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태화관이라는 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 중 나는 만해 한용운 선생에 대해 쓰도록 한다.
한용운은 고종 16년인 1879년 8월 29일에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에 가출하여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홍주감영 관군의 중군이 되어 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참여한다. 1895년 또는 1897년에 고향 홍성을 떠나 인제군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1896년 하산하여 더 큰 세상을 배우고자 시베리아행을 결심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을 고비를 겨우 모면하고 1897년에 귀향하였으나 거처가 없던 그는 1901년 처가에서 2년간 은신하다가 가출한 후 나중에 다시 재출가를 한다.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한용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한용운이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백용성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피신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한편 그는 자수하기 직전의 민족대표자들 중 체포된 뒤 고문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민족대표자들을 보고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끼얹었다 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체포되기 전 한용운은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퍼부었다."고 한다.
1927년 2월에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간회 조직을 결성하는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