 주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기존의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이슬람을 파멸시키려는 이교도의 음모라는 음모론과는 다른 진화론은 다름아닌 종교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미국의 경우 버틀러법이 있어 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여기에 반발한 진화론자들이 스콥스 재판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패소했다는 예시 등을 들며 오직 터키를 비롯한 소수의 국가들만이 진화론에 매달리고 있을 따름이라고 자신의 책에서 주장했다.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이미 버틀러법은 68년에 위헌판결을 받고 폐지되었다는 것과 스콥스 재판이 당시 미국과 국제사회에 남겼던 영향이었다.그는 공격의 화살을 사학과 고고학에도 돌렸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는 터키의 아라랏산에 멈춰섰으니 터키야말로 전세계인류가 퍼져나간 인류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홍수가 일어난 4000년 전 이전의 것으로 알려진 유적들과 유물들은 모두 조작이거나 홍수의 와중 운좋게 살아남은 것들이며 따라서 창조론에 따라 과학 뿐 아니라 역사교육도 전면 여기에 맞춰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 만수르의 주장이었다.만수르의 이러한 주장들은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수십년전보다 높아진 교육수준은 순순히 그의 주장이 대중들에게 먹혀들어가도록 놔두질 않았다. 만수르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즉시 이스탄불 국립대학의 학생들은 "이성적 과학적 사고 유지 수호 연대"를 발족시켰으며 만수르의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리는 강력한 캠페인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74년 문제가 된 방송토론에 출연했던 아케나지 교수는 만수르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 『무엇이 거짓인가? ; 창조과학의 딜레마』를 발간하여 만수르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만수르 사망후 쏟아진 추모행렬
논쟁이 가열되자 만수르는 자신의 주도로 창조론이 과학임을 주장하며 60년대와 같이 창조론을 공교육에 포함시키려는 소송을 준비했지만 90년 1월 1일 새해 첫날, 그는 자신의 집 소파에서 총을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창조론자들은 격분하여 진화론자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아케나지 교수의 사무실을 항의방문하기도 했지만 두달 뒤 만수르 살해범이 잡힘으로서 사건은 끝나게 된다. 만수르는 진화론자들의 손이 아닌 단순 강도살인사건으로 죽은 것이다.이 사건 이후 구소련의 붕괴와 경제호황, 쿠르드족 문제 등으로 인해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은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양측은 관련서적과 잡지들을 발행하며 "학술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터키의 높아진 교육수준으로 인해 창조론 지지자들은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반도 되지 않는다.정교분리가 원칙인 터키의 헌법으로 인해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창조론자들은 최근 학교에 창조관련자료들을 배포하며 교과서에 나오는 진화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인종차별과 나치즘, 공산주의, 테러리즘의 근본사상은 바로 진화론의 적자생존이라고 주장하며 신을 진심으로 믿는 창조론 교육이 행해져야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외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인 반박 등이 담긴 이 자료들은 무료로 학교에 배포되고 있으며 진화론에 부정적인 교사들에게 수업교제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터키에서 계속 일어난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 그 결말과 대중들의 여론은 어디로 몰릴지 전세계의 눈이 터키로 모아지고 있다.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community/327/read?articleId=16273176&bbsId=G005&searchKey=subjectNcontent&itemId=145&sortKey=depth&searchValue=%ED%84%B0%ED%82%A4+%EC%A7%84%ED%99%94%EB%A1%A0&pageIndex=1
즐거운 만우절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