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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노트에 관한 두서없이 간략한 이야기 중편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200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2
조회수 : 68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3/17 21:51:01
사실 이 파나이 호 사건은 일본군이 난징에 접근하자 장제스가 철수를 종용하여 대사관이 철수하는 와중에 벌어진 일인데 아시다시피 난징에서는 정말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입에 담기도 참담하다 할수 있는 사건이 벌어졌지요.

이로 인하여 미국의 여론은 점차 악화 일로를 걷게 되는데 그 와중에 일본군이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인 충칭에 소이탄 공격을 가하여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더 이상 인내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미국의 국무 장관 코델 헐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벌이고 있는 민간인 폭격에 대하여 강경한 비난 성명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3주후에는 미국 정부는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하는 국가에 대하여 비행기나 그 관련된 모든 부품의 수출을 반대한다는 다분히 일본을 겨냥한 무역 금제 조치 이른바 moral embargo를 발표하게 되는데, 사실 이 무역 금제 조치에는 커다란 맹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미일통상조약이 있습니다, 무역 금제 조치를 통해 고철과 석유를 차단하게 된다면 앞서 체결한 미일통상조약을 위반하게 되는 것인데 사실 이건 큰 문제라고 할수 없다고 볼수 있는게 두번째 이유인 전쟁입니다.

십억 받고 고자 되기라는 시쳇말 처럼, 만일 미국이 고철과 석유를 차단하게 된다면 일본은 네덜란드 령 동인도 제도를 침탈하기 위하여 움직일텐데 그럼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침략 전쟁을 막으려면 석유와 고철등 자원을 끊어야 하는데 그럼 일본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딜레마는 일본도 안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나날히 늘어가는 전선만큼이나 자원의 수요도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그렇다고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건 언제 석유가 끊어져도 이상할게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하기에 인조 석유를 개발하고 닥치는 데로 시추공을 돌려가며 석유를 생산하고 있습니다만 고작해야 약 1/10 가량만을 생산할수 있었던게 현실입니다,

그 와중에 1939년 2월 사이토 히로시 주미 대사가 현지에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물론 자연사이고 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알아서 정부와 유족측에서 수습하게 될 일이었는데 미 국무성은 화해의 제스쳐로서 중순양함 에스토리아에 유골을 실어 일본으로 보내주었고, 극진한 환대를 받은 승무원에게서 볼수 있지만 미국 그 자체에 대한 우호도는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네 민간에서만요.

무슨 말 인가하면 에스토리아가 미 국무성의 입장을 싣고 태평양을 건너 요코하마로 달리는 동안 일본 제국군은 중국 남부의 섬 하이난을 점령하는데 이 섬은 그 자체로도 철광산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말레이 군도로 진격하는데 요충지였습니다.

그리고 하이난 섬을 점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프레틀리 군도를 점령하는데 당시 일본 제국의 아리타 외상이야 이게 말레이 군도를 비릇한 동남아 일대의 진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해명했지만 그 것을 믿을 서구 열강은 아무도 없었던게 사실이지요.

뭐 이건 그렇다 치고 사실 결정적인 문제는 39년에 벌어집니다, 7월 6일 줄기차게 민간인 거주 구역에 대한 폭격을 받고 있던 충칭에서 그 것도 미 대사관 인근의 미국인 소유의 교회가 폭격을 당합니다, 그 다음날은 미국의 군함 근처에 폭탄이 날아들었고 이는 묵과할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 결과 7월 26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 1911년 부터 근 30여년을 이어온 미일통상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게 됩니다, 물론 이 미일통상조약의 파기가 전쟁으로 이어지리라 예상한 사람도 없고 전쟁을 바랬던 사람도 얼마 안되었던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관계는 주체할수 없었던 것 역시 현실이었지요.

사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얼마간은 일본은 친 서방 국가였습니다, 독일은 중국에 대한 문호 개방 원칙을 지지하여 중일 전쟁을 끝낼것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에게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는가 하면 군수 물자의 수출을 거리낌 없이 행하였지요, 더욱이 1차 세계 대전 이후 실효 지배를 하고 있던 태평양 일대의 영토를 언제 돌려달라고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해군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가 영국과 미국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추축군과의 동맹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육군을 중심으로 하는 찬성파는 추축군과의 동맹이 영국과 미국을 견제하여 그 들로 하여금 아시아로의 침탈을 막을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어땠는가 하면 일본의 남방 진출을 가속화 시킬 추축군과의 동맹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일본은 중국을 비릇한 동 아시아에서의 이권 보장을 요구 하고 있었고, 중국에 대한 미, 일 양국의 입장차는 어떻게 좁혀질 여지가 보이지 않았던 게 현실이었지요.

그리고 1940년 5월 10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합니다, 그리고 그 날 2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하게 되었고 마츠오카 요스케가 외상으로 오르게 되는데 본격적으로 궤도를 벗어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라고 해도 좋을것입니다.

사실상 일본의 전제 주의 정권은 이 시점을 시작으로 내달리게 되니 말이지요, 비단 이 시기부터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만 국민들은 어려운 경제를 이유로 끝없는 근검 절약을 요구 받았고, 노동 운동은 사회악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국가는 정권 유착을 통한 제계를 정부의 손아귀에 쥐게 되었고, 각 정당들은 해체되어 대정익찬회로 통합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대개 극우주의가 팽배해져 뿌리를 내리기 좋게 만들 기 마련이고, 이는 곧 전제 주의 정권을 제지할 내부적인 힘은 고갈된 것이라 봐도 좋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와중에 1940년 7월경 일본 제국군은 프랑스 페탱 정권의 묵인 아래에 북 인도차이나 반도 일대로 진주하게 되는데 이는 미국으로서는 불쾌하기는 하지만 중일 전쟁의 연장선상으로서 딱히 반대할 이유도 없는 그러한 행위였습니다만 그 뒤의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마츠오카 요스케 외상이 생각하는 전쟁을 기피하는 미국이라는 오판 아래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삼국 동맹을 맺게 된 것이지요, 이제까지와 다르게 일본은 확실한 적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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