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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때 경복궁 왜군 방화설
게시물ID : history_199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varez
추천 : 5
조회수 : 177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3/10 19:30:09
http://ch.yes24.com/Article/View/13864
경복궁 방화범을 백성으로 보는 견해는 《선조수정실록》을 근거로 한다.

“거가車駕가 떠나려 하자 도성의 간민姦民이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훔쳤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공사 노비 문적이 있는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우고 궁성의 창고를 약탈하고 방화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일시에 모두 없어졌다.”

왕이 한양을 떠난 1592년 4월 30일자 《선조수정실록》 기사다. 여기서 ‘간민’과 ‘난민’은 노비를 비롯한 하층민들을 가리킨다. 《실록》 편찬자는 질서와 기강이 무너진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런 기사를 썼는지 모르나, 20세기의 후손들은 이 기사를 무사안일에 빠져 국가의 안위를 돌보지 못한 무능한 군주와 지배층을 향해 치솟은 민의 분노로 해석해왔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보다 40여년 먼저 나온 《선조실록》에는 같은 날짜에 그런 기사가 한 줄도 없다. 다만 사흘 뒤인 5월 3일, 왜군이 도성에 입성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으므로 왜군이 종묘에 들어가 머물렀다”고 쓰고 있다. 궁궐이 불탔다는 날짜가 서로 다른 것이다.

경복궁은 과연 누구 손에 불탔을까? 《선조수정실록》과 《선조실록》의 기록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다. 그럼, 당시 텅 빈 한양에 입성했던 왜군 장수들이 남긴 기록을 보자. 다음은 왜군의 선봉대로 가장 먼저 한양에 입성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장수 오오제키大關의 전기 《조선정벌기》의 한 대목이다. 5월 3일에 입성한 그는 경복궁을 처음 본 소감을 적어놓았는데, 그에 따르면 적어도 5월 3일까지 경복궁은 건재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나라 궁전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 후궁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 있었다. …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경복궁의 장려한 위용이 마치 진시황의 궁전 같다며 찬탄하고 있다. 이튿날인 5월 4일 오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가 두 번째로 한양에 입성했다. 가토 부대의 종군 승려 제타쿠是琢의 《조선일기》를 보면 이때까지도 궁궐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다른 종군 승려 덴케이天荊의 《서정일기西征日記》에는 사흘 뒤인 5월 7일 “금중禁中에 들어가니 궁전은 모두 초토로 변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궁궐은 4월 30일이 아니라 왜군이 입성한 5월 4일부터 5월 7일 사이에 불탄 것이고 방화범은 백성이 아니라 왜군이 된다.

일본측 기록을 들어서 경복궁 방화의 주범이 조선백성들이 아니라, 일본군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수들의 태도를 봤을때, 고의로 방화했다기 보다는 실수가 아닌가 추측합니다.  
침략군입장에서 깨끗하게 접수한 적국의 궁궐을 소각해야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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