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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호한체제의 전개와 구조 - 박한제
게시물ID : history_197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량011
추천 : 6
조회수 : 476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2/22 14:56:55

이 글은 박한제 교수님의 논문 "호한체제의 전개와 구조"(제 맘대로)생략 및 요약해서 정리해 본 내용입니다.

호한체제론은 박한제 교수님이 만들어내어 전세계적으로 인용되는 상당히 유명한 담론입니다만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서는 부정되거나 수정되기도 하는 담론입니다. 이점을 양지하시고 읽으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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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서진의 붕괴 이후에 찾아온 화북지방에 대한 유목민들의 지배는 호한관계로 표현되며 이는 유목민과 농경민이라는 가장 대립되는 생활 풍습을 가진 양 종족의 교우인 동시에 선진문화민족이라는 한족의 자긍심과 그 멸시의 대상인 호족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영가의 상란 같은 극심한 갈등을 낳으면서 동시에 정치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 극심한 영향을 끼쳤고 나아가서 호한 양세계를 포괄하는 수당세계제국의 형성에도 추동력으로서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의 작업 가설로 이야기 된것이 호한체제론이며 여기서 호한체제란 단순히 정치나 제도 뿐만 아니라 양민족이 서로 병존하며 하나의 문화를 형성해 가는 모든 사회 현상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양민족의 충돌이 종국적으로 융합이라는 단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며 물론 이 단계는 수당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호한체제의 구축과 통일체제의 성취가 오호 북조인이 추구해야할 불가피한 과정인 동시에 양체제야 말로 융합단계의 수당제국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본고의 집필 목적은 단순한 호한잡거 속에서 한편이 다른 한편을 일방적으로 멸시의 대상으로 삼는 차원을 떠나 이하의 일원화 (夷夏一元化)라는 양세계의 통합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살피는데 있다.

 

호한관계의 전개

1. 오호십육국 시대의 호한관계

오호십육국시대는 남흉노의 계통을 이은 한의 건국으로 부터 시작된다. 한의 건국가 유연의 당면 목표는 호한야시대와 같은 선우정치의 실현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농경의 중화에서 그들의 선우정치가 문자 그대로 새외(塞外)와 동일하게 진행될 수 는 없는 일이었다.

첫째로 흉노지배층 및 민중이 심한 한화 현상에 직면했으며

두번째로 정권내의 인민구성이 본래의 흉노부중(部衆)보다 육이(六夷) 혹은 잡호(雜胡)로 지칭되는 호족들의 결집으로 구성되었고, 결정적으로 전체 호족의 숫자와 맞먹는 한인들의 존재는 명실히 선우정치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위와 같은 이유를 필연삼아 유연의 한은 호한의 분리된 정책을 수행할 수 밖이 없는 처지에 놓였다. 유총의 집권시기인 314년에 산서 남부의 중추부를 이중구조로 통치하는 방식인 호한분치정책이 대표적인데 이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좌우사예(左右司隸)를 두고 각각 20만 호씩 관리한다. 또 호 마다 내사(內史) 1인을 두어 합계 43인의 내사를 둔다.

둘째, 선우좌우보(左右輔)를 두고서 각각 육이 10만 부락을 장악케 하고, 1만 부락마다 도위(都衛) 1인을 둔다.

이는 좌우사예와 내사를 기반으로한 한족 지배와 선우좌우보와 도위를 기반으로한 호족 지배의 분치체제이다. 이러한 호한 분치는 오호십육국이 거의 공통된 통치형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 같다. 이런 분치는 양세계가 융합되지 않은 채로 병립하고 있었던 특수한 역사적 조건을 반영하는 것임은 틀림이 없다. 호족을 통치하는 제도는 기본적으로 군사통솔 혹은 징집의 단위로도 사용되기에 대선우 이하에 의해서 통솔되는 호족은 '종실적 군사봉건제'를 구축하였고 이는 오호십육국 붕괴의 주된 이유가 된다. 한족의 통치는 분명 한족의 제도를 취하고 있으나 그 주된 등용자는 호족일색이었다.

반면 석륵의 후조와 모용외의 전연정권의 상황은 달랐다. 석륵은 애초에 소규모 부족민 출신인 관계로 그 권력 기반은 부락이 아닌 집결된 군도집단(흉노와 갈족 등 잡호 및 한인 등)에 근거하였다. 이 같은 권력 구조는 한인 사족의 참여를 가능케 하였고 이는 자연히 한인에 대한 대우와 등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휘호율(徽胡律)로 대변되는 한호간의 차별은 존재하였음을 확인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현격한 차별은 후조정권의 한계로 정권 와해로 귀결된다.

전연 또한 석륵의 경우처럼 같은 이유로 한인에 대한 대우를 시행했다. 특히 북방에 잔류한 한인들의 조국인 동진에 대한 근왕정책을 채용함으로서 동진으로부터 북방 한인에 대한 위탁통치권을 부여받아 이 상징적인 권리로 한인유민에 대한 초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역시나 모용정권도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음은 전연의 멸망에서 확인 가능한 것이다.

  앞서서 말한 오호전기정권(五胡前期政權)에서는 양족간의 모순의 강도는 각 정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과제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호한의 갈등을 얼마나 봉합하느냐에 따라 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인데 이는 천하통일의 전제가 되는 일이었다. 이로서 호한체제와 통일체제간의 밀접한 관계가 상정될 수 있다. 천하통일은 오호의 군주들에게 중요한 과업이었으나 이적(夷狄)은 천자가 될 수 없다는 통념이 존재했고 이는 자연히 호족 군주들에게 통일지향은 긴 도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서 전진의 부홍은 특기할만 하다. 앞서 말한 통념에 내가 감히 천자가 되려 하는데 열국을 운위한단 말인가!”라 말하였고 이제 천하를 취하는 것은 한조(한고조)보다 더 쉽다라며 통일천자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이런 부견의 의지는 그의 아들 부건에 의해서 이어지는데, 부건이 장안에 들어가니 민심이 모두 동진을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그는 동진의 실력자 환온를 등용하게 된다. 이로서 이 지역의 한족과 호족이 모두 그에게 귀부하였다는 사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주목할 점은 호족 도 귀부하였다는 점인데 당시의 50년간의 폭정의 연속은 호족에게도 호족정권의 반감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말한다. 그들에게 동진은 초종족적인 정치원리와 체제가 행해지는 이상향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기층에서 양세계가 동일한 피해의식과 집권층에 대한 타자화를 기반으로 통합으로의 방향성을 띄고 있었음을 말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여전히 부건에게는 종실적인 군사봉건제가 넘어야할 산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과제의 해결의 책임을 지고 등극한 이가 바로 위대한 명군으로 기록된 부견이다.

부견은 한인 명재상 왕맹을 통해 내정을 정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종족융합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수재탁수책(隨才擢授策)을 시행하였다.

두 번째, 한인의 관심 촉진을 위해 한화정책을 수행하였다. 특히나 이적은 천자가 될 수 없다는 통념을 거부하고 천자란 덕치의 여부에 달린 것이라 말하며 전한 문제의 치적을 채용하고 있다.

세 번째, 화융지술을 채용하여 호족을 회유하고 작위를 주어 우대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이 바로 부견이 실시한 사민정책과 부락해산 조처이다. 이는 종실적 군사봉건제의 기반인 부락민을 분리하고 이를 해산하는 정책으로 이어서 호족과 본족인 저족을 혼합시키고 호족과 한족의 분치를 포기함으로써 호호간 및 호한간에 종족과 계층의 차이를 초월하는 조치라 평가 된다. 또한 이러한 부락 해산 및 사민은 부락을 소규모로 분해한 뒤 사민하는 정책으로 생각한다면 이들 호족집단이 비교적 한화가 진행된 저족과의 접촉면적이 늘어나 자연스럽게 종족간의 일체화를 도모한 조처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부견은 이러한 조치를 통해 호한간의 갈등을 초월하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초월하지 못하였다. 비수대전의 실패 이후 붕괴는 전진의 사례는 부견이 그토록 부정했던 통념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호족군주에게 도전해야할 대상이 남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영가의 상란 이후 호족정권에 잔류한 한인사족들의 행동 수칙은 언제나 화이관념에 제약되었다. 그러나 모든 한족에게 동일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어서 이들은 자발적으로 호족정권에 참여하거나 한문의 불우한 지식인들이 기존 한인 귀족체제에 반발하여 참여하거나, 서진의 부패한 풍토에 환멸을 느낀 종교 지식인들이 참여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게 작용한 것은 바로 보가와 보신이다. 안지추는 그의 군주 양 원제 가 죽자 그를 따라 죽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유천지처(留釧之妻)는 사람에게 단절을 생각게 하고 격경지자(擊磬之子)는 그 집안을 비창에 빠지게 한다. 소신이 홀로 죽음을 부끄러워하노니

이는 안지추가 취한 보신이 보가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는 어쩔 수 없이 후조에 참여한 노심이 들어나 있다. 결국 이러한 노심과 같이 호족들도 한인민중을 옹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원하는 유덕군주가 되어 화이관념을 무디게 하고 그들에게 사환의 명분을 제공하게 할 수 밖에 었었다. 이러한 노력과 한인사족들의 보신과 보가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호족군주의 한인화와 더불어 한인사족의 초납을 확대시켰다.

 

2.북위국가의 제단계

전진의 망국 이후에 다시 종족간의 권력 구성원리는 부활했고 이는 북위의 건국자인 도무제에 의해서 부락해산과 분토정거(分土定居)를 수행케 하는 이유가 되었다. 한가지 더 추가된 점은 부락민에 대한 족장의 지배권을 박탕하며 동시에 부락민을 편호화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후에 부락민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는 분명 획기적이었고 국가차원에서 본다면 부족연합사회에서 통일국가로의 한걸음 발전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피정복민에 대한 사민정책과 계구수전(計口授田)의 실행은 호호간의 갈등의 완화와 동시에 경제적인 목적 등 양면이 었었음을 부정 할 수 없다.

이후 중원 정벌이 본격화 됨에 따라 산동귀족의 정치 참여가 현실화 되었는데 이들에 의한 국사필화 사건은 앞서 소개한 화이적인 관념에 대한 북위의 도전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임과 동시에 호한관계 전개의 적나라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국사 문제만이 아닌 북인의 한인명족에 대한 철저한 반감의 표현인 것이다.

효문제는 이런 국사사건의 여파로 냉각된 정국 속에서 고윤같은 한인의 한화사업에 대한 기초 작업이 무르익어 갈 때 즉위하였다. 그는 한화정책의 대변자로 곧잘 표현되지만 아직까지도 그는 유목군주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었으며 대신의 반절 이상이 선비인이었다는 등을 볼 때 그를 성급히 한화만으로 과대해석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한화정책의 표본으로 이해되는 성족상정(姓族祥定)을 보자면 이는 외형적으로 무인사회 내부에 문벌제도를 적용시켜 한인귀족과의 공치를 성립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제도는 결과적으로 선비지배층을 선비족 하층민과 제북방민으로부터 유리시킨 조처라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성족상정이 부족세력의 약화를 통한 군주권강화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효문제의 낙양천도의 목적도 비슷하게 판단가능한데, 기존 수도인 평성에 기반한 부족세력과 황제권을 유리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한인적 유습이 남아 있는 전통적 수도인 낙양으로 천도하여 이풍역속(異風易俗)시켜 버려 그들의 기반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고자 한 것이다.

 

호한체제의 구조

1.북위 균전제의 성립과 호한체제

앞서서 소개되었던 제도와 단계들은 호한간의 갈등과 반목에서 융합으로 방향성을 잡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면 본장에서는 융합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구조를 살펴보자.

효문제의 균전제는 토지공유주의와 균분주의라는 두 원칙의 투영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두가지의 사상은 전통 한족 왕조에서 기반한 것이며 그 시원을 찾자면 서주의 정전제에서 찾아질 것이나, 이러한 공유주의나 균분주의는 한과 서진을 거치며 토지의 사유화와 대토지화가 진행되었고 이상향에서나 언급되는 것이 된 것임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전통이 이민왕조인 북위에 와서 부활되었는가? 이는 중국 전통적인 왕토사상과 유목민적인 토지공유사상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은 북위가 수행한 계구수전에서 더욱 확실해 진다. 유목사회에서 호족군주의 기반은 일반적으로 종족에 있으나 이런 기반은 언제나 앞선 오호를 무너뜨렸음은 명백하다. 그렇기에 호족군주들은 부락을 해산하고 비 유목적인 것에서 그들의 기반을 찾았는데 이것이 계구수전이었다. 실제로 효문제의 수전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 토지가 국도 근방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왕권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의미를 확인케 한다. 여기서 계구수전의 독특한 유목민적인 모습을 볼 수 가 있는데, 이것인 균등분배 이고 동시에 군주의 토지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정전제에서 보이는 왕토사상과 균등분배 원칙과 유사한데 발생 배경이 다르며 결정적으로 지급의 대상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둘의 차이를 짐작케 한다. 결국 계구수전이란 유목군주만이 그 정복 과정에서 행할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토지지급방법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계구수전은 공종의 과전제나 효문제 원년의 치전제 등의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균전으로 정착하였다. 앞서서 말한바처럼 균전의 전통은 중국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으나 동시에 이는 호족만의 독특한 토지지급수단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호한체제 융합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2. 북위제왕의 농목적 성격

북위왕권의 군주의 지위를 유목으로 볼 것인가 혹은 농경형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 정권의 기반이나 행동 방향을 의미하는데서 멈추는게 아니라 동시에 정통을 어디에서 두고 있는가 그리고 본고에서는 이것이 호한간의 갈등의 융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련하여 볼 수 있겠다.

북위황제들의 행동 방향은 언제나 친정 -> 약탈 -> 반사 행위로 이어졌다. 자기 관할하의 유목민들에게 약탈한 재화를 분배하여 그들의 충절을 요구하고 통치자로서 인식되고자 했던 것이다. 심지어 효문제도 친정기간 9년간 4회의 친정을 행하였고 그역시 약탈과 반사를 행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이런 유목적인 행동방향은 약화되었다. 즉 부족민들에게 반사할 재물이 계구수전을 통해 얻어진 비유목적인 기반으로 획득되고 이를 반사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반사 행위는 기존에 군사작전에 참여한 장군이나 대신에게 한했던 것에 비하여 재해를 입은 일반 민중에게 진휼이란 이름으로 행하여졌다는 점에서 그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유의할 점은 이러한 진휼 기사가 거의 개창(開倉)되어 진행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의 창고주인은 북위의 왕임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것은 중국적인 전통을 잇는 일면이 있음과 동시에 반사의 주체가 군수였던 호족적인 전통을 계승한 일만도 공유한다.

  이러한 북위왕권의 변화는 분명히 농경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었고 이것은 자연히 왕권의 강화를 가져왔다. 기존에는 부족장들의 대표자 격으로 인식되었던 군주는 더 이상 대선우와 동격이 아니었으며 이제 새로운 왕호가 필요한 지경이 된 것이다. 가한(可汗)이란 명칭은 이에 어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가한은 유목민들의 천자로써의 칭호였다. 그렇기에 가한호를 쓰는 북위의 황제들은 유목민들의 지배자이자 동시에 농경민들의 지배자로서 전통을 자칭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농경과 유목형을 고루 겸유한 농목형의 군주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북위의 대외정책과 호한체제

북위의 대외정책에서 빼먹을 수 없는 것이 대 유연 정책이다. 유연은 흉노에 비하자면 실패한 불발(不發)의 유목제국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북위라는 강자가 존재했으며 동시에 그들이 지배할 수 있었던 유목세계는 북위에 의해 갈라진 반쪽짜리였으니 말이다.

북위는 유연에 끊임없이 북벌을 감행했다. 그 이유야 다양하겠으나 가한호의 참칭해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북위는 유연에 번례(藩禮)를 요구했다. 번례를 행하는 한 가한의 참칭은 용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북위에 잔존한 유목국가적인 성격이 이들의 국제관계를 제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위의 유연 정벌이 단순히 유목 세계에 대한 지배자로서의 갈등만은 아니었다. 그 귀결점은 언제나 대남방정책을 위한 후방 안정이었다. 즉 통일전쟁이었던 것이다. 농경적인 왕조의 행보를 확인가능한데 중국에서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천하 통일은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호족 군주의 지향점이었던 탓이다.

  북위의 대남방정책에서 종종 놓치는 것이 바로 남조의 물산 획득이 목적이라는 점이다. 주로 이런 물산은 방물이라는 이름으로 남조에게 요구되어졌으며 약탈을 통해서도 호시(胡市)를 통해서도 획득되어졌다. 이는 확실히 북위 정권의 유목성을 확인케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역시나 농경적인 모습은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의 통일이었다. 이런 모습은 특히나 효문제의 낙양천도에서 보이는데,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이지만 한편으로 그가 낙양천도를 고집한데에는 통일전 수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통일천하의 수도였던 낙양은 그 정통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낙양은 남진을 하기에 적합한 지형을 가졌기 때문이다.

 

맺음말

본고에서는 중국사상 오호와 북조시대가 가지는 특성인 호한관계의 전개과정 및 그 과정에서 나타는 호한체제의 구조를 검토해 왔다. 필자는 북조의 역사전 전개는 호한문제를 기축으로 움직여 갔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형성된 역사적 실체가 수당세계제국의 기반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오호와 북조시기에 나타는 역사적 전개방향은 종족적으로는 호한의 분리와 반목단계에서 유합내지 일체화의 단계로의 점진적인 진전인 동시에 국가적으로는 통일의 지향이었다. 그 마지막 단계가 수당세계제국이다.

끝으로 본고는 중국중세호한체제연구의 논지를 뼈대로 해서 출간 후 필자의 연구관심의 진전과 전환 부분을 상당히 첨가하였고 북위 균전제의 성립과 호한체제를 첨가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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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책 잡고 정리좀 해보려니깐 머리에 쥐가 나네요;;; 공부를 너무 쉬었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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