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일본의 넷 우익에서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그 책임이 미국에 있음을 더 나아가 자신들은 피해자임을 주장할때 흔히들 들고 나오는게 이 헐 노트라 하는 헐 국무 장관의 통첩입니다만 사실은 좀 다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지요,
1889년 제정된 헌법에 일본 제국군의 규모와 전력을 결정짓는 것은 정부가 아닌 천황에 그 결정권이 있다는 내용에서 볼수 있듯 일본 제국군은 다분히 문민 정부에서 벗어난 존재였습니다, 뭐 그도 그럴만 한게 막부를 타도하고 반란을 짓밟아가며 새로운 일본 제국의 탄생에 지대한 기여를 하는가 하면 입영률은 낮은 편이었으나 예비역을 포함한 총 12년의 군 복무 기간은 일본의 근대화에서 빼놓을수 없는 부분입니다, 즉 일본 제국이라는 국가에서 이 만큼 혁신적이고 선진적이며 근대적인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습니다.
그러한 일본 제국군은 다분히 당시에는 경제적, 외교적인 부분을 넘어 민간에 이르기까지 더할나위 없이 친근한 파트너였던 미국의 지원 아래에 1895년 청일 전쟁을 통해 대만을 식민지로 얻고 10년뒤에는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한편 1910년에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등 기대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독일이 아시아에 가진 식민지의 침탈을 목표로 영국과 프랑스와 손을 잡고 전쟁에 참여합니다, 그리하여 칭타오,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등을 차지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1915년 남만주와 동부 내몽고 일대에 있어서의 일본 국익 우선권을 비릇한 21개조 요구를 통해 중국의 이권을 침탈하려 하였는데 미국과의 마찰은 사실상 여기서 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좋을 것 입니다,
미국은 있는 그대로의 중국 그 자체를 두고 이익을 얻으려 한 반면 일본의 최종 목표는 모든 서구 열강 세력의 배제를 통한 아시아 및 태평양 일대의 이익의 침탈이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예상 외의 일이 벌어집니다,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쟁 특수를 통해 경제적 호황을 누리는 한편 여지껏 듣도 보지도 못한 국제 연맹이라 하는 집단 안전 보장 체제가 그 들에게 손짓을 한 것입니다, 즉 문민정부로서는 더 이상 군부의 눈치를 볼일이 없어진 셈으로 일본 제국은 문민정부의 힘이 강해져 일본 제국군의 예산을 삭감하는 한편 국제 연맹에 가입하여 매우 유화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워싱턴 해군 조약에 가입하는 한편 9개국 조약에 서명하여 다른 국가들과 함께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지지하고, 문호 개방의 원칙을 지키며 특권을 요구하지 않음과 동시에 그 들이 부당한 외세의 간섭을 피할수 있게 도와주고 그 들의 자주성을 존중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더 나아가 켈로그 브리앙 조약에 서명하여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기 까지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도저히 태평양 전쟁이 벌어질 일이 없는게 사실입니다, 양보와 타협을 바탕으로 군부의 간섭을 배제한채 자유주의 국가를 향해 나아가던 일본에 미국이 싸다구를 올리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최소한 여타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 제대로 근대화는 커녕 자국의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여타의 국가들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자부하던 일본에 대하여 미국의 이민법은 미국 아니 서구 열강의 시각으로는 도찐개찐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앞서 체결한 워싱턴 군축 조약은 군부 세력을 벼랑끝으로 내몰았고 이러한 문제는 1920년대 침체되어 가는 일본 경제에 있어 수많은 시민들을 선동하여 문민 정부를 그 들 스스로 끝장내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군부 세력은 폭주하게 된 것이지요.
가령 일본 제국이 지원하던 만주의 군벌 장쭤린이 장제스의 국민당과 가까워지는 한편 소련의 시베리아 개발이 포함된 1차 5개년 계획이 시행되는 등 만주에서의 일본의 이익이 침탈당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고 판단한 관동군은 그 유명한 만주 사변을 일으키게 된 것을 들수 있는데, 이 만주 사변의 외교적 후폭풍은 사건 그 이상으로 심각했습니다,
만주 사변 직후 미국은 일본에 강력한 항의 서한을 보내어 향후 만주에 들어서는 그 어떠한 국가도 인정하지 않은 것을 밝혔고, 중국이 국제 연맹에 제소한 이래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따른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 파견으로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가이며 중화민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리튼 보고서가 국제 연맹에 올라가자 일본은 격렬한 항의를 표출했으나 결국 채택을 막지 못하고 일본은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게 됩니다.
외교적으로 불과 2~3년도 채 안되어 이전의 온화한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이 일본과 서구 열강은 극렬한 대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비록 황도파의 몰락이자, 실패한 쿠데타라고는 하나 정부의 주요 기관과 관저를 급습한 2.26 정변입니다.
이 일로 다수의 정부 요인이 피살되는 등 사실상 무너져 내리던 일본 제국의 문민정부는 확실하게 관짝에 못을 박게 되었지요.
그리고 시작된게 바로 중일 전쟁입니다, 여기에서 다루기는 너무나 내용이 기니까 넘어가고 아무튼 이 전쟁은 다들 잘 아실테지만 정말 사람이 어디까지 미쳐갈수 있는지 여과없이 보여주었고 당시에도 꽤나 심각한 사태였던 것은 사실로 앞서 설명드린바와 같이 미국과 일본의 중국에 대한 입장차로 갈등을 키워나가는데 더 할 나위 없는 연료였습니다,
다만 당시에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제지할 방법이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그 무엇도 마땅치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국민들의 여론은 중국을 동정하고 있었으나 참여할 명분도 없고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을 것은 분명한 상황인데다 중립법을 통해 자원을 차단하면 중국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그렇게 된다면 일본은 사실 이미 소련과의 두 차례의 충돌로 남진을 결정지은바 있으나 아무튼 남진을 택하게 될 것이 조셉 그루 주일 대사의 보고에서도 볼수 있듯이 명확한 사실이기도 했습니다만 아무튼 그 걸 막을 길도 당시의 미군으로서는 없었지요.
뭐 이런 저런 문제를 떠나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제 멋대로 돌아가는 일선 부대였습니다, 37년 브뤼셀에서 다른 18개 국가들이 모여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을 진정시키고자 회담을 열었으나 일본 제국은 불참하는 한편 지나사변은 예외적인 문제임을 밝혔다지만 어디까지나 그 건 외교적인 문제이고 실질적으로 미국이 적으로 돌아서는 것은 다른 문제라 외무성에서는 수 없이 군에 미국을 비릇한 열강의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존중하고 지켜주기를 청원했으나 일선 부대에서는 안들려 안보여 였습니다,
셀수 없이 많은 교회와 선교사, 그리고 미국을 비릇한 서구 열강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는데, 이는 일본 제국의 외무성이 미국과의 충돌을 우려하든 뭘 생각하든간에 중국에서 서구 열강을 몰아내고자 하는 일본 제국군의 의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할수 있겠지요.
그러한 문제가 터진게 파나이 호 격침 사건입니다, 미국의 대사관 직원 3명을 비릇한 다수의 민간인이 탑승한, 파나이 호, 스탠다드 석유 주식 회사의 유조선 세 척, 그리고 영국의 포함 2척등 사전에 통지된 민간이들의 철수를 위해 출항한 선단에 대한 일본의 공격으로 침몰한 사건이 사건으로 민간인들 까지 나서서 범국가적으로 적극적으로 사과하고 배상하는 등 간신히 마무리 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