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춘은 명종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때 이조참판을 지낸 사람입니다.
이분의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전기 관료의 녹봉과 "선물"의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선조수정실록의 졸기를 보면 특별히 부패하지도, 특별히 잘나지도 않은 그냥 보통 관리였습니다.
천성이 온화하고 후하여 모나지 않았으며 조용하고 검소하여 마치 빈한한 선비처럼 처신하였다. 다만 서적을 몹시 좋아하여 음악과 여색에 빠진 것처럼 하였다. 연로해지자 물러가기를 청하면서 사직하는 소장이 간절하였으나, 상은 곧 아끼어 머물게 하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
유희춘이 1년 동안 받은 녹봉은 어느 정도일까. 이를 위해 비교적 중하위직을 지내던 때와 당상관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하던 시기를 비교하여 보도록 하겠다.
선조원년(1568),백미 32섬, 콩(太) 14섬, 보리 6섬, 명주(紬) 4필, 포 12필.
선조 6년(1573),백미 50섬, 콩(太) 16섬, 보리 8섬, 명주(紬) 4필, 포 14필.
이를 미암일기에서 거래되던 물품의 가격으로 1필에, 보리 2섬이 오승목 5필로, 명주(紬) 2필이 미 24말에 거래) 바꾸어 계산하면 1568년(선조 1)의 경우 백미 51섬 정도가 된다. 같은 시기에 공노비로부터 수취한 선상가(選上價)가 26여섬, 지방관이나 친인척들로부터 받은 선물(膳物)이 쌀로 186여 섬, 토지에서의 수확량이 83여 섬이다. 1
573년(선조 6)의 경우는 전체가 81섬 정도가 된다.
이 시기 수확량은 알 수 없으나 선상ㆍ보병가가 104여 섬, 선물로 받은 쌀이 49섬 6말이었다.
당시 관료들에게 녹봉은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국가에서는 녹봉을 관료들의 처우 내지는 생활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지급하지만, 실제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녹봉만으로는 상당히 부족하였던 것이다.
유희춘은 지방관을 비롯한 동료관인ㆍ친인척ㆍ제자ㆍ지인으로부터 물품을 거두어 들이고 있다.
10여 년 동안 유희춘은 2,855회에 걸쳐 선물을 받았다.
이는 매월 평균 42회에 이르는 것이다.
선조 4년(1571) 3월부터 10월까지는 선물을 받기보다는 주는 입장이 되고 있다.
이는 유희춘이 지방관(전라감사, 1571년 3월∼10월)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지방관일 때는 물품을 받기보다는 주는 입장이 된다는사실을 알 수 있다.
유희춘에게 물품을 보내 온 사람의 절반 이상이 지방관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선물의 종류는 곡물류를 비롯하여 면포ㆍ의류, 생활용구류, 문방구류, 치계(雉鷄)ㆍ포육(脯肉)류, 어패류, 찬물류, 과채류, 견과ㆍ약재류, 시초(柴草) 등 일상용품에서 사치품까지 망라되어 있다. 물품의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양도 상당히 많아 이것만으로 생활한다 하여도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나아가 이는 유희춘 집안의 재산증식과 연결되기도 하였다.
근대의 국가경제, 재정은 재원의 소비에 있어서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고, 징수에 있어서도 공적인 징수만이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외에 사적인 징수나 사적인 재원지출은 바로 바로 뇌물이나 공금횡령과 직결되는 문제로 이해된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의 국가경제는 소비와 징수에 있어서 이러한 공사(公私)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혹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재정운영에 있어서 근대적인 관점으로 공적이지 않다고 여겨지 는 것을 모두 부정부패와 연결지울 수는 없다.
16세기 양반관료의 선물수수 행위는 상당히 보편화된 경제운영 체제라 하겠다.
관직을 매개로 한 선물형태는 지방관이 양반관료에게 지급하는 것이었으며, 관직을 배경으로 하고 재원을 지방관아에서 출연한다는 특징이 있다.
선물에 국가가 일정 부분 관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국가 재분배체제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보통 관리가 한달에 40번씩 선물을 받을 정도면, 선물없이 관리들 생계유지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선물없이 녹봉을 두둑히 주는 편이 더 합리적인게 아닌가 합니다만, 그건 현대에 사는 제 편견이라고 믿으면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