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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열다섯번째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99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미봤다
추천 : 5
조회수 : 107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3/09 17:34:14
3월 26일은 안중근의사께서 돌아가신지 104주기되는 해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안중근의사의 총에 맞아 뒈진 색히가 누군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일본에서만 4번의 총리를 지내고, 한국의 초대 통감을 역임한 그는

한때 일본 천엔 화폐에 인물이 박힐만큼(한국으로 치자면 세종대왕 급이겠네요)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1.jpg



안중근의사의 세발 총알에 이승과 빠이빠이한 이토히로부미....

거물 원숭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2.jpg



1841년 10월 16일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거물 원숭이 한마리가 태어남.
          본래의 성은 하야시(장군의 아들 하야시 아님)로 농민의 아들이었음 
          이색히 아빠는 <조슈번>의 주겐계급으로 사무라이의 신변을 돌보고 잡일을 담당했던 계급임

          이색히 아빠가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꿈
          나중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사무라이 밑 계급)가 되면서 이색히도 무사 신분을 얻게됨
          아무튼 시작은 미천한 신분이었음

1856년 14살. 이색히도 드디어 <조슈번>의 잡역을 맡게됨 

1857년 15살. <조슈번>에서 사무라이들 똥꼬를 핥고 있을때 
          이색히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봄 
          구루하라 료조는 이색히를 <요시다 쇼인>에게 소개시켜줌
          
3.jpg



          <요시다 쇼인>은 <죠수번>과 함께 꼭 짚고 넘어가야할 인물로 
          미우라 고로(민비 시해)
          가츠라 타로(쪽바리 총리)
          오시마 요시마사(현 쪽바리 총리의 고조부)
          야마가타 아리토모(쪽바리 총리)
          이토 히로부미(초대 총리 겸 일본 헌법의 아부지)
          등을 길러 낸 인물로
      
          정한론(한국을 쳐서 아시아로 나아가자는 이론)의 대표주자이며
          아베 신조(현 쪽바리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임

          <요시다 쇼인. 1830~1859>의 얘기를 잠깐 하자면..
          일본 하기시(당시 나가토국)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남
          21살되던 1850년. 번주의 허락을 받아 큐슈로 유학을 떠남
          유학 중 아편전쟁의 전말을 알게되어 큰 충격을 받음(아마 서양세력의 힘에 놀랐던거 같음)
          1851년 에도로 가 서양의 학문을 배움
          무단으로 번을 이탈한 죄로 처벌 받을 뻔했지만, 번주의 도움으로 다시 에도 유학길에 오름
          1853년 미국의 페리함대가 내항했을 때 미국 함대의 정세를 파악하고 미국의 힘을 깨우침
          외국이 일본보다 쎄고 좋구나를.. 느낀 요시다 쇼인은 외국 유학을 결심함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위해 내항한 미국함대를 이용해 밀항을 꾀하다 실패하고 붙잡힘. ㅋㅋㅋㅋ
          투옥된 후 고향에만 있겠다고 맹세하고 하기시로 다시 내려옴 ㅋㅋㅋㅋ
          하기시에서 지이름으로 쇼카손주쿠라는 서당을 열고 하급무사들을 교육함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카 아리토모, 오시마 요시마사, 가츠라 타로, 미우라 고로 등의 인물을 길러냄
          1858년 막부가 일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일수호조약을 체결하자 
          열렬한 일왕빠였던 요시다 쇼인은 마나베 아키카쓰를 암살하기로 계획을 짬
          하지만 계획이 드러나 막부에 붙잡혀 
          1859년 사형당함. 
                   

1857년 15살. 이 색히는 이런 <요시다 쇼인>을 만나 그의 문하생으로 공부를 시작함 
          하지만 신분이 미천하였던지라 동료들에게 왕따와 구타를 당하면서 자랐으나
          <요시다 쇼인>이 이토의 재능을 알아보고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함

1859년 17살. <요시다 쇼인>이 막부 요인 암살음모에 연루되면서 처형됨
          이토는 이때 첫번째 충격을 먹고 존왕양이(왕을 받들고 오랑캐를 섬멸한다) 사상을 견지함 
          이토는 이때부터 막부를 타도하고 일왕을 추대할 것을 주장

1863년 21살. 막부 요인 암살에 가담하고, 막부의 스파이를 처단하는 등
          존왕양이 활동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임
          이때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아시가루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됨

1863년 21살 <조슈번>에서 이루어진 영국 유학생 5명 선발에 한명으로 지목됨 
          영국 런던에서 영어를 공부했고, 박물관 및 영국의 성, 해군 시설, 공장 등을 돌아보며 두번째 충격에 빠짐
          이때 이토는 영국과 일본의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됨
          
1864년 22살. <조슈번>과 외국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귀국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 
          이때부터 이토는 <조슈번>에 존왕양이 노선을 중지할 것을 건의함

1864년 22살. <조슈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호의적인 자세를 취하자
          다시 막부 타도에 목표를 두고 막부 세력 타도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함
          결국 이 쿠데타는 성공하고 일왕 친정체제 구축에 성공함 
          막부 세력과 지방의 다른 번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하고 전권을 일왕에게 양도 
          이게 곧 메이지 유신임

          이때부터 이색히는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함

1885년 43살. 이색히의 기막힌 운빨과 세뻑으로 드디어 초대 총리가 됨(첫번째)
          초대 총리로 있으며 헌법 및 일본법의 초안을 완성함

1888년 46살. 일왕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됨

1890년 48살. 일본의 의회를 구성했던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
          마쓰가타 총리가 물러나고 5대 총리로 취임(두번째) 
          청일전쟁을 지휘하고 청나라와 강화조약을 체결함
          한편 이색히가 총리로 있는 동안 이색히가 임명한 <조슈번>의 후배 미우라 고로가 한국에서 을미사변을 일으킴

4.jpg

<민비 시해의 주범, 미우라 고로>


1896년 54살. 5대 총리 사임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감

1898년 56살. 1월 귀국 후 다시 7대 총리로 임명, 6월에 사임(세번째)

1900년 58살. 다시 10대 총리로 임명(네번째)
1901년 59살. 총리 사임

1903년 61살.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 
1904년 62살. 러일전쟁 개시를 결정
          같은해 3월. 서울을 방문해 고종을 만나고 일본에 협조해줄것을 요청. 아니 강요.

1905년 63살. 고종과 대한의 각부 장관들을 위협해 을사늑약 강제 체결

1905년 63살. 을사늑약 체결 후 <박중양>과 <배정자>를 대동하고 수원 관광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원태우>가 던진 돌에 맞아 대가리가 터짐. 전치 5주의 부상을 입고 입원
         
1906년 64살. 조선총독부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

1907년 65살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을사오적(교욱부장관 이완용 
                                                            국방부장관 이근택
                                                            내무부장관 이지용 
                                                            외무부장관 박제순 
                                                            농림수산기획재정부장관 권중현)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짬

1907년 65살. 7월 1일.
         일본 외교부에서 이토 앞으로 한장의 편지가 날아옴
         편지의 내용은 
         <한국 황제의 특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한국이 일본과 맺은 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음>  - 즉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 65살. 7월 3일 오전.
         이토는 총리 이완용을 자기 집으로 불러
         "야이색히야, 또 이런 짓 할래? 함만 더 이라면 전쟁이야!" 라며 추궁

          이토의 추궁에 이완용은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호소함
         
          7월 3일 오후.
         고종을 찾아가 또 책임을 추궁
         "고종 양반. 함만 더 이라면 진짜 전쟁이야!"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책음을 전가시키며 물러날 것을 요구
         고종은 처음에 거부하다가 결국은 이를 수용

1907년 7월 고종은 자리에서 물러남
          고종퇴위식에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장관 박영효는 고종퇴위를 반발하며 병을 핑계로 행사에 참석하지 않음
          이때 이완용은 스스로 궁내부장관 서리가 되어 퇴위식을 진행함

1909년 67살.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추밀원 의장에 다시 임명

1909년 67살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림
          대한제국의 의병 참모 중장 안중근에게 저격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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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번 헤이그에서 열리는 한미일 삼자회담이 좀 불편한게....

아베신조는.. 그간 그의 행적을 통해 드러나듯이... 역사적 행보가 뚜렷한 인물입니다.
   - 총리 임명 후 <조슈번>의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참배
   - 야스쿠니 신사 참배 후 강한 일본을 되찾겠다며 연설
   - 위안부, 난징대학살 등은 날조이며 거짓말이라는 NHK 관계자의 말에...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며 언급
   - 도덕 교과서에 <요시다 쇼인>을 실으며 그의 철학과 신조를 강조

헤이그는.. 이준열사가 분신한 곳이기도 하며 한국인에게는 뜻깊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박극혜 댓통령께서 과연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알고 회담에 임할 것인지.. 의아스럽습니다....

헤이그에서 잃어버린 한국인의 위상을 다시 되찾고 오시길 빌겠습니다....(가능하시겠습니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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