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구름~~
작성일: 2014-06-19 (목) 18:51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하여... 4
나는 앞에서 대일본제국이 영광과 번영의 최정점에서 순식간에 패망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고 말했다. 대일본제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진입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몰락으로 향하는 가속페달을 밟게 된 이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일본제국의 몰락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단초는 무엇이었을까? 많은 학자들이 일본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는 것은 바로 중일전쟁이며, 중일전쟁의 필연적인 귀결로서 벌어진 태평양전쟁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무모한 태평양전쟁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없었을까? 왜 일본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역사 이래 단 한 번도 외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었던 신국 일본이 미국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일까?
나는 그것을 1909년에 일어났던 한 사건으로 본다. 그 날은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날로부터 71년 전의 같은 날이었다. 장소는 북만주 흑룡강성의 수도인 하얼빈역.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린 일본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환영인파 속에서 뛰어나온 한 청년으로부터 가슴에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숨이 지기 전에 이토는 “나를 쏜 게 누구냐?”고 물었다. “조선 청년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은 그는 “바보같은 놈”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일본의 초대내각총리였으며, 일본의 조선 통감부 초대통감이었고, 일본의 메이지 헌법을 기초한 자였다. 일본의 메이지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를 저격하여 죽인 조선 청년의 이름은 안중근이었다. 그는 과연 ‘바보같은 놈’이었을까? 많은 학자들이 ‘그렇다’는데 손을 든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견해를 피력하는 학자들이 많다.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여 죽였기 때문에 한국의 식민지화가 더 빨라졌으며, 일본의 식민지배가 더 혹독한 것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당시 이토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주변에 해왔던 말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병합하려는 목적은 없어 보이고 오히려 한국을 도와 빠른 시간 내에 발전시켜서 일본의 외곽을 지킬 수 있는 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구상과 포부를 느낄 수 있다.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통감부를 설치한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직접 초대 통감으로서 조선으로 부임하여 온 이유는 그 일을 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짐작되는 자료들이 많다. 그래서 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 자기를 쏜 사람이 조선 청년이었다는 말을 듣자 “바보같은 놈”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안중근의사가 저지른 바보 같은? 짓 때문에 조선은 바로 다음 해인 1910년 국체를 상실하고 일본에 합병되고 만다.
사실에 있어서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있던 1909년까지는 일본에 한국의 병합계획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을 아예 일본의 영토로 병합해버리겠다는 계획은 안의사가 이토를 죽인 후에 갑자기 일본에서 대두되기 시작했다. 1910년 6월에 일본의 각의는 <합병 후의 대한 통치방침>을 수립했다. 이 방침에 의거하여 경찰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각서에 강제로 조인하게 만들고, 통감부 내에 경무통감부를 신설하여 헌병경찰제를 실시했다. 이어 제3대 조선 통감으로 테라우치를 임명하여 조선의 합병에 속도를 내게 만들었다.
드디어 8월 22일에 이완용과 테라우치 간에 합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순종이 어새를 날인하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공표되지 못하다가 운덕영이 어새를 훔쳐내어 날인한 것이 8월 29일이었다.
이토가 죽자마자 일본의 조선합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런 한일 합방에 가장 강력한 반대자가 이토 히로부미였다. 아마도 이토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합방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은 일본에 없었을 것이고, 한일합방은 이토의 사후에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안의사는 한국의 멸망을 앞당기고 일본의 식민지화를 재촉한 바보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는 학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토는 친한파였으며, 몰락해가는 조선 왕조에 가장 연민을 느끼고 동정심을 품은 인물 중의 하나였다.
“바보같은 놈”, 나는 이토가 남긴 마지막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고는 한다. 안의사는 과연 바보였는가? 그의 이토 저격은 바보같은 짓이었는가? 그의 거사가 한국의 멸망과 식민지화를 앞당기고 말았는가? 이에 대해 살펴보자.
암살은 대부분의 경우에 범죄행위이며 테러에 해당한다. 일본은 안의사의 의거를 테러로 규정하고 있다. 암살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범죄행위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벌어진 유사한 사례들을 많이 알고 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자신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지에서 죽였다. 그 목적은 자기가 천하를 쥐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노부나가보다 훨씬 강적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 천하를 쥐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일문이 도륙을 당하면서 천하를 히데요시에게 바친 꼴이 되고 말았다. 미쓰히데가 천하를 가졌던 것은 고작 100일이었다.
조선 중기에 노론벽파는 자기들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도세자를 음해하여 죽이지만 그대신 정조라는 강적을 만나게 되고 노론벽파의 100년 세도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부르투스를 포함한 로마의 공화파들은 카에사르를 암살하지만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라는 강적을 만나 로마의 공화파는 일소되고 만다. 그 때문에 로마의 공화정은 무너졌고 제정이 앞당겨졌다. 제정으로 가는 것을 막겠다고 카에사르를 암살한 것이 오히려 로마의 공화정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짓이 되고 만 것이다.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이나, 노론벽파가 사도세자를 죽인 짓이나. 부르투스가 카에사르를 암살한 것은 모두 이토가 말한 “바보 같은 놈들의 바보같은 짓”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죽인 하얼빈역의 의거는 어떨까? 이것도 ‘바보같은 짓’이었을까? 과연 그럴까?
다음 글에 이어서 살펴보자.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