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쌓으면서 인간제물을 바치려는 상나라 사람들의 모습. 갑주를 입은 자는 귀족 무사, 뒤쪽의 도끼를 든 자는 제물로 바칠 사람의 목을 치는 부월수다. 머리를 풀고 윗옷을 벗긴 남자는 제물로 잡혀온 이(夷)족. 동쪽에서는 이족이고 서부에서는 양치는 유목민들인 강(羌)족이 주된 희생양.
상나라는 훗날 멕시코의
아즈텍 왕국과 마찬가지로
인신공양을 즐겨하였다. 인신공양에 대한 내용과 방법은 갑골문에 자주 나오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역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히 설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볼 수 있다.
인신공양은 주로 노예나 강족과 같은 다른민족의 포로를 잡아다가 죽이는 방법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으로 했다고 한다. 물론 적당한 제물이 없으면 자국민이라도 봐주는 건 없었다. 이렇게 제사로 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12가지가 되었다는데, 목베기뿐만 아니라 허리 자르기, 때려 죽이기, 사지를 찢어죽이기, 삶아죽이기, 물에 빠뜨려 죽이기, 태워죽이기, (땡볕에 묶어놓고)말려 죽이기, 등 온간 잔악한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은주왕
제신이 포락지형같은 혹형을 만들었다고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점은 사기의 기록이 약간 잘못된 것으로
딱히 제신의 대에 들어서 포악한 방법을 쓰기 시작한게 아니고 원래부터 상나라가 잔악무도한 짓을 많이 했다. 오히려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제신은 어느 정도 인신공양을 줄이려 한 듯 하다.(…) 포락 등의 기록은 상나라의 잔학한 풍속이 전설로 남아 제신의 전설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포락 같은 전설은 실제 고고학과 갑골문으로 나타난 상대의 잔악한 짓 일람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인신공양이 되는 노예는 눈을 멀게 하고 무릎꿀린 뒤 밧줄로 묶었으며,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원래 노예를 뜻하던 문자였는데 상형문자로 눈(目)을 상처내어 멀게하는 모양을 뜻한다고 한다. 거기다
순장도 공공연히 벌어졌는데, 그냥 묻는 게 아니라 죽어서도 생각을 못하고 명령에 순종하고 부림을 받도록 머리를 잘라버리고 묻었다. 결국은 상나라의 멸망도 아즈텍 왕국의 멸망과 마찬가지로 이런 잔혹한 인신공양에 분노한 주변 민족들이 모두 주나라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나라 시대에도 상대와 비교해서 비교적 줄어들기는 했지만 인신공양이나 순장 등의 악습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에도 유가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는 가운데 이따금 보이다가 통일 진나라에 접어들면서 일반적으로 사라진다. 허나 정작 진시황 자신의 무덤에는 대규모의 순장을 했고, 오랫동안 사라졌나 싶었던 순장은 원나라 때 부활하면서 명나라, 청나라 초기까지 이어진다. 수많은 중국 황제들이 죽을 때마다 순장으로 인해 많은 후궁, 신하들(주로 정적 처리 수단)을 같이 무덤으로 끌고 들어갔는데, 이거 때문에 명나라에 후궁으로 보낸 조선 여인들이 순사당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황제 뒷담을 까기도...
밀림 사이에 있는 도시 국가+주변의 이민족들+대규모 인신 공양. 아무래도 다른 대륙에서 상나라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문명은 멕시코의
아즈텍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기록에는 상나라의 식인행위도 자주 사료에 나오는데, 이 또한 아즈텍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이하동서설에 기초한 '용봉문화원류'라는 중국 책에서는 아즈텍을 중국과 같은 계통에서 갈라진 나라라고 주장했다.(…) 물론 시간, 공간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다. '정글'에 둘러쌓인 자연환경과, 기술적으로 지배 능력의 한계와 부양 인구의 한계가 있는 고대 도시국가의 한계가 나타나 비슷한 문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외에도 켈트족이나 바이킹족에도 있었고 문명있는 곳이면 있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