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에서 6.25전쟁에 대해서 읽다가 생각나서 만들어 봤습니다. 위에 세명은 아시겠지만 오른쪽부터 이승만,이연(선조),김일성입니다.
김일성:
본격 후퇴 준비는 국군과 유엔군이 잇달아 38선을 돌파하던 무렵인 10월 초순 착수되었다. 10월9일 북한 정부는 평안북도 강계를 임시 수도로 결정한 뒤 주요 기관과 단체 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또 평양 주재 외국 공관은 평안북도의 국경 도시 만포진으로 이전했다. 이틀 뒤인 10월11일 김일성은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는 내용의 방송 연설문을 발표했다. 김일성은 이 때 동부 전선에서 후퇴하는 인민군 2군단에 대해 황해도·강원도 일대의 넓은 지역을 장악하고 유격전을 벌여 ‘적’의 배후를 치라고 명령했다. 전신 연락이 끊겼기 때문에 이 명령은 대대장급 군관을 직접 전선에 파견해 간신히 전달했다. 김일성이 평양을 빠져나간 날은 10월12일이다. 북조선 인민들에게는 피로써 촌토를 사수하라고 요구하고 자신의 휘하 부대에게도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려 사지에 뛰어들게 한 뒤, 자기는 극비리에 평양을 탈출했던 것이다. 평양 탈출로 시작된 그의 퇴각·은신 생활은 중국의 팽덕회(彭德懷)가 이끄는 ‘항미원조 지원군(중공군)’이, 북상한 유엔군을 본격적으로 치고내려간 시기인 50년 12월 말~51년 1월 초까지 이어진다. 출처
UN군의 본래 참전 목적이 방어였던 만큼 38도선을 넘는 데는 UN의 결의가 필요했으며, 이 즈음 북한과 중국이 접촉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UN측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국군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UN군 또한 38도선을 넘었다. 이때당시 김일성은 10월 11일 밤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는 방송을 내고 바로 몇시간뒤 김일성은 몰래 도주했다.그래놓고 니가 이승만 욕할 처지냐?유엔군은 며칠뒤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한국군 최초입성)하였으며, 11월 후순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승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익산(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그러나 전황을 전혀 모르던 국민들은 북한군이 서울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피난을 시작했다. 그러자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철교를 예고없이 폭파해 무고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철교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36] 북한군을 곧 격퇴할테니 피난가지 말고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을 믿었던 상당수의 서울시민들은 한강 철교의 폭파로 발이 묶였고 조선인민군은 곧 서울을 넘어 대구, 부산,포항 일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안심하라는 라디오 방송 당시 이승만은 대전에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출처
참고로 선조 대사는 선조실록 1601년 3월 14일자의 말입니다. 수정실록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6.25당시 뒷통수 후려치는 지도자가 남북에 모두 있었다는게 참 뭐하네요.
큰 조사를 안해서 김일성에 대해서는 정확성이 조금 많이 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