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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하여... 3
게시물ID : history_201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자유게시파
추천 : 0/7
조회수 : 38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3/25 21:44:31
작성자: 구름~~
작성일: 2014-06-18 (수) 19:14
홈페이지: http://cloudstown.net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하여... 3 

야스쿠니 신사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일본의 국가종교였던 신도(神道)가 무엇인가에 대해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시대에서 소화시대에 걸쳐 일본은 정교일치의 국가였고, 그 국가종교의 이름은 ‘신도’이다. 신도가 어떤 종교인가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나라의 무속을 연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신앙체계는 오히려 우리나라의 무속보다 저급하다. 무속은 경전이 없는 종교이지만 의식이 복잡하고 아주 발달한 종교이다. 굿의 종류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고, 굿마다 의식의 내용이 다르다. 이에 비하여 신도는 경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없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구성요건을 갖추고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신도의 의식은 망자의 위패 앞에 향을 올리고 손뼉을 치며 허리를 숙여 절하는 것이 전부이고 신관(무당)이 집전하는 의식이 없다. 우리나라의 무속은 신내림을 받은 신관(무당)이 의식을 집전하며, 의식이란 곧 망자의 혼령을 산자와 소통시키는 작업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무속은 영적인 능력이 있는 신녀가 아니면 의식을 행할 수 없다. 따라서 무속의 의식에는 반드시 영적현상이 나타나며, 무당은 영적능력의 소유자이며 신의 대리인이다. 반면에 일본의 신도는 신관이 영적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세습되는 직업이기 때문에 신관에게는 영능력이 없으며 의식상의 영적현상이라는 것도 없다.

또 한 가지 신도의 저급성을 보여주는 것은 신앙의 대상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속은 무당이 모시는 신이 있다. 그러나 신도는 신관이 모시는 특정한 신이 없으며 신사에 위패가 안치된 모든 망자의 혼령이 신앙의 대상이다. 사람의 혼령만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의 혼령도 신으로 모셔진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군마와 군견의 위패도 안치되어 있고 신사 내에 이들의 위령비가 따로 있다. 일본인들은 일본을 위해 전쟁터에서 죽은 군마나 군견의 혼령도 야스쿠니 신사에 모인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본군의 군견병은 자기가 맡은 군견이 죽을 때, 야스쿠니에서 만나자고 말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망자는 망자가 묻힌 묘지에 그 혼령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덤을 찾아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추념을 한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애국선열이 묻힌 국립묘지가 있다. 그리고 망자들을 위한 추모의 행사를 그곳에서 연다. 그런데 일본의 신도는 망자의 혼령이 죽은 자리나 묻힌 자리에 있지 않고 망자의 위패가 안치된 신사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는 묘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국립묘지라는 것도 없다. 망자가 어디에서 죽었건, 어디에 묻혔건, 무덤이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골 가루 한 줌이 없어도 그냥 이름 써서 신사에 척 꽂아놓으면 그것이 망자의 집이고, 망자의 혼령이 머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미군은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도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해서 본국으로 가져오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유해를 사서 송환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유해를 가져와야 묘지에 묻을 수가 있고, 묘지가 있어야 망자를 위로하고 기억하는 의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단 유해뿐만 아니라 전시 중에도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해서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데 엄청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은 전사자의 유해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중국대륙과 태평양의 섬들 곳곳에 일본군의 시신들이 아직 방치되어 있어도 그것을 본국으로 가져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이름 석자가 적힌 위패를 만들어 신사에 꽂아주기만 하면 끝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이런 신도의 영향도 있어서 일본군은 전투 중에 죽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부상을 당해서 아직 살아있는 전우조차 후방으로 옮기지 않고 그냥 내버리는 것이다. 반자이 돌격이 끝나고 나면 미군의 철조망 앞에는 수백 수천의 일본군 시신이 널부러지고 그중에는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자들도 있지만 살아남은 일본군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적진에 두고 온 동료의 시체나 부상자가 있을 경우, 괴로워하고 고뇌했던 미군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런 신도의 편리함 때문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 후에 일본이 치른 모든 전쟁에서 희생된 276만 명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사형에 처해진 일급전범 14명의 위패는 미군의 눈치를 보느라고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지 못하다가 1978년에 와서야 슬그머니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의 총리나 각료가 참배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 문제는 그 이전에도 당연히 제기되었어야 할 문제였다. 왜냐하면 일본의 전범들, 그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A급 전범들의 다수가 전쟁 중에 죽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 자살한 자도 많았고, A급전범으로 기소된 자들 중에는 판결이 나기 전에 자살한 자도 많았기 때문에 사실상 A급 전범임에 틀림없으면서도 판결을 받지 않아서 전범의 굴레를 쓰지 않은 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위패는 전범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 직후부터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어 있었고, 다만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1978년에 합사된 A급 전범 14명에 대해서만 문제를 삼는데 기실은 일본의 전쟁범죄자들 대부분이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 처음으로 총리자격으로 공식참배를 한 사람은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였다. 2000년에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가 참배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면서 방명록에 처음으로 ‘일본내각총리대신’이라고 서명한 사람은 2001년 8월에 참배한 고이즈미 준이치로이다. 그것이 신사참배의 공사(公私) 성격문제로 논란이 불거지자 일본 정부는 '사적참배'였다고 물러섰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이후에도 참배를 계속 강행했다. 그리고 2014년 현총리인 아베가 다시 참배를 강행하여 작금의 신사참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원래 일본 신사의 이름은 초혼사(쇼콘샤, 招魂社)였고, 야스쿠니 신사는 동경초혼사가 본래 이름이었다. 초혼사라는 명칭은 무속의 굿당이나 신집과 같이 망자의 혼을 불러내는 장소라는 의미였다. 동경초혼사는 일본 전국에 산재해 있던 초혼사들의 본사였다. 이것을 1879년에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로 개명하였고, 1936년에는 전국의 모든 초혼사들을 호국신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게 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A급 전범 14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동경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사람은 총 28명인데 그중 판결 전에 자살한 자, 급사한 자 및 정신이상을 일으킨 자 등을 빼고 최종적으로 A급 전범으로 확정판결을 받은 자의 수가 14명이다.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이하라 겐지, 히로타 고키, 우메즈 요시지로, 도고 시게노리, 마쓰이 이와네, 기무라 헤이타로, 도조 히데키, 마쓰오카 요스케, 고이소 구니아키, 나가노 오사미, 무토 아키라, 시라토리 도시오, 히라누마 기이치로

다음 글에 이어서 이들의 이야기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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