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한국사 4권 한사군의 성격과 변천입니다.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nh_004_0030_0020_0040_0020&fileName=nh_004_0030.pdf#page=68 한군현은 물론 후대 사료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중국의 통제와 관리의 파견 등에 의해 직접적 통제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그러나 낙랑을 제외한 3군이 설치된 후 20여 년만에 폐지되거나 축출되었다는 사실은 이들 군현이 기왕의 고조선 전체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직접 통제를 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이들 가운데 낙랑군만이 위만조선의 일부지역에 한정된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또한 그 존속기간이 길었던 낙랑군에 대해서도 종래에는 초기의 낙랑군의 성격이 소멸될 때까지 시종일관 유지된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낙랑군은 중국의 직접통치를 받는 군현적 성격을 띄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성격은 전한시대에 한정되며, 이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은 중국계 유이민집단의 자치도시적 성격을 갖고 있는 존재였다.
특히 후한대에는 고구려 등의 성장에 의해 더 이상 기왕의 고조선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韓․濊․倭 등의 세력과 朝貢貿易(조공무역) 등의 중계지로서 기능하면서 점차 그 세력이 축소․해체되었다.
그러므로 낙랑 등의 존재는 정치적 의미에서 평가되기보다는 文化中繼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그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박노자 교수가 쓴 칼럼이 있습니다.
낙랑 등 한사군이 한나라의 침략의 결과로 세워졌다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과연 한나라의 머나먼 동북쪽 변방에 가서 정착한 소수의 한인(漢人) 관료, 상인, 장인 집단이 고구려 등 토착세력의 습격을 받으면서 주변 예맥, 옥저, 한인(韓人)들을 “억압·수탈”할 능력이라도 있었겠는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사학자들에게 낙랑의 중심지가 경성이나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와 같은 것으로 상상되기 쉬워겠지만, 근대 제국주의 국가 일본과 달리 전근대의 제국 한나라는 한반도 북부와 같은 변방들을 체계적으로 통제·수탈할 능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한사군이 한 제국에서 외군(外郡)으로 분류돼 토착민들의 거수(巨帥)와 그들의 ‘공물’을 받고 비슷한 가치의 사치품 등으로 갚아주는 관(官) 무역을 해도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토착민들에게 인두세를 징수하거나 노역에 징발할 수 없었다.
외부 세력의 정복이란 늘 인명 피해를 수반하는 비극적 과정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문화 교류와 인구의 혼합화가 이루어져 더 복합적인 문화로의 길이 열린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침략을 긍정할 일도 없지만 전근대에 ‘우리’ 영토 안에서 많은 ‘외부인’들이 살았다는 것을 전면 부정하거나 ‘수탈적 식민지’라고 규탄할 필요는 없다.
결국 온갖 사람들이 장기간 섞여야 위대한 문화가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낙랑의 남은 인구가 고구려에 흡수돼 고구려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도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낙랑군에 대한 글들을 보면 대부분, 낙랑군의 성격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낙랑군의 위치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낙랑군을 한나라가 설치한 조선에 대한 식민지로만 바라보는 관점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관점은 조선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했으니, 명의 속국이라고 바라보는 관점과 매우 유사합니다.
주류 사학계는 이미 낙랑군을 식민통치기지가 아니라, 문명의 중계지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유사사학을 선호하시는 분들도 관점을 달리 하면,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해서,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타율성론을 뒷받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배달민족이 한족을 공격하여 점유하고, 그래서 우리가 1등민족이고, 그들이 2등민족이라는 걸 입증하는 것보다는,
고대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문화를 발전시켜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게 더 미래지향적이고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사실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