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까지는 북베트남의 공식문서 정도에서 언급이 있었고 윌프레드 버쳇 등의 언론인들의 증언, 그리고 한국에서의 일부 증언으로 남아있었다.
지금도 언플로 추정되는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한국어 위키백과를 살펴보면 십수개에 달하는 한국군의 베트남인 '학살'사건에 대해 적혀 있으며 총합 학살 카운트가 무려 수천명 단위에 이른다. 밑의 셋은 토론란이 활성화되지 않은 문서이니 관련된 상세한 해석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조사하고 판단하는걸 권장한다.
이중에서 그나마 근거가 남아있는 것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채명신에게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는 국가임을 자각하라고 권고한 퐁니 퐁넛 사건 정도다. 참고로 퐁니 퐁넛 사건은 미 기록보관소에서 기밀해제된 서류에서 발견한 학살사건이다. 국내 언론사중에선 한겨레가 최초로 문서를 공개했다. 예전에는 여기에 한겨레만 확인한 정체불명의 문서라는 뉘앙스로 서술되었으나, 사실 최초로 공개한 언론사가 한겨레일뿐 복수의 시민단체가 그 존재를 확인하고 공개했다.
링크또 네이버 캐스트, 그 시절 그 이야기에서 한국학살이 언급됐다. 동아일보 출신에 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닌 민병욱 기자에 따르면, 1966년 12월 6일 빈 호아사 꺼우 마을에서 131명을 살해한 것이 83년 외국 언론의 보도로 밝혀졌다고 하는데, 정작
그 외국 언론 보도의 기사 원문이나 링크는 없다.
링크이 문서들을 다 믿기는 힘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단 영문 위키백과등에 올라와 있는 한국군의 학살 관련 항목과 숫자의 근거가 베트남이나 미국측 자료도 아니고한국군이 학살을 했다고 주장하는 꾸준글 쓰는 한국인들 출처다. 그것도 원문 출처 상당수가 구수정과 한겨례 신문이고, 아닌 것들도 대부분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한인 단체 사람들이 쓴 책이거나, 심지어 마을에 조성된 증오비관광비 따위인 식이다. 이 증오비에 대해서는 아래에 설명되는대로 해당 지역이 베트콩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단 지역이라는 배경을 깔고 봐야한다. 게다가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항목을 수정하고 작성한다는 점에서 저 사람들이 자기 글을 퍼나르는 식으로 썼을 가능성도 있다. 하물며 관련된 증언과 문서들은 일관되게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을 '최대한 잔혹하게 살해'나 '여자들을 강간하고 어린아이 배를 가르는'같이 패턴화 된 문장들이 등장하는 구도로, 잔인무도한 귀축 한국군 VS 무고하고 선량한 베트남인들의 희생 구도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듯 한 주장들이 대부분이며, 그나마도 시신이나 학살 현장에 대한 현존하는 증거도 시신이고 당시 잔해고 아무것도 없이 오직 추모비 뿐이다.
참고로 월남전 기간 동안 최고로 유명한 학살 사건인 미라이 사건 당시 사망자 수가 300~500명 추산인데, 이 보다 더욱 큰 규모의 학살을 실제로 한국군이 수도 없이 벌였다면 선전거리 수집과 심리전에 필사적이던 당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 그리고
현 베트남 정부가 자초지종과 학살 규모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대형 사건이 여럿 터졌다면 베트남전쟁 당시에 남베트남 전역에서 한국군 몰아내자는 운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대 사건인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반전여론을 지지하며 베트남 전역을 들쑤시고 다니던 미국 언론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미라이 학살을 예로 들자면
미라이 학살 이후로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이미지는 완벽히 쓰레기로 전락해서 전쟁지속의 의지와 여론마저 바닥으로 끌고 간 사건이다. 학살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런 사건이 벌어졌으면 기밀로 남기는 것도 불가능할 뿐더러 이미 예전에 다 알려져서 이제와서 발견될 것도 없다는 거다.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한국군이 그런 악행을 베트남 전역에서 시도때도 없이 벌이고 다녔다면 이미 진작에 미라이 학살 사건의 여파 뺨치는 대 특종이 되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몇 명의 생존자들과 기념비 혹은 추모비 이외에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될 만한 학살의 흔적은 하다 못해 유골과 전투 흔적 하나 존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부 학살이 벌어졌다는 마을 이름들은 심지어 지도에서 지명조차 찾을 수 없는 마을들이거나, 미국 정부의 극비문서 출신이라는 자료 역시 자료 원본이 진짜 존재는 하는 것인지 입증조차 하지 못한다. 구수정이 밝혔다는 린선사 스님 학살 사건 같은 경우에는
# 정작 한국군에게 누명 씌우기 위한
베트콩의 계략임이 수십년전에 밝혀 졌음에도 지금도 버젓이 사실인양 인용되고 있다.
학살, 즉 현장 부대에서의 우발적 사건까지 부정할 수는 없고, 사실 이런 문제로 소대장으로 보이는 한국군 소위가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기록도 엄연히 남아있다(최종심이라는 설명이 없어, 확정선고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1969년 김종수
소위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로 인해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고, 후에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학살 주장 지역과 주월 한국군 주둔지역간의 관련성이다. 한국군의 경우, 초창기에는 남베트남의 동해안에서도 가장 남쪽 지역에 주둔했다가 서서히 북상해서 전쟁 절정기에는 베트남 중동부, 당시 남베트남 공화국에서는 상당히 북쪽 지역에 주둔하게 된다. 예로 맹호부대가 벌였다는 고자이 양민 학살 사건 같은 경우 그 당시 한국군은 다른 지역에 주둔하고 남베트남군의 관할이었는데 학살이 일어났다던가..
주월 한국군이 동해안 최남단 지역일대에 주둔하던 당시, 그 지역에서는 민간인 학살 같은 사고 이야기도 없고 민간인들의 칭송기사가 나타난다. 그러다가 부대가 북상해 중동부 해안지역에 위치하면서 민간인 학살 기록이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주장되는 학살지역들은 "쾅나이 성" 과 "쾅남성". 특히, 쾅나이 성의 경우 미군들은 그 곳이 게릴라가 매우 많고 주민들도 게릴라에 협조하는 친게릴라 성향이라서 "핑크빌(공산주의자 마을, 해방구)" 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유명한 "미라이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도 쾅나이 성으로 미라이 사건을 벌인 켈리의 소대가 포함된 중대는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없이 부비트랩만으로도 부대원의 상당수가 전사상을 당해 독이 잔뜩 오른 상태였다가 대형 사고를 쳤었다.
쾅나이, 쾅남을 비롯한 베트남의 중부 동해안은 베트남 공화국(당시 북베트남 공화국)에서도 인정하듯 혁명가(공산주의자)들의 산실이라고 불릴 정도로 반골성향이 강했다. 게다가 쾅나이 성의 경우, 라오스를 타고 내려오는 호치민 루트가 처음으로 남베트남의 내륙 평야지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만큼 게릴라는 많았고 게릴라에 협조하는 주민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은 베트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지만 증거도 없거니와, 그럼 협조해서 부비트랩 같은 거 만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유사 지역에서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미해병 선무소대가 이 지역, 중부 동해안의 어느 촌락에서 촌락민을 돕고 숙영을 했었는데 다음날 병사 두 명이 실종됐다. 당장 난리가 났고 미군 수사대가 왔지만 촌락민들이 워낙 순종적이라서 그들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결국 실종자는 시간이 흘러 사망자로 처리된다. 그 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군 유해발굴 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나오면서 탐문을 해보니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이 사실을 밝혔는데, 당시 그 마을은 베트콩 마을이었고, 실종 병사 두 명은 당시 마을 처자 두 명이 해치워 땅에 묻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장소를 안내해 발굴조사 후 유해는 안장되었지만, 그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참가했던 당시 파견됐던 장병들은 자신의 동료를 해치운 마을 처자가 전날까지 매우 친절했던 아가씨였다는 걸 알고 충격을 먹었고 돌아가서 그 사실을 언론사에 소개해서 그것이 기사화된 사건이었다. 그 정도로 쾅남, 쾅나이 성 그리고 그 위쪽으로 비무장지대 쾅트리 성까지 지역은 베트콩이거나 베트콩 협조자인 민간인을 빼면 순수 민간인은 없다고 할 정도의 지역이었다. 이것이 파월 한국군이 주둔한 지역들 중에서, 초창기 주둔했던 베트남 동해안의 최남단 지역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한국군을 칭송하고 이동하자 이동반대 시위를 할 정도였는데, 이후 이동한 중동부 베트남 지역에서는 한국군 증오비가 설치되었던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다. 즉 이들 지역 주민들은 한국군이 뭔 만행을 저질러 증오하는게 아니라 애초에 북베트남에 충성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적인 한국군을 증오한 것이다.
애초에 지역적 성향이나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지역 장악도가 차원이 다른, 미군들이 괜히 "핑크빌(해방구)"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이해할 만한 곳이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는 지역이 되겠다. 즉, 그냥 증오한다는 뜻의 증오비다.
물론 학살사고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한 거짓말이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증오비에 씌여있는 대로 이들이 전부 북베트남군-베트콩과 연관이 없는 무고한 양민이라는 이야기 역시 신빙성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또 한가지, 이럼에도 불구하고 현 베트남 정부(당시 북베트남)가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못하는 것은 승전의 우월함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베트콩이 자리잡던 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그들은 공포심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참고로 이건 미군이 전면 개입하기 전의 일로 당시 서방 각국의 통신사 종군 기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북베트남의 공포심 활용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도덕성 역시 훼손되기에 함부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북베트남이 학살을 적극 주도한
북한 같은 급은 아니었다지만 베트콩을 어쨌든 우군으로 활용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강창성의 일본/한국 군벌사에서
전두환이 양민학살을 주도했다고 증언했다. 이 사람이 전두환과 사이가 안 좋았다는 점에서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강창성은 전두환이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양민을 학살하고 신체 일부를 잘라갔다라고 했는데, 하급부대에서 사실인즉 거동 수상자를 확인도 안하고 묻지마 사살하고 신체 일부를 잘라간 사건이었다. 문제는 사살되었다는 민간인은
살아있었고 해당 지휘관은 고발 조치되어 처벌받았다. 전두환의 예하부대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전두환이 시킨 건 아니다.
문제는 베트남전의 지휘관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광주진압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광주의 학살은 베트남에서 배워온 것..류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당대의 외국 서적들에서도 베트남을 연상시키는 광주의 학살이나 베트남에서 악명높은 공수부대를 광주에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고 일종의 연상으로 벌어진 소문이었다. 하지만 노태우가 사단장으로 있던 육군 9사단은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광주엔 내려가지도 않았다. 애초에 광주에 간 것은 공수부대다. 사실관계가 증명된 걸로 까자. 다만 이런 소문이 난 것은 당시 참여했던 공수부대 탓도 있는데, 이 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 '베트남에서 유방 잘랐다'같은 허세, 허풍을 쳤다. 아래에서 보듯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는 군인이 허세로 '학살했다'고 떠드는 경우는 허다했고 당시 광주에서도 이런 허세, 허풍이 있었기에 그런 소문이 떠돈 것이다.
물론 많은 참전용사들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있었을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베트공과 민간인을 구별하기 힘든 상황에서 일어난 사고거나 개별 병사가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해왔다. 특히, 당시 전쟁에서 공식적인 명령은 백 명의 베트공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민간인을 살리는 것을 우선하라였기 때문이다.
노근리 학살 사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미군은 당시 한국인 중 북한군이 섞여있을 가능성을 들어 이미 민간인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학살사건을 자행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외국에서 수행하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민간인임을 알면서도 학살을 자행하기 쉽게 만든다. 요즘 일본과 민간 토론을 진행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문제를 언급하면 "너희가 베트남에서~"로 많이 대응하고, 이게 기사화된 적도 있다.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은 위에서 나온대로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썩었는지, 당시 일본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던 나라인지, 한국은 어떤 과정을 통해 월남전에 참전했고 무슨 활동을 했는지 등을 조목조목 비교해주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에서 학살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식민시기 일본의 만행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정작 동경 대공습이나 원폭 투하 들먹이면서 잘못 물 흐리는 건 일본 극우들이 잘하더라 다만 개별적인 학살이 저질러진 것 자체는 어느 정도는 사실로 보인다. 1969년 김종수
소위가 민간인 학살 죄건으로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고, 후에 15년형으로 감형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