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되면 한도 끝도 없지요.
조선시대 상피글을 읽다보니 여기에 김영란법에 대한 댓글을 보고, 그 김영란법을 찬찬히 읽어보던 저는 이거 공직자는 정말 숨만 쉬고 살라는 소리네, 어 그런데 이렇게 엄격한 적용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지? 그런데 공직자들은 국가에서 월급받고 그걸로 생활하고 조선시대 관료대신들도 현대 공직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우받으면서 살았다니까 비슷하네? 하지만 지금 공직자들 연봉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하는데 게다가 조선시대 관료들도 연봉은 더 짰다고 하는데 지금보다 얼마나 더 짰을까...(헥헥...)
여튼 이때 관료들은 얼마나 받고 산거지? 막 이렇게 생각이 마구마구 들어서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기 링크를 타고 본 결과, 당시 군인들은 원칙대로라면 전쟁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군요.
당시 군인들은 국가에서 피복 전체와 제식 무기를 현대처럼 일괄 지급하는게 아닌, 자비 충당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보병은 총포상 가서 수백만원 짜리 소총을 사야하고, 기병은 군수공장 가서 전차나 장갑차 사와야했다는 것이겠지요. 야 신병! PX 가서 총사와! 라는 말이 과거에는 진짜였을지도 모르겠군요. 여튼 이 비싼 무기들을 자기 돈으로 한번에 현찰 박치기도 아닌 십수년 할부로 구입하지 않았을까......라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리고 저 도표를 현 도량형이 아닌 과거의 도량형 기준으로 환산해서 보니까 이거 정말 답이 안나오네요.
조선시대 도량형 기준으로 봤을때, 일단 조선시대 남성 한명이 밥먹는데 드는 쌀 끼니는 7홉이었고, 이는 거진 1되 수준입니다. 1되=10홉이니까요. 그리고 1말은 10되, 1섬은 15말에서 20말을 왔다리갔다리 합니다. 저 시대 기준으로 받은 녹봉은 한달 아니 한주도 되지 않아서 병사 한명의 뱃속에서 고스란히 소화되는 겁니다. 무기 값은 이건 뭐 상상도 못하는군요?! 게다가 저 병사 한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병사들의 식구도 있을터......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국방의 책무를 양쪽 어깨에 걸머지고 비싼 군복과 무기 값을 양손과 두 다리에 매었을 조선의 군인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웁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선의 군인들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고된 책무에 따른 초인적인 힘이 아니었는지?!
낮에 박천군에 이르니, 평양에서 온 사람이 말하기를,
“어제 윤두수ㆍ김명원이 장사 4백여 인을 얻어 밤에 강을 건너 적의 병영을 돌파하여 들어가 적을 많이 죽였습니다. 다만 새벽녘에 싸움을 돋워 일진일퇴하면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을 적에 날이 이미 밝았고, 적의 대군이 밀려들어와서 우리 군대는 질서없이 배를 타고 건너는데 적이 추격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장사 임욱경(任旭景) ㆍ민여호(閔汝虎) 등이 대동강변에 이르러서 적 한 놈을 거꾸로 잡고 좌우로 마구 휘두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습니다. 격살한 적이 10여 명이나 되었는데, 끝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도원수는 연광정 위에서 이것을 목격하고 통탄하면서 대대적으로 밤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가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일록 2(壬辰日錄二)
선조 25년 6월 15일
정말 의지의 조선군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군인도 군인이거니와 관료 대신들의 녹봉 표를 환산해서 보니 정말 눈물나는군요. 당시 가족들이 지금처럼 핵가족도 아니었을텐데 말이죠. 정말 밥만 먹고 살아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과거 급제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네요.
정말 저 녹봉이란 것은 "너님은 이제 국가에서 임명한 관료란다. 이것은 너가 관료라는 증거로 주는 것이란다~" 라는 증표 이상의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물론 이는 저 정보들에 따른 지극히 저의 주관적인 고찰이니, 다른 분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듣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