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내청춘 관련 정보나 스토리에 대한 이런저런 감상 살펴보려고 가입했는데, 첫 번째 글을 좀 무거운 주제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 글은 내청춘 6권에 등장한 '팔굉일우'라는 단어를 놓고 한국 웹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보고 생각이 나서 쓰기 시작한 글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이 카페에서도 활동하는 것으로 아는 크라드메서라는 유저가 깔끔한 논의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웹에서는 내청춘을 놓고 우익 논란이 벌어지는가 하면, 작품의 주제의식을 상징하는 메인 여주인공인 유키노시타는 '우익년' '수꼴년'소리를 듣고 있더군요.
전공자의 입장에서 이 주제와 관련된 잡음을 확실하게 없앨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팔굉일우'라는 용어의 역사를 훑어보며 해부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 봤습니다. 2분기에 내청춘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기 시작하면 이 떡밥 역시 재등장할 것으로 보이는데, 참고문헌 등 소소한 부분을 보강해 외부 사이트에다도 기고할 생각입니다. 학술적인 글쓰기를 염두에 뒀기 때문에 친절한 글은 아닌데, 일단 카페에 미수정본을 올려볼까 합니다. 이 주제에 관심이 없거나 긴 글이 부담스러우시면 글의 요지만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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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팔굉일우’라는 단어는 일본의 역사서 속에서 천황에 대한 존경을 담은 용어였고, 20세기 초반 동아시아 침략 정당화의 의미도 담아내게 되었다.
2.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이후 ‘팔굉일우’는 잊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기억으로 남았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에 환호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찬미했던 학자들조차도 대동아공영권과 연관된 역사를 잊어버리고 삭제하는 데 앞장섰다.
2-1. 오직 제국 일본에 비판적이었던 학자들만이 천황제 파시즘과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팔굉일우’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언급했다.
3. 일본의 경제적 몰락과 우경화 이후 태평양 전쟁을 옹호하는 넷우익들이 다수 등장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와 대동아공영권을 긍정하는 넷우익들조차도 ‘팔굉일우’와 같은 단어는 기피한다. 그 단어가 담고 있는 천황제의 고루한 의미가 현대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는 전혀 와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4. 따라서 현대 일본에서 ‘팔굉일우’라는 단어는 2-1에서 언급한 것처럼 양심적 학자들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부정하기 위해 활용되고 있다. 와타루 와타루(작가) 역시 이러한 경로로 팔굉일우라는 단어를 접하고,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4-1. 이는 작중에서 해당 단어가 등장한 상황과도 맞아 떨어진다. 문화제 실행위원회의 파행은 제국 일본을 비판한 대표 지식인인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 제국의 천황제를 비판하기 위해 제시한 유명한 개념인 ‘무책임의 체계’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
1.
내청춘이 인기를 얻게 된 이후 한국 웹에서 극우 논쟁이 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원인은 작중에 등장한 ‘팔굉일우’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이 논쟁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일본정치사상사에 관심이 없다보니 이와 관련한 전후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물론 2년 전에도 이 사안에 대해서 훌륭한 설명(http://blog.naver.com/gray_days/120192174734)이 제시되었고, 이 글에 수긍하고 넘어간 기억이 있다.
나는 입대한 이후 일본정치사와 일본정치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고, 관련된 여러 문헌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쇼와 시기의 일본 사상사나 대동아전쟁을 다루는 텍스트를 읽다보면 팔굉일우라는 단어를 정말 너무나도 자주, 일상적으로 접하게 된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아시아주의는 제국 일본의 대외정책과 사상계에서 커다란 논쟁 대상이었다. 특히 15년의 전쟁 기간동안 이러한 팔굉일우의 이념은 일본 사회 전체를 휩쓸다시피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일본 사회에서는 이러한 천황제 제국주의의 이념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나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팔굉일우’나 ‘천양무궁’, ‘오족협화’등으로 대표되는 대동아공영권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방식으로 다뤄졌는지 살펴보고, 그를 바탕으로 ‘내청춘’에 등장한 팔굉일우라는 단어의 전후 맥락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 글의 근본적인 목적은 앞서 언급한 크라드메서의 글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사상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논지를 보강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2.
‘팔굉일우’라는 단어의 어원은 『일본서기』다. 한반도의 삼국시대 역사 관련해서도 사료로 자주 인용되는 이 책은, ‘역사서’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덴무 천황이 정치적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 표현은 2.26 사건 당시 쿠데타를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이 반란의 대의를 설명하는 문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재발굴되었다. 2.26 사건은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경제적 불평등과 좌파 정치세력들의 대두에 불만을 지닌 장교들이 천황이 직접 권력을 잡고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며 시작한 쿠데타였다. 팔굉일우가 가진 천황제와의 연관성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황도파의 쿠데타는 무기력하게 진압당했지만 그들이 이후의 일본 정치와 사회에 남긴 흔적은 어마어마했다. 황도파의 라이벌이었던 통제파는 황도파와 갈등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서구 세력’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선 동일했다.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자유주의적인 정치 세력들은 급속히 위축되었고, 정국 주도권을 잡은 통제파 장성들은 황도파가 제시한 ‘천황의 권위’를 대외팽창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앞서 언급한 ‘천양무궁’이나 ‘만세일계’와 같은 단어들과 함께 팔굉일우 역시 애용되었지만, ‘팔굉일우’는 대외 확장정책과 맞물려서 천황과는 다른 층위의 의미도 덮어쓰게 된다.
3.
서구에 맞서서 아시아 국가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는 중국과 일본, 조선이 강제 개항을 통해 서구와 맞닥뜨린 1800년대 후반부터 제기됐다. 그 가운데서는 노골적인 침략 의도(‘정한론’으로 대표되는)를 내포한 이념도 있었지만, 가쓰 가이슈나 기타 잇키와 같은 비교적 ‘순수한’ 의도의 아시아주의도 있었다. 물론 그건 초기의 얘기고,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고 중국까지 세력을 확장하던 1930년 무렵이 되어선 그런 의도와 무관하게 아시아주의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일본이 수행하고 있던 총력전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상으로 발전해버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대동아공영권’이나 ‘동아협동체’따위가 이 때 나온 개념들이다.
이러한 동아공영권 개념은 단순히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에 맞서 싸운다는 차원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천황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면서 정부에 협력했던 학자들은 물론이고, 헌정 체제를 옹호했던 사람들이나 자유주의자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좌파들 중에서도 동아공영권을 옹호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동아공영권이 단순히 전쟁이나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대의’를 추구하는 연합체라고 생각했다. "서구 중심의 근대 세계 질서는 오늘날 한계에 봉착했다. 그러한 근대를 ‘초극’하는 것, 넘어서서 새로운 대의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아시아의 사명이며, 일본은 그 중심에 있다!"
팔굉일우는 이러한 대동아공영권 이념을 뒷받침하는 핵심 개념으로 재탄생한다. '아시아를 구성하는 여러 국가가 천황의 기치 아래 단결하여 하나의 집을 이룬다.' 서두에 언급했던 ‘오족협화’ 역시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핵심 건국 이념이었으며, 팔굉일우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주의적 성격을 가진 단어였다.
4.
제국 일본은 온갖 지식인들을 동원하며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일본이 처참하게 패배하고, GHQ의 통치 기간동안 대동아공영권과 연관된 아시아주의는 철저히 금기가 되었다. 팔굉일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GHQ가 금지한 것은 '대동아공영권', 즉 제국 일본의 아시아주의적 담론들이지 천황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GHQ는 천황의 인간 선언을 강요하고, 태평양전쟁 시기와 같은 맹목적인 천황 숭배를 금지했다.
하지만 미국에게 있어서 천황은 일본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문화적 상징이자 권위이기도 했다. 라이샤워가 전쟁 중 남긴 회고록과 사카이 나오키 등의 연구는 미국이 '천황'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이미지 형성 작업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원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배경 속에 전쟁중 팔굉일우와 같은 단어를 열심히 내세우며 대동아 공영권을 지지했던 학자들이 재등장한다.
그들은 여전히 '서구적 세계 질서'를 초월해야 한다는 열망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국 일본은 무너졌고 그들 앞에는 GHQ의 서슬 퍼런 검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현실과의 타협'을 택했다. 천황제와 결합하여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던 대동아공영권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천황'이었다. 참혹한 전쟁 끝에 오늘날 국가들은 근대 국가를 넘어서 '평화-문화국가'로의 이행을 앞두고 있으며,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이러한 평화적인 문화국가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렇게 팔굉일우는 잊혀져 갔다. 일본서기에서 팔굉일우를 발굴하고, 대동아공영권의 핵심 이념으로 내세웠던 사람들조차도 그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철저히 숨기고 가리는 데 급급했다.
4-1.
그 가운데서도 대동아공영권과 제국 일본의 파국을 비판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논자들이 있었다. '전후 민주주의자'로 불리는 일군의 좌파적인 학자들은 일본 학계를 휩쓸었다. 이들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울 섞인 이념을 내세우며 '근대'를 넘어섰다고 주장한 일본 제국이 사실 '근대'에 못 미쳐도 한참 못 미치는 전근대 국가였음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졌던 인물이 ‘학계의 천황’으로 불렸던 마루야마 마사오였다. 그는 ‘무책임의 체계’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제국 일본의 천황제를 비판했다.(이 개념은 팔굉일우라는 단어가 등장한 내청춘 6권의 컨텍스트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뒤 파트에서 좀 더 자세히 후술할 것이다).
팔굉일우나 신주불멸 따위의 개념 역시 남김없이 지적 비판의 무대로 끌려나와 뭇매를 맞았다. 그걸 지지했던 지식인들조차도 앞서 서술했던 것처럼 대동아공영권과 관련된 이념을 부정하거나, 아예 잊어버리는 길을 택했으니 논쟁이 성립될 일도 없이, 샌드백처럼 얻어맞을 수밖에. 결국 이러한 단어들은 부정적인 뉘앙스와 함께 일본 제국의 파시즘과 역사적 과오를 들춰낼 때에나 호출되는 단어가 되었다. 팔굉일우라는 단어는 일본인들에게도 상당히 생소한 단어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현대 일본 웹이나 사전에서도 팔굉일우를 검색하면 그 개념이 담고 있는 아시아 통합이나 천황제 이데올로기보다도 태평양 전쟁 시기의 얼룩진 과거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루야마 마사오를 필두로 한 전후 민주주의자들의 지적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세상에 미친놈은 많다. 전후 일본에서도 태평양 전쟁을 긍정하고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분명 있었다. 60년대에도 『대동아전쟁긍정론』이라는 책이 출판된 바 있기도 하고. 그러나 이러한 담론들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철저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일본에서 전쟁의 기억을 전면적으로 긍정하고 옹호하는 담론이 등장하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와야 한다.
5.
일본의 우경화 흐름은 버블 경제가 붕괴하고 일본이 과거와 같은 경제적 번영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찾아왔다. 민족주의적 우경화 흐름은 학계에서는 패전후론, 시민운동쪽에서는 ‘새역모’로 대표되는 교과서 개정 운동, 그리고 대중문화와 인터넷 영역에서는 ‘넷우익’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계층으로 나타났다. 패전후론과 새역모는 이 글에서 다루는 대상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배제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넷우익에 대해 살펴보자.
오늘날에는 재특회나 2ch의 막장 행보로 인해서 포커스가 많이 넘어간 감이 있지만, 이른바 ‘넷우익’의 담론을 구축한 창시자는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였다. 그가 자신의 만화를 통해 제시한 담론은 학술적 관점에서 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수준이지만, 대중적 영역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제국 일본을 긍정하는 방식은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를 그대로 빼다 박아놓은 수준이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서 아시아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대동아전쟁은 잔혹하지만 가장 숭고했던 전쟁으로 언젠가 다시 재평가받을 것이라는 논리다(물론 그 과정에서 난징 대학살이나 종군위안부와 같은 전쟁범죄는 ‘날조’나 ‘조작’으로 치부된다). 전쟁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숭고한 전쟁’을 위해 희생했던 할아버지 세대를 기억하자는 공동체주의적 민족-국가관으로 이어진다. 앞서 내가 언급했던 ‘전후 민주주의자’들은 좌파적 이념을 바탕으로 언론, 지식, 정치를 장악한 다음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일본을 자학 사관으로 몰아넣은 주범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진짜로 재미있는 부분은, 이러한 넷우익의 역사 담론에는 ‘천황’이 들어설 자리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국 일본이 내세웠던 ‘백인 제국주의의 침략’과 ‘아시아 민족의 해방’과 같은 래퍼토리는 고스란히 가져왔지만, 그걸 묶어주는 머리였던 천황의 자리는 사라져 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론이다. 천황이 일본 사회에서 갖는 상징성은 여전히 크지만, 그러한 천황이 실질적인 정치적 권위나 존경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천황이 절대적인 윤리, 절대적인 도덕을 상징하고 이 천황과의 거리를 바탕으로 선과 악이 판별되던 전쟁 시기에 비하면 세상이 너무 달라져버렸다. 당연히 넷우익들은 그 천황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국가나 공공성에 대한 헌신처럼 번지르르한 개념을 대신 갖다 붙인다. 오늘날 팔굉일우나 신주불멸과 같은 단어를 넷우익들조차 쓰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 단어들이 갖고 있는 강렬한 봉건적 천황제의 이데올로기는 현대의 젊은 일본인들에게 다가가기에는 너무나도 낡고 고루하다.
6.
어떤 미디어에서 생소하고 뜬금없는 표현이 등장했다면, 해석하는 길은 각자의 자유에 달렸다. 하지만 그걸 해석하는 과정에서 소설을 둘러싼 컨텍스트를 고려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팔굉일우라는 개념을 둘러싼 일본 사회의 사상사적 지형도를 검토해본 것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팔굉일우라는 개념의 역사와 함께 그 단어가 인용된 소설 속의 배경을 함께 고려해 가며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져 보자. 과연 ‘내청춘’의 6권에 등장한 ‘팔굉일우’는 태평양 전쟁기 일본 제국을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나?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아니다.”
6권에서 등장하는 문화제 사건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리더의 무책임과 방관이 원인이었다. 그러한 무책임 속에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하고 밝은 분위기지만, 일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소수만이 희생당하고 있다. 나는 팔굉일우라는 단어가 사용된 이러한 맥락을 살펴보면서 묘한 기시감 같은 것을 느꼈다. 여기에서 소개하고 싶은 것이 마루야마 마사오의 '무책임의 체계'라는 개념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후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화제가 되었던 한 넷우익의 ‘전쟁을 희망한다’는 글(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olink.asp?aid=14766008&serviceday=20140708)의 제목은 ‘마루야마 마사오를 후려치고 싶다’였다. 마루야마는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논문에서 제국 일본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국가였다며 격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절대적인 도덕, 윤리의 상징인 천황을 알리바이삼아 개인이 자신의 행동,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과 양심을 던져버리는 체제였다. 어떤가? 작중의 상황과 ‘무책임의 체계’는 제법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이 주장은 과도한 끼워 맞추기에 가깝다. 그러나 몇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무책임의 체계'라는 개념은 최소한 팔굉일우보다는 일본인들에게 친숙한 용어라는 점이다. 당장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無責任の体系'가 '八紘一宇'보다 두 배 가량 많은 검색 결과가 나온다. 와타리 와타루가 마루야마 마사오를 직접 읽어보았다면 그건 헛소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팔굉일우라는 용어를 접하고 소설에 사용하기까지 하는 과정에서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전후 민주주의자들의 일본제국 비판 담론을 접하는 건 거의 필연이었을거라 생각한다. 앞서 5절에서 다뤘던 것처럼 팔굉일우라는 단어는 현대 넷우익이나 일본의 전통적인 우파들 모두 기피하는 단어고, 전후 민주주의자들만이 일본 제국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건, 어떤 개념이건 그것이 호출되는 특정한 경로가 있다. 최소한 현대 일본에서는, 팔굉일우를 1940년대처럼 대동아공영권과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홍보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경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과거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다시 기억하기 위한 경로가 압도적으로 다수에 가깝다. ‘내청춘’의 팔굉일우 인용 역시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경로를 통해 작품에 등장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이 작품이 일본제국을 둘러싼 장대한 사상사적 논쟁과 비판을 둘러싼 지형도를 들이대며 분석하기엔 다소 가벼운 작품인건 사실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논의를 하는 이유는 한국 웹에서 오가는 공허한 논의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다양한 해석은 좋다. 팔굉일우라는 용어가 별 의미나 생각 없이 나온 단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고, 내가 서술한 것처럼 일본 제국과 파쇼적 황국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인 시각을 담았다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작품의 스토리와 조응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극우'라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근거없는 낙인찍기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