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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농 최규동 선생에 대한 해명
게시물ID : history_200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드식스
추천 : 0/6
조회수 : 1461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5/03/22 23:00:27
최근 일부 언론에서 백농 최규동선생께서 1942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징병제 옹호 글 한 편과 중일전쟁 기원제 발기인, 임전보국단 평의원, 징병제 축하연 참석[2015.3.7. 오마이뉴스 보도] 등을 거론하며 친일 인사로 낙인찍으려는 언동에 대해 통탄을 금할 수 없다.  1942년은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기로, 그 당시 어떤 지식인도 그 강압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 인물의 인생 궤적을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어떤 행동이 자의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한 것인지, 어쩔 수 없는 강압에 의해 마지못해 한 것인지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 백농 선생께서 평생 하신 말씀과 그 분의 행동을 미루어 볼 때 결코 자의가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독립기념관 김경미 실장은 ‘학교운영의 논리와 파시즘 교육체제’란 논문에서 “1930년대 중반 이후 파시즘 교육체제 하에서 사립학교의 사적 영역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최규동은 학교 경영에서 물러나지 않는 한, 이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학교의 존속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문교의 조선'에 실은 징병제 찬양 글 한 편 외에는 더 이상 사회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학생 앞에서 거의 침묵을 지켰다. 당시 적지 않은 수의 학교 경영자들이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노골적인 친일의 길로 나가는 가운데, 한학을 공부하여 ‘대의’와 ‘의지’를 중요시했던 한 교육지식인의 대응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하여 당시 엄혹한 정황과 백농 선생의 불가피한 선택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각종 모임에 이름을 올린 것은 당시 일제의 극악한 종용과 강압에 의해 부득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실제 참석 여부나 자의적인 참여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만약 이런 잣대로 당대 지식인을 평가한다면, 단 한 사람도 친일의 멍에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 시절은 엄혹하던 때이다. 이런 당시 정황은 고려하지도 않고 드러난 한두 가지 정황만으로 백농 선생을 친일로 몰아붙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만약 백농 선생께서 개인적인 영달과 이익을 위해 이런 행위를 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단지 학교 폐쇄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제가 교사들에게 국방색 국민복 착용을 강요했을 때 일부 교사들은 반발했으나, 최규동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다. 폐교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고 입었다고 한다. '文敎の朝鮮'의 글도 이와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징병제를 옹호한 글을 썼다고 해서 백농 선생께서 강연을 다니신 적도 없고, 한 번도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업 시간 중에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장래에 대해 말씀하시어 학생들을 감화시키셨다. 수많은 제자들이 당시 백농 선생의 가르침으로 민족의식을 키웠노라고 회고하고 있다.  백농 선생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하지 않으셨다. 당시 우리 국민 중 79%가 강요에 의해 창씨개명을 했으나, 백농 선생은 끝까지 거부하였다. 학교 안에서 ‘조선말’을 자유롭게 하게 했으며, 백농 선생도 아침 훈화 시간에 조선말로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은 백농 선생이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식 교육과정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갖은 모함을 받으면서도 ‘고등보통학교’로의 변경을 거부하였다. 특히 “우리 자제는 우리 손으로 교육시키자”며 일본인 교사도 총독부에서 정한 최소 인원으로 했으며, 채용 조건도 가장 무능한 사람으로 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그 날, 민족을 상징하는 무궁화와 독립을 상징하는 떠오르는 태양으로 교표를 만들기도 했다.  천식의 병환 속에서도 일주일에 58시간 수업을 했으며, 매일 새벽 폐경련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교단에서 쓰러질 때까지가 나의 생명이다”고 하셨다. 이런 모습에 감동하여 ‘조선의 페스탈로치’(동아일보 1940)라는 극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 때는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하려고 일부러 서울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있던 평양 기명학교 교사로 자원해서 가기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농 선생을 친일로 몰아세우려고 학자적인 양심을 저버린 이준식(연세대) 겸임교수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로 글을 쓴 오마이 뉴스 윤극현 기자는 대오각성하고, 만약 백농 선생께 부정할 수 없는 친일 행각이 있었다면 1994년부터 2009년까지 장장 15년 간 철저하게 조사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왜 등재가 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민족시인 윤동주도 일본으로 유학가기 위하여 平沼東柱(히라노마 도추)로 창씨개명 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친일파라 비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시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한평생 민족교육에 바친 헌신적인 삶은 살펴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1942년 일제가 패망기에 들어선 엄혹한 시절 백농 선생이 썼는지조차 불투명한, 혹은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글 한 편으로 백농 선생의 민족교육에 대한 열정과 한 민족지사의 생애를 모조리 친일로 매도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中東 7만 동문은 이번 일을 계기로 백농 선생께서 일러주신 ‘大義·正義·信義’를 더욱 새롭게 하여 우리 사회에 백농 선생의 가르침이 오롯이 구현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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