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이 공격한 여진을 금나라라고 표현한 것은 윤관과 싸운 여진과 금나라는 아예 같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금나라 건국은 고려와 여진의 전쟁이 끝나고 4년 만에 이루어졌다.
고려 중기에 동북아시아 권역에서 가장 격렬했던 전쟁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그저 이민족 정벌 정도로 여기는 윤관의 여진 정벌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강력하게 세력을 확장하던 완안부의 여진과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고려는 양국의 전력을 총동원해서 전쟁을 벌였다. 결국, 고려의 패전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전쟁의 여파는 몽골의 봉기 이전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금나라의 거란 정벌과 송나라 정벌은 상대도 되지 않는 끔찍한 전쟁이 동북 9성을 두고 벌어졌다.
이 전쟁의 원인은 완안부의 세력 확장과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던 고려의 무능함이다. 당시 고려는 이해관계가 얽혀 힘을 합치지 못하는 여진을 무시하고 있었다. 사실 충분히 그럴 법한 게 여진이란 존재는 본래 하나의 종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부락마다 생존 방식과 문화가 달랐고, 거란과 고려에 충성하는 부락과 그렇지 않은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심지어 여진족 가운데엔 해적까지 있어서 고려의 동부를 약탈하기도 했다. 여진 해적은 일본까지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기도 했는데, 이런 여진 해적을 고려 수군이 토벌해서 일본인 포로를 일본에 송환하기도 했다. 사실, 여진족의 다양한 모습은 말갈 시절에도 똑같았다.
이런 여진이었지만, 긴 시간 수탈을 당하다 보니 응집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려의 압박은 견딜만했지만, 거란의 압박은 여진인들을 일제히 분노하게 했고, 합쳐지지 않을 것 같던 여진인이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른 완안부는 힘을 기르기 위해 주변 부족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상당한 부락이 완안부에 협력했고, 협력하지 않는 부락은 힘으로 복종당했다.
완안부와 완안부에 협력하는 여진이 얼마나 연대했는지는 그들의 병종을 살펴보면 안다. 금나라의 주력군은 중장기병이었는데, 금나라는 일부를 제외하고 유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병의 숫자가 거란보다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중장기병에 엄청난 갑옷을 입혔다. 그리고 중장기병끼리 묶어서 절대 도망치지 못하게 한 뒤 그 후방에 경보병과 경기병을 배치했다. 중장기병은 갑옷의 무게 때문에 전방에 배치하지 않는 법이지만, 여진은 그러지 않았던 것.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향해 돌진하는 중장기병과 그 뒤를 쫓은 경보병, 경기병은 헌신적으로 적군을 공격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헌신이 가능했던 것은 여진의 끈끈한 연대 덕분이다. 거란의 더러운 행각이 여진을 뭉치게 했던 것이다.
그런 강력한 여진 기병이 고려 땅을 침범했다. 고려군은 두 차례에 걸쳐서 엄청난 패배를 당했고, 정평이 함락되어 여진 땅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당시 여진은 500의 기병으로 고려군을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진군의 병력이 500에 불과하다는 게 아니다. 500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고려군을 공격했고, 그 500명의 기병이 맹활약했기 때문에 고려군이 패배했다는 기록이다. 종종 이런 식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비슷한 경우로 조선군이 쌍령전투에서 300의 기병에게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다. 쌍령전투의 기록은 300명의 여진 기병이 가장 큰 활약을 펼쳐 고려군의 진을 무너트렸다는 의미다. 진이 무너진 조선군은 조총 중심인데다 기동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여진이 모든 군사를 전진하게 하자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또, 고구려의 4만 병력이 당나라 계필하력의 1400명의 병력에 패전했다는 기록 역시 같은 경우다.
충격적인 패전에 고려 조정은 부랴부랴 여진에 화친을 청했다. 당시 고려가 북방에 배치한 병력을 생각했을 때, 고려가 취한 외교적 태도는 엄청난 일이라 봐야 한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손실이 있었던 것이리라. 이 충격적인 사건은 여진도 예상치 못한 전개로 이어졌는데, 여진이 완안부를 중심으로 뭉친 것처럼 고려 역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국의 군세가 뭉치게 된 것이다. 다들 역사 교과서에서 공부했던 ''별무반''이 바로 이 시기에 구성되었다. 총병력 30만이 있었고, 윤관이 그 가운데 17만을 가려내어 여진 정벌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고려와 금나라 양국이 죽음의 매치를 시작했다.
고려의 전쟁 방식은 속전속결이었다. 먼저 계략을 써서 완안부의 수장이었던 우야소(금나라의 강종)를 남쪽까지 내려오도록 했다. 그리고 고려에 반대하던 여진의 지도부를 불러 잔치를 벌이고, 그 틈을 타 그들을 모두 죽였다. 고려를 의심하며 성 밖에 있던 여진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도망치려 했지만 고려 기병이 그들을 공격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우야소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급하게 완안부로 돌아갔고, 고려는 우야소가 완안부로 돌아가는 사이에 모든 것을 정리해버린다. 17만 7천 병력이 전격적으로 북진해서 여진의 성들을 함락시키고 그 일대를 장악했다. 당시 고려의 전진이 얼마나 빨랐는지 여러 여진의 성주와 부락들이 군사를 합쳐서 대항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고려와의 전투에서 죽은 사람이 별로 없고, 대부분 포로로 잡히거나 고려의 신민이 되어버렸을 정도다. 이 정도면 고려의 기동력이 거란의 기동력과 막상막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전략을 차근차근 수행해나가던 고려에 갑자기 수난이 닥친다. 장악한 땅에 성을 세우고 다음 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이동하던 윤관을 여진이 기습했다. 이때는 이미 여진족 전체에 고려의 공격이 알려졌을 테고, 고려에 대항하기 위한 군세를 조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고려군은 엄청나게 당황했는데, 여진족이 등장할 수 없는 곳에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정보가 잘못되었던 것.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하나의 길만 막으면 여진이 침범할 수 없다는 정보를 믿고 출전했는데, 알고 보니 엄청나게 많은 길이 있어서 사방에서 적이 몰려왔다고 되어 있다. 윤관은 길에 성을 쌓고 강동 6주와 마찬가지로 성들이 서로 지원할 수 있는 방어벽을 형성하려 했지만, 그게 불가능해졌다.
이 기습을 시작으로 고려와 여진은 국력을 총동원해서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포문은 여진이 열었다. 여진은 강병 2만을 동원해 윤관이 쌓은 동북 9성 가운데 하나인 영주성을 공격했다. 영주성에 있던 고려군 역시 꽤 많은 편이었지만, 여진군의 강력함에 두려워 공성을 결정했는데 척준경이 반대하고 정예 기병을 이끌어 여진군의 예봉을 꺾었다. 척준경과 척준경을 따른 고려 기병이 예봉을 꺾자 여진은 두려워하며 군을 물렸다고 한다.
영주성 전투가 끝나자마자 고려는 또다시 시련과 마주한다. 여진은 최정예군단을 총동원해서 수만 명에 이르는 군대로 웅주성을 포위해버렸다. 웅주성에서 다른 지역에 빨리 연락을 취한다면 여진군이 아무리 많아도 극복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동북 9성은 성과 성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다른 성에 연락도 못 하고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웅주성에서 척준경이 빠져나왔다. 당시 웅주성을 포위한 적의 진지가 100km에 이르렀는데, 척준경은 이 진지를 가로질러 다른 성에 연락을 취해 지원군를 이끌고 여진군을 쓸어버린다. 이 전투에서 여진군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는 이후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수백 명 단위로 여러 지역을 약탈하는 방식의 게릴라 작전을 펼쳐야 했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헌데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여진의 게릴라 작전이 고려에 제대로 먹혔다. 동북 9성 지역에 이주한 고려 사람들은 농사조차 짓지 못하고 성으로 도망치기를 반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17만 7천의 병력이 넓은 지역을 정벌했다. 게다가 백성들까지 동북 9성으로 이주시켰는데 이들을 먹이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 하지만 여진이 수십 수백 단위로 약탈 전쟁을 시작하니 그게 될 리가 없다. 결국, 모든 군량을 남쪽에서 끌어와야 했다. 육로로도 끌어왔겠지만, 고려의 배가 약탈당했다는 기록을 보아서 바다를 이용해 보급했을 가능성도 있다.
전쟁의 흐름을 뒤바꾸기 위해 고려 역시 게릴라 작전에 대항하기로 하고 척준경에게 정예 기병을 주어 여진의 습격을 막게 했다. 아마도 최정예 기병 수백 명 정도로 동북 9성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진을 토벌했던 모양이다. 이번엔 여진이 당황할 차례였다. 척준경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기습 공격이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쟁은 소모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고려와 여진 양쪽 모두가 지치는 상황이었다. 여진의 병력 소모도 끔찍했겠지만, 고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너무 길었다. 아무리 전성기의 고려라곤 하지만 3년이나 정벌전을 계속할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진군으로부터 결정타가 날아왔다. 여진군 2만이 길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진은 긴 시간 게릴라전으로 고려를 괴롭히면서 후방에서 군사를 모았던 모양이다. 아주 많은 병력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그래도 최정예 군사였다. 왜냐하면, 오연총이 군사를 모아 길주를 구원하러 가다가 여진군에게 엄청난 패배를 당하고 구원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길주를 지키던 사람은 허재였는데, 성의 군민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구원군을 패전케 한 여진의 위력을 보아서 군민이 아무리 많아도 지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고려 조정에선 길주를 포기하지 않았을는지.
이런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자 고려 조정은 여진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였다. 완안부의 수뇌부는 ''외교''가 뭔지 알았다. 그들은 대군으로 길주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동시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던 것이다. 고려로선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었다. 여진 역시 길주를 포위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전쟁이 끝나자 여진이 기왓장 하나도 고려 땅에 던지지 않겠다고 했다거나 되돌아가는 고려 사람들에게 수레까지 제공하고 호송해줬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과장된 기록이 아닐 것이다. 여진은 주력군 대부분이 죽거나 다쳤고, 점점 결속력을 잃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얼른 고려와 전쟁을 끝내는 게 목적인 마당에 고려의 심기를 건드리면 최악의 상황으로 번지게 된다. 게다가 길주에선 허재가 무려 130일 동안 여진의 공격을 막아내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괴력이었냐면, 포위하고 있던 여진군이 오히려 큰 피해를 보았는지 포위를 풀었을 정도다. 이미 여진은 긴 시간 쌓아올린 군사력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잃기 직전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고려군의 병력은 여전히 많았다. 처음 정벌전에 나선 정예군만큼은 아니어도 정말 많았던 모양이다. 기록에 의하면 여진 정벌을 시작하기 전에 고려군을 크게 무찔렀던 석적탄을 비롯한 금나라의 명장들이 나서서 많은 숫자의 고려군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적혀 있다. 일부 기록엔 아예 구체적인 수치까지 등장하는데, 5만의 고려군을 상대로 이기고, 7만의 고려군을 무찔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전쟁이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 성을 방어하는 병력을 제외하고도 위와 같이 대군이 병력이 출전했던 것이다. 아마 고려군은 윤관 열전에 기록되었고, 기념비에 기록되었던 30만 병력을 모조리 여진 정벌에 투입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반대로 생각하면 고려에 끔찍한 일이다. 전성기 시절의 고려라곤 하지만 이토록 많은 병력을 정벌전에 투입하는 것은 버거운 일인게 당연하다.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윤관의 여진 정벌은 고려와 금나라가 국운을 걸고 병력을 총동원해 벌인 전쟁이었다. 아마 양국 모두 국력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았을는지. 지역의 주민에겐 생지옥이었을 것이다.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인이나 고려인이나 고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계속되는 게릴라전에 삶의 터전을 잃었다. 안 그래도 살기 어려운 백성에게 이 전쟁은 그저 악몽이었을 뿐이다. 당연히 전쟁에서 죽은 양국 병사의 수는 천문학적일 테고.
지독한 전쟁이 끝나고 4년이 지나서야 여진은 간신히 힘을 회복해 거란을 정벌했다. 금나라로 국명을 정하고 거란의 주력군 70만을 깨트린 뒤 딱 7년 만에 거란을 멸망시켰다.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고 10년 만에 거란을 멸망시킨 것이다. 그리고 거란을 멸망시킨 뒤 8년 만에 북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북방을 차지했다. 송나라는 남쪽으로 물러나 남송을 건국하게 된다. 여기까지 18연.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고 18연 만에 동아시아를 석권했다. 고려가 싸운 적은 이렇게 강력했다.
그래도 고려는 전쟁의 보상을 받았다. 어쩌면 여진 정벌은 고려가 놓은 신의 한 수였는지도 모른다. 금나라의 위력을 보아서 그들이 장강 북쪽을 차지한 뒤 병력을 차출해 대군으로 고려를 공격했다면 고려는 멸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진 정벌로 고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여진은 금나라를 건국하고 동아시아를 석권하는 동안 고려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어 거란이 버리고 도망간 보주를 고려가 날름 먹어치웠는데도 고려를 공격하지 않았다. 고려에 대한 공세는 나중에 외교 관계의 재조정 정도로 그쳤는데, 그 외교 관계의 재조정도 고려의 황제국 체제를 인정해주는 꽤 뜻밖의 방식이었다. 당시 금나라가 고려에 보낸 국서엔 "형인 금나라 황제가 아우인 고려 황제에게...." 라고 적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고 금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금나라는 도움을 거부했다. 다른 나라의 반란은 정벌의 명분이자 최고의 기회임에도 이를 무시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고려의 입장에서 여진 정벌은 오히려 미래에 있었을 최악의 위기를 방지한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