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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바둑史 2-3 (브금)
게시물ID :
sports_50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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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rlfl
★
추천 :
19
조회수 :
1638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1/09/17 08:00:35
2부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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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2편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umorbest&no=388265&page=3&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388265&member_kind=
대삼관 (大三冠) 당시 세계 바둑계를 독주하던 일본에서 그 권위를 따질 수 없는 세개의 기전 기성(棋聖). 명인(名人). 본인방(本因坊) 단 하나의 타이틀만 획득하더라도 일본 바둑계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 정도. 더구나 1961년 시작되어 1977년 기성전이 창설 되기 전까지 일본 바둑계 프로기전 1위의 역사를 자랑 하는 명인전은 그야말로 꿈과 같은 것이었다. 당찬 조치훈의 발언에 한국 바둑계는 어떨지 몰라도 일본 바둑계에선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명문 기타니 문하라곤 하지만 그는 수많은 기대주 중 하나일 뿐. 그만큼 일본 바둑계는 탄탄했고 뛰어난 기사들이 넘쳐났다. 한국 바둑계에선 태어난 순간 황태자였던 조치훈이지만 일본에선 아직 가야할 길이 너무도 많이 남았다. 날개를 펼치다. 스스로 목표를 정해둔 덕일까. 아니면 고바야시와의 경쟁 때문일까. 프로 기사층이 탄탄한 일본에서 조치훈은 매해 꾸준한 승리를 거둬 나간다. 1973년 30승11패 1974년 33승9패 일본 바둑계는 조치훈과 라이벌 고바야시를 주목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75년. 제12기 프로십걸전 우승. 최연소 공식 타이틀 획득. 조치훈의 이력에 첫 우승을 새겼다. 1976년 왕좌와 79년 기성(碁聖-랭킹 7위의 기전,棋聖과는 다름)의 타이틀까지 획득하며 8단에 승단한다. 젊은 기사들 사이에선 독보적인 모습. 더이상은 유망주가 아니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성장. 그의 실력에 일본바둑은 오히려 9단의 승단을 제의 했을 정도였다.. "실력으로 딸것이다." 조치훈은 딱잘라 거절했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 나이. 엄격한 승단 제도의 일본에서 젊은 나이의 조치훈은 어느새 거목이 되어가고 있었다. 꿈에 도전하다. 한번탄 기세는 꺽일줄 몰랐다. 1980년. 명인(名人)전. 23살의 조치훈은 반상 앞에 앉았다. 명인. 오다케 9단. 도전자. 조치훈 8단. 7전 4선승제, 둘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 오다케가 갖고 있던 기성(碁聖)전의 타이틀은 조치훈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래서였을까. 도전자를 바라보는 명인의 눈가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뭇 비장한 분위기. 일본측은 아무래도 내심 오다케 9단의 승리를 기대했다. 둘의 승부는 길게 가지 않았다. 5국이 끝난 시점. 일본의 언론은 한국에서온 새로운 젊은 명인과 짧은 인터뷰를 나눴다. "바둑이 없는 전 너무나 무능할 뿐입니다.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지요." 대부분의 프로기사도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조치훈의 말에서 그가 다른 프로기사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이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무능한 저는 다만, 목숨을 걸고 둘 뿐입니다." 외로운 승부사. 오다케를 응원하던 일본의 염원을 잠재우고 꿈에 그리던 귀향을 했다. 금의환향. '그래. 그래도 날 응원 해주는 조국이 있잖아' 고독했던 시간들 만큼 즐거운 기분으로 귀국했다. 내심 만족한 조치훈은 조훈현과의 친선 대국요청도 받아 들였다. 1980년과 81년 두해에 걸친 친선바둑. 첫대국을 승리하고 두번째 대국을 앞둔 조치훈에게 한국의 주최측 인사가 은근히 말했다. "돌을 가리는건 시늉으로 하고...조훈현이 흑을 쥐게 해줄 수 없을까?" 다분히 자국에서 활약하는 조훈현을 위한 조건. 불현듯 울분이 솟구쳤다. 일본인과의 대국에선 일본측을 응원하던 그들처럼.. 조훈현과의 승부에서 조국은 자신의 패배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제가 지길 바랍니까. 어디 두고 봅시다." 한국인으로써 일본에서 활약하는 그는 결국 혼자라는걸 느꼈다. 질수없다. 승리하기 위한것이 아니었다. 지지않기 위해 그의 바둑은 점점 치열해져 갔다. 오직 반상위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그곳에서 패배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를 증명하는 반상의 역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쓰여갔다. 1981년. 자신이 보유하던 명인전 타이틀 홀드. 본인방 타이틀 획득. 역사상 4번째 2관왕. 1982년. 명인전,본인방 타이틀 홀드. 십단전 타이틀 획득. 그리고 1983년. 기성(棋聖). 명인(名人). 본인방(本因坊) 일본 최초 대삼관. 분노어린 그의 아성에 일본 바둑계는 숨죽일 뿐이었다. 신의 질투. 거칠것이 없는듯 했다. 한숨 쉬어가라는 배려일까. 무너질것 같지 않던 모습에 시기를 느낀 것일까. 1885년. 5연속 우승후 명예 명인의 자리까지 올랐던 명인전의 타이틀. 고바야시에게 넘겨 주고 말았다. 3승 4패. 본인방은 린하이펑에게 넘어갔다. 3승후 4연패. 마지막 자존심은 기성(棋聖) 뿐이었다.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나 신은 아직 그에게 준 시련이 너무나 미약해 보였나 보다. 1986년 1월 6일 밤 11시30분 기성(棋聖)전을 코앞에 둔 조치훈은 선뜻 잠에 들지 못했다. 출출하던 차. 야식을 살겸 집을 나선다. 우동을 사려던 찰나. 바로 옆에서 달려가던 오토바이 한대가 쓰러졌다.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조치훈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려 달려갔고... 뒤에서 달려오던 봉고차 한대. 조치훈과 쓰러진 오토바이를 그대로 받아 버린다. 응급실로 수송된 조치훈은 고통속에서도 마취를 거부한다. 곧 다가올 기성전에서 감을 잃을 것을 걱정한것. 도대체 자신의 몸 상태를 알기나 한 것일까...4시간 동안의 마취없이 수술 진행. 오른쪽 다리의 정강이뼈가 골절해 밖으로 튀어나갔고 왼 무릎의 인대가 끊어졌으며 왼 손목은 부러졌다. 수술후 두 다리와 왼손에 깁스...전치 6개월. 그야말로 만신창이. 1차전 기권. 마취 없이 진행된 수술 이었다. 전치 6개월. 온 몸의 골절로 느껴지는 고통. 그러나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팔이 잘려나가도 좋다. 다리가 잘려나가도 상관 없었다. 지금 그가 느끼는 고통의 근원은 기성전 1차전 기권이었다. 두지 못한 1차전에 조치훈은 오열했다. 의사는 미쳤다고 했다. "그 꼴로 어떻게 바둑을 두겠다는 겁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의사가 말했다. "신은 나에게 바둑을 두라고 하시는 군요. 보세요. 아직 나에겐 생각 할 수 있는 머리와 바둑돌을 잡을 수 있는 오른 손이 있지 않습니까." 주위의 만류에도 조치훈은 말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심각해진 것은 의사 쪽 이었다. 아무리 간곡히 만류해도 2차전에 나서겠다는 조치훈. 완고한 조치훈은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나 처럼...목숨걸고 둘 뿐입니다." 3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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