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발발 직후인 50년 6월28일∼8월31일 수원 이남 지역에서 약 30만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들이 보련원이라는 이유로 퇴각하던 경찰과 우익단체에 학살된 사건이다. 보련은 49년 4월5일 결성된 전향자 조직을 일컫는다. 당시 유명한 사상 검사이던 오재도 검사(현재 변호사)가 만든 보련에 가입한 이들은 전국적으로 50만명을 웃돌았다. 오변호사는 보련 결성과 학살이 자행된 경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보련은 세계 사상사에 유례가 없는 성과로 외국에서도 조사해 갈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서 보련원들이 적에게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경기도 이남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오씨는 한국전쟁 개전 초기 서울에서 미처 피난 가지 못한 군경과 가족이 의외로 많이 살아 남은 데는 보련원들의 도움이 컸다면서, 수원 이남에서 무차별 학살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북에서도 반동으로 규정된 보련원은 오히려 인민군이 숙청할 대상이었는데도 남한쪽 군경이 심사도 하지 않고 무조건 집단 학살했다는 것이다.서울과 경기 북부의 보련원만 학살을 모면했을 뿐 전국 각지에서는 약 30만에 달하는 보련원들이 영문도 모른 채 불려가 학살당했다. 30만이라는 숫자는 4·19 직후 전국 각지의 유족들이 국회에 낸 청원 내용에 들어 있다.
오재도씨는 “이제 정부가 보련 가입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공식 확인해 범국가 차원에서 위령제를 올릴 때가 되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