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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코토의 교육 시책 (上)
게시물ID : history_200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0/5
조회수 : 1861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3/13 21:52:15

네이버에서 사이토 마코토의 교육시책 이라는 것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매우 깜찍한 글이 뜬다. 

(1)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2)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3)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半日本人)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어째 총독이 발표한 공식적인 문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상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이 글은, 본 블로그에 방문하시는 분들에게는 무척 익숙한 물건일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에 나온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조선사편수사업 교육시책 지침" 이라는 것 가운데 나온다고 주장하는데[1], 전자에서는 저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며 후자의 문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외 사이토 마코토의 조선 총독 재임 시절 발언이나 관보에서도 저런 문면은 확인되지 않았다.[2] 


본인이 굳이 이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까닭은 두가지이다. 

첫째로, 이 문건은 그 자체로는 단지 문화통치 시대 정책의 실상을 폭로할 뿐인 것 같지만, 실은 위학(僞學)의 논리 체계 안에서 적지 않는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저 문건은 대개 "이마니시류의 환국->환인 조작설", 그리고 "일본에 의한 20만권 분서설" 과 붙어서 나오는데, 독립되어 있을때는 잘 알 수 없지만 저 두 개의 괴론과 합쳐지면 총독이 직접 "조선 사람이 자신들의 역사를 모르게 하라" 고 지시했다는데서, 두 괴론이 주장하는 조작과 분서에 신빙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그런데 이 두가지 괴론- 환국 조작설과 20만권 분서설은 이미 날조임이 밝혀졌다.[3][4] 그렇다면 받침대 역할을 하던 "교육시책" 혼자만 남는 셈인데, 과연 이 위학의 논리를 개발해 낸 사람이 유독 이 글만 정확한 자료로부터 전재했으리라 볼 만한 심증이 가질 않는다. 이것 역시 날조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저 문건은 원래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대개 이런 출처 불명의 글발, 특히 일본이 우리 역사에다 뭔가 조작을 했다는 말이 나오면 그 기원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확인해야 될 것은 다름아닌 문정창의 저서들이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있었다. (........)


"그러한 바 제3대 총독 齋藤實은 그가 부임하기 전 동경에서 단행한 8월 19일의 조선총독부 관제변경에서 총독부 학무국에 편수관 2명을 신설하고 시학관(視學官) 2명을 증원하였으며 또한 그 증원된 자들의 과원(課員)과 보좌가 될 다수의 편수서기 시학들을 증원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에는 편집과가 신설되었으며 다시 1921년 2월 10일의 관제변경에서 총독부에 다수의 편수서기와 시학, 그리고 각도에 26명의 시학을 증원하였다.

진용이 정비된 이 일련의 일본인 교무당국자들은 교과서의 편찬, 학교의 수업, 그 독려 및 감시 등으로서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드는 작업' 을 급히 하는 것이었다.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드는 작업은 지극히 간단용이하다. 

조선인은 과거 10여년간 사립학교, 서당 등 수천~수만의 기존 교육시설을 폐쇄당한 등 배움의 길을 차단당해왔다. 그러므로 문화민족 조선인들은 배움에 관한 갈증이 지심하니, 이때에 학교를 증설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주면 그들은 그 교육의 내용이 여하한 것인가를 가리지 아니하고 달려들어 열심히 배울 것이니, 장차 할, 제국일본의 주입교육, 이처럼 좋은 바탕은 없는 것이다. 

시비와 불화는 빈한 가정과 사회에서 일어나기 쉬은 것이요, 빈곤의 유산을 이어받은 자손들은 그 선대들을 원망하는 심정이 간혹 일어나는 법이다. 

멀쩡한 조선 사람들을 반 일본인으로 만들려면은 

1)먼저 그 사람들이 자기의 일과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들므로써 그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만들고

2)다음 그 모든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추어 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가르치므로써, 조선인청소년들이 그 부조들을 경멸시하는 감정을 이르키게 하며 

3)그리하여 그것이 점차 자아 혐오증으로 발전하게 함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이리 배움에 갈증이 심한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왜곡된 지식을 얻어, 경멸감과 혐오감에 걸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질 것이니, 그러한 때에 장식, 미화, 과장된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들을 소개하면, 그 주입효과 다대할 것이니,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과 첩경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문정창,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 上권 p. 318~319, 粕文堂, 1966>


읽어보면 충분히 음미할 수 있지만, 이것은 사이토 마코토의 발언이 아니다! 문정창이 사이토의 문화통치 정책에 대해서 내린 해석인 것이다. "교육시책" 이라는 표현은 여기에는 나오지 않는데, 같은 책의 中권에서 자기가 쓴 부분을 다시 인용하면서 이것을 "교육시책" 이라고 부른다. 물론 사이토 마코토가 발언했다는 주장은 거기서도 하지 않고 있으며, 자신이 上권에서 기술한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누가 문정창의 글을 사이토 마코토가 내놓은 교육시책이라 둔갑시켰는가? 



재야사학이라 쓰고 날조사(詐)학이라 읽는[5] 인류사적 독극물이 온 나라안에 만연하게 된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하게 말 해 나는 아직까지 이 사람들이 단지 문정창의 초능력[6]에 걸려든 선의의 희생자들일 뿐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날조사학을 확대 재생산한 공범자들인지 확실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선악과 正邪, 흑백을 처음부터 정해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누가 무슨 말을 했고, 누구는 누구의 말을 베꼈으며 무엇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차근 차근히 조사하는 것이 먼저이다. 


서희건. 전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故)이상시. 변호사. 규원사화 진서론의 대표자. 


....일단은 이 두사람의 소행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계속)




***2007년 8월 7일에 원래 쓴 글에서는 문정창의 저서에는 "교육시책" 이라는 표현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추후 확인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 표현은 같은 책의 中권에서 등장한다. 따라서 마땅히 내용을 수정해 둔다. 아울러 이상시와 서희건이 이를 사이토 마코토의 교육시책이라 생각한 것은 일종의 오독의 문제이지 날조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1]DC 역사갤러리, 만주벌판, 2007년 6월 9일 게시물
[2]역갤블로그, 金歷佛, 2007년 6월 18일 게시물
[3]초록불님 블로그, 2004년 8월 8일 포스팅
[4]악질식민빠님 블로그, 2007년 6월 29일 포스팅
[5]악질식민빠님 블로그, 2007년 6월 26일 포스팅
[6]초능력에 대해서는 악질식민빠님이 여러차례 논하신 바 있다. 文學에서 "초능력" 이라는 개념은 그 엄청난 설득력과 연관된다.







옮긴이의 첨언//


조선사 편수회 사업 개요 중 조선 반도사의 편찬 요지


1915년(大正 4년) 7월 중추원(中樞院)에서 편찬작업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조선에서의 역사편찬사업의 제일보(第一步)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16년 1월 중추원 찬의(贊議) 유정수(柳正秀) 이하 15명의 찬의와 부찬의(副贊議)에게 편사 사무를 전담시키고, 3월에는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교수 삼포(三浦周行), 동 대학 강사 금서룡(今西龍) 및 동경제국대학 조교수 흑판(黑板勝美) 3인을 촉탁으로 삼고 동년 7월에 다음과 같이 편찬의 요지(要旨)를 확정하고 당국의 취지를 밝혔다. 


<朝鮮半島史 編纂要旨> 


백반(百般)의 제도를 쇄신하여 혼돈된 구태(舊態)를 개혁하고 각종의 산업을 진흥하여 빈약한 민중을 구제하는 일은 조선의 시정상(施政上) 당면의 급무이기는 하지만, 이들 물질적인 경영에 노력함과 함께 교화(敎化)․풍기(風氣)․자선(慈善)․의료(醫療) 등에 관해 적절한 조치를 집행하며, 조선백성의 지능과 덕성을 계발(啓發)함으로써 이들을 충량(忠良)한 제국신민의 지위에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번에 중추원(中樞院)에 명(命)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게 한 것도 이 또한 민심훈육(民心訓育)의 한 목적을 달성코져 하는데 그 취지가 있다 할 것이다. 


대저 식민지의 통치를 개론(槪論)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식민지 인민을 교육하고 그들의 식견을 향상시켜 주는 일은 그들의 모국에 대한 충성된 사상을 함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반항(不平反抗)의 기풍을 조장하는 결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상례(常例)라고, 지금 그들의 조선 고래(古來)의 역사를 열독(熱讀)하는 일에 편의를 제공하는 결과가 될 지도 모를 이러한 사업은 자칫하면 그로 인하여 그 구태(舊態)를 회상하고 그 일에 연연케 할 자료를 제공해 주는 일에 불과할 것이라고.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과거에 구미(歐美)의 여러 식민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례를 들어 모국과 식민지와는 지세(地勢)가 아주 상이하고 인종 또한 근본적으로 상이하며 도저히 동화융합(同化融合)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국은 식민지의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일에만 급급하고 그들의 행복을 도모하는 일에는 등한한 것이다. 


식민지 또한 모국에 대해 경조화복(慶弔禍福)을 함께 하려는 정의(情誼)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임은 자연의 형세(形勢)인 것이다. 제국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이에 반하여 강역(彊域)이 인접하여 있고 인종이 서로 같고 그 제도 또한 쌍방이 비슷하여, 혼연(渾然)한 일대영토(一大領土)를 구성하고 상호간에 이해휴척(利害休戚)을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인을 방치(放置)하여 그들이 일진월보(日進月步)의 대열에서 낙오케 됨을 돌보지 않는 일은 처음부터 국가의 기초를 공고(鞏固)히 하는 소이(所以)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그들을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지경에 묶어 놓으려 함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있어서는 전연 불가능한 일에 속함에 있어서랴. 


오히려 끝까지 그들을 교화(敎化)하여 인문(人文)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고 일치합동(一致合同)의 단합된 힘으로 제국일본의 앞날의 융성을 도모케 함은 만세(萬歲)의 양책(良策)으로서, 병합(倂合)의 큰 뜻 실로 여기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조선의 인민을 교화함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以上)은 처음부터 그들의 이목을 가리는 계책으로 나와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더 더욱 교화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밝혀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조선인은 여타의 식민지의 야만미개한 민족과는 달라서, 독서와 문장에 있어 조금도 문명인에 뒤떨어질 바 없는 민족이다. 고래로 사서(史書)가 많고, 또 새로이 저작(著作)에 착수된 것도 적지 않다. 


그리하여 전자(前者)는 독립시대(獨立時代: 합병이전)의 저술로서 현대와의 관계를 결(缺)하고 있어 헛되어 독립국 시절의 옛 꿈에 연연케 하는 폐단이 있다. 후자(後者)는 근대조선에 있어서의 일로(日露)․일청(日淸)간의 세력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나아갈 바를 설파(說破)하고, 혹은 ‘韓國痛史’라고 일컫는, 한 재외조선인의 저서 같은 것은 진상을 규명하지는 않고 함부로 망설(妄說)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史籍)들이 인심을 현혹시키는 해독, 또한 참으로 큰 것임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절멸(絶滅)시킬 방책만을 강구한다는 것은 도로(徒勞)에 그치는 일이 될 뿐 아니라, 혹은 그 전파(傳播)를 장려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구사(舊史)의 금압(禁壓) 대신 공명적확(公明的確)한 사서(史書)로써 대처하는 것이 보다 첩경(捷徑)이고, 또한 효과가 더욱 클 것이다. 


이 점을 조선반도사 편찬의 주된 이유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서적의 편찬이 없다면 조선인은 무심코 병합(倂合)과 관련 없는 고사(古史), 또는 병합을 저주하는 서적만을 읽는 일에 그칠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세월이 흐르다 보면 눈앞에 다가오는 당면사(當面事)에만 익숙하여져 오늘의 밝은 세상이 오로지 병합의 은혜에서 연유한 것임을 망각하고 부질없이 구태(舊態)만을 회상하여 도리어 진보(進步)에의 기력을 상실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된다면 어떻게 조선인동화(朝鮮人同化)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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