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보이는 히스파니올라 반도의 서쪽이 아이티(haiti)입니다요!!
선주민들인 타이노족들이 산이 많은 땅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곤잘로요.
미국을 제외하면 백인이 아닌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흑인들이 독립한 나라인데 왜 막장이 되었을까요?
1이섬은 에스파냐인들이
6세기 점령한 이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고, 이후 프랑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반부를 차지하여
생 도맹그(Saint Domingue, Santo Domingo)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18세기에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은 평방킬로미터당 인구밀도가 5명 남짓했을 정도로 인구가 희박했으며 주민들은
소(동물)떼를 쳐서
소가죽을 수출하는 안습한 동네였으나 아이티는 노예만 70만 명에 이르렀고 인구는 지금 경계상의 도미니카 공화국의 7배에 달했으며,
사탕수수 농장을 기반으로 한 경제로 인해 번성해
프랑스 국부의 4분의 1을 조성할 정도의 부유한 식민지였다. 물론 섬 인구의 90%에 해당하는 노예들은 그냥 노예일 뿐이었고 부는 오직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일제강점시대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동양척식회사와 헌병,경찰을 앞세워서 착취한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독립 분위기가 일찍 불거졌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자유 흑인들은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미국 독립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자유 흑인들은 군에서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지위가 계속 떨어지는 것을 눈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프랑스 혁명 초기 혁명주의자들이 만든 국회에 아이티도 의원을 보내게 되자, 자유 흑인들은 자신들도 더 많은 정치적 영향권을 요구, 백인 농장주들과 백인 빈곤층들과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혁명이 시작하기도 전에 자유 흑인 vs. 백인 농장주(들과 그들이 소유한 노예들) vs. 백인 빈곤층이 내전을 일으킨다. 그리고 결국 이를 배경으로 노예들도 불만이 폭발하게 되고 본격적인 혁명이 시작된다. 거기에 프랑스 혁명정부, 그리고 1899년 이후는 나폴레옹과 전쟁중이던 영국과 스페인군도 자메이카와 산토 도밍고(현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아이티를 침략, 자유 흑인, 백인 농장주, 백인 빈곤층, 프랑스군, 영국군, 스페인군이 진흙탕 전쟁을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이 세력들은 딱히 국가/인종에 기초한 대립구도가 있던 것은 아니였다. 영국과 스페인은 필요할 때는 아이티 혁명군과 손을 잡고, 아닐 땐 싸웠다. 그리고 위에 백인 농장주와 백인 빈곤층도 마찬가지. 게다가 자유 흑인들과 흑인 노예들도 자주 싸웠다. 그리고 노예들끼리도 싸울 때도 있었고. 나폴레옹이 대군을 보내 "모든 흑인(자유인, 노예 상관없이)을 모조리 죽이고 다시 시작하자"라는
제노사이드를 선언하고 나서야 힘을 합치게 된다
혁명중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라는 걸출한
흑인 독립운동가의 노력으로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결국 무찌르고 후계자인 장 자크 드살린(Jean-Jacques Dessalines)에 의해 1804년에 독립하였으며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장 빠른 것으로,
흑인이 수반이 되어 흑인정부가 구성된 것으로서는 최초의 사례.
다만 독립후에도
막장 상태가 끝나지 않은 것이 큰 문제. 드살린이
나폴레옹을 흉내내어 황제를 참칭하다 동지였던 공화파에 의해
암살된 후 정치도 혼란에 빠져들었다. 알렉상드르 페숑(Alexandre Pétion)이 이끄는 공화파에 의해 역시 사상 최초의 흑인 공화정부(지금의 아이티 공화국)가 수립되었으나 공화파 내에서도 자기가 왕이라고 하며 분리 독립한 자도 있어 제대로 된 통일은 1820년에나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시몬 볼리바르의 재기를 결정적으로 도와 남아메리카의 독립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허나 정작 자신들이 독립국임을 인정하는 나라가 어디에도 없었기에 결국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 배상금을 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국가 제정을 한 세기 이상 탈탈 털어갔으며 이 경제 압박은 심지어 흑인에 의한 흑인 노예제 부활이란 희대의 병크까지 불러왔다.
결국 배상금은 미군정기 미국 정부가 프랑스의 헛소리를 묵살해 버리고 나서 유명무실해졌지만 정식으로 무효화한 건
1947년에 이르러서 였다. 이로 인한 농업의 몰락, 경제 피폐, 정치 혼란(이후에도 황제를 참칭하는 작자들이 잊을만하면 등장했다.)과 이로 인한 내분, 대국들의 압박 등은 아이티 사람들의 등골을 휘게 했다. 1843년부터
1915년까지 22명의 대통령이 재임했는데 이 중 21명이 암살당하거나 쫓겨났다. 물론 그 동안 아이티는 있는 것도 다 말아먹고 최빈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미군이 점령해서
군정 통치를 했고, 그 시절에 어느정도 재정이 안정되고 국가 체제 정비와 산업화는 이루었지만
쿠데타와 군부 독재라는 혹도 덤으로 딸려왔다. 그리고 산업화도 얼마 가지 않아 완벽하게 붕괴되어 사실상 나라 자체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나 의문인 최빈국으로 전락. 때문에 지금도 미국과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그렇게 사이가 좋진 않다. 미국과 영토분쟁중인 몇 안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현대사
이후로도 막장국가의 수난은 계속된다. 긴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반세기 만에 문민대통령으로 당선된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집권 초기에는 선정을 펼치며 국가 발전과 안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몇년 되지않아 손바닥을 뒤집듯 돌변,
이디 아민 뺨칠 정도의 최악의
독재자. "파파독(Papa Doc)"이 되어 나라를 철저히 거덜냈다. 옆나라의 라파엘 트루히요도 뒤발리에와 비슷하게 독재정책을 감행했으나 트루히요가 도미니카를 개발했다면 뒤발리에는 그것도 아니고 그냥 독재일 뿐이었다. 뒤발리에 독재정권은 아들에게까지 세습되었고 장끌로드 뒤발리에가 민중 봉기로 쫓겨나는
1986년까지 계속되었다.
1991년, 좌파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 Bertrand Aristide)가 선거로 집권했다. 그러다 반년 만에 군사
쿠데타에 쫓겨났으나
UN과 미국 지원을 받아 돌아와서 1년 동안 국정을 수행했다. 그 뒤
2002년에도 선거로 집권, 군부를 억누를 목적으로 군을 해체했으며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견제하고
IMF의
차관제의를 거부했다. 결국
2004년 반정부 무장 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나(상당수는 바로 그 해체된 국군) 아리스티드는 2년만에 다시 해외로 쫓겨났다.
수상한 게 이 나라에 현재 뒤발리에가 돌아와 있는데, 정작 아리스티드가 돌아오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아아티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들한텐 뒤발리에가 아리스티드보다 더 낫다는 것일까? 물론 뒤발리에도 오자마자 고소당한 상태긴 하지만 아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있는 아리스티드보단 정치적인 면에서 사정이 나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털어봐야 털릴 것도 없는 철저한 몰락 끝에 결국 UN이 나서서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어서야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지금도
브라질군이 주축이 된 UN 아이티 안정화 작전(United Nations Stabilization Mission in Haiti/MINUSTAH)이 계속되고 있다. 미 국무부가
북한을 넘는
파탄국가(failed state)로 선언한 지 오래이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에는 대규모의 지진이 국토를 강타했다.
2010년 아이티 지진 문서 참고. 덕분에 잠시 아이티의 인지도는 올라갔지만 그 답이 없는 참상도 금방 잊혀버렸다. 사실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아이티에서 내전이 벌어져 몇백만이 죽건 어떻게 되건 국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게 가장 크다.
2011년 3월 20일,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아리스티드가 돌아왔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남아공 대통령 주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리스티드를 아이티에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 했으나 주마는 이를 무시하고 아리스티드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표들과 함께 아이티로 돌려보냈다. 일부 미국 역사가들이 민중봉기로 쫓겨났다고 주장하는 전 대통령 아리스티드는 공항에서 아이티인 수만명의 대환영을 받았다(그러나 아리스티드를 지지하는 정당은
선거 참여가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과연 아리스티드의 귀환은
제다이의 귀환이 될 수 있을까? 지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