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글을 써서 결론에 도달하게 되네요.. 마지막이 좀 부실할지도 모르겠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ㅎㅎ
하나의 국가가 산산조각 났다는 말은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상투적인 표현인데, 대개는 그 국가의 국론 분열이나 사회 갈등을 놓고 빗대어 하는 말이다. 그러나 1918년 11월 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황을 표현하고자 하는 데에는 이것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을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황실이 다스리던 중유럽의 제국이 그 수많은 부침을
겪고도 살아남아 번영하던 나라가 이런식으로 사라지게 될줄은 유럽의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록 1918년 4월에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슬라브계가 주도하 피압박민족회의가 열려 중유럽 민족의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고는 하나 그들은 대부분 대표자격이 없는 단순한 망명객일 뿐이었으니,
그 누가 그것을 신경 썻겠는가?
그러나 대전기동안 누적된 인적, 물적피해와 더 불어 서부전선에서는 미군의 합류로,
제국의 전쟁수행의지를 결정적으로 꺽은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이탈리아의 분투는
이 오래된 나라를 '분할하는 자'에서 '분할되는 자'로 만들었다.
1차세계대전 패배로 오스트리아-헝가리만큼 격심함 피해를 입은 나라가 있던가.
독일은 부분적인 영토는 잃었고 비무장지대가 가혹하게 형성되었지만 영토와 국민의 핵심은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세브르 조약으로 시리아-이라크-팔레스타인-요르단을 상실했고 잔존한 영토에서도 가혹한 처분을 받았던 오스만 투르크와 그 후계국가 터키는 다시 체결한 로잔조약으로
영토와 인구의 상당수를 보전할 수 있었다.
뇌이조약의 처분 아래 놓인 불가리아 또한 일부영토를 상실하긴 했으나 영토와 그 인구의 대다수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산산조각난 제국의 파편은 그 자체로 나라가 되거나 승전국들의 조각이 되었다.
1.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는 비록 민족적, 언어적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오랜기간 동안 독자적이었던 체코와
헝가리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던 슬로바키아의 사회-경제적 차이가 확연하게
차이남에도 불구하고 체코계 지도자들의 강력한 주장에 의하여 통합되었다. 슬로바키아는
현대에도 공업국가라고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지만 체코지역은 그 당시에도 공업화가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또한 슬로바키아의 고등교육의 절대적인 부족에서 기인한 민족계급의 부재는
이 국가가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평등한 정합체라기보다는 체코가 슬로바키아를 일방적으로
훈육하는 형태를 취했다. 체코계는 이 국가에서 공무원, 장교, 교사의 절대 다수를 점했고
슬로바키아에게는 목줄을 쥔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1918년 이후 1922년에 미국이 그 어느때 보다 높은 포드니-매컴버 관세를 도입함에 따라
세계의 무역패턴이 붕괴했다. 미국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수출이 급감했고 신생 체코슬로바키아는
그 악순환의 고리에 신음했다. 이에 1930년 미국의 스무트-홀리법을 시작으로 무역장벽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일련의 움직임 -대공황을 타개하려는-보다도 1932년에 대영제국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유무역을 폐기하고 일반 관세율을 10%로 정함으로써 얻는 타격이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것을 시작으로 프랑스를 필두로 한
식민제국이 블록경제를 형성하자 그 여파는 이 신생국가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더욱이 이런 블록경제하에서 인근 국가들이 지역 무역협정으로 얽혀지는 와중에도 체코슬로바키아는
철저하게 견제받았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의 견제를 위해 친불적인 입장을 견지할 뿐만 아니라
이 신생국 아래에도 헝가리인, 폴란드인,독일인등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헝가리,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의 다뉴브그룹에도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의
로마협정에도 가입하지 못했고 악화된 경제사정과 물자부족으로 1932년에는 체코의 석탄과
헝가리의 계란을 교환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스위스 같은 국가를 만들겠다는 체코 지도자들의 의도는 중부유럽의 작은 체코 제국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시절과 달라진 점은 이 작은 제국 안에서 체코인이 주인이고 300만명의
독일인과 100만명의 헝가리인 그보다 소수인 폴란드인이 피지배 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체코와 슬로바키아인 사이에도 균열이 생겼다.
비록 독일인과의 일정한 연정협의에 의하여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궁극적으로 작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되었고 민족문제는 1930년대에 이 국가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베르사유체제로 수립된 많은 독립국 중 유일하게
노골적인 독재를 피한 국가였다.
2.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로 주로 알려진 이 2차대전 종전 이전의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분리된 가장 큰 조각을 흡수했다. 1차세계대전 종전 후의
영토 변화들이 민족적, 역사적 정당성이 부족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이 국가의 탄생만큼
정당성이 부족한 영토 확정은 없었다. 이는 인구의 1/4인 100만명 이상을 전쟁에서 희생한
세르비아에 대한일종의 '보상이었다.
이 국가의 탄생이 정당성이 부족했던 것 만큼이나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보이보디나와 바나트 지방의 헝가리인들이 소수민족으로 남아 헝가리와의 분쟁의 소지가 되었고
알바니아인이 다수인 코소보가 이 국가에 귀속된 것은 알바니아와의 논란거리가 되었다.
또한 최남단 마케도니아 지역의 포함은 이 영토의 역사적 귀속을 주장하는 그리스와
민족적 귀속을 주장하는 불가리아와의 갈등을 낳았다.
-마케도니아인과 불가리아인은 언어적 민족적 차이가 적습니다. 그래서 불가리아에서는 마케도니아를
서불가리아인이나, 서불가리아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국경 밖의 문제보다 심각했던 것은 국경 내부에서의 분쟁이었다. 2차대전기의 크로아티아인에
의한 세르비아인 학살,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분쟁등 세계의 화약고로
악명을 떨치던 이 지역의 분쟁의 씨앗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지고 이 '남 슬라브 인의 땅'에
인위적으로 생성된 세르비아인에 의해 주도되는 작은 제국이 성립된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역시 민족적, 언어적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슬로베니아 지역은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차이가 너무나 명확했다. 서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반하여 세르비아는 정교 국가였고 보스니아는 가톨릭, 정교, 이슬람교도가
뒤섞여 있었다.
새로운 국가의 수도는 세르비아 왕국때와 같이 베오그라드였고 세르비아인들의 축일이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비록 통합 직후에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정체성이 창조되었지만
이는 양쪽 모두에게 외면 받았고 크로아티아인들은 국가 내 가장 큰 소수민족으로서 연방제 헌법안을
지지했지만 이 안은 세르비아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다. 더욱이 크로아티아의 지도자
스테판 라디치가 의회에서 암살된 1928년에 이 국가는 전근대적인 군주정에 기초한 권위주의 헌법이
수립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대(大) 세르비아일 뿐이었고 1918년 부터 10년동안 24차례 내각이 교체되는 동안 단 한 차례의
내각만이 세르비아와 비세르비아계가 비교적 균등한 위치를 점했다.
이 새로운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다른 점은 지배민족인 독일과 헝가리인이 아닌
세르비아인이라는 것이었다.
3.헝가리
헝가리의 영토, 인구 손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구성국이었던 오스트리아에 비해서도 격심했다.
헝가리는 전쟁 전의 영토의 약 2/3를 상실했고 헝가리인의 1/3이 헝가리 국경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헝가리는 전후 베르사유체제의 가장 큰 이의 제기 국가중 하나가 되었지만, 영토와 국민의 상실로
어떤 의미 있는 영향력도 행사할 수가 없었다.
헝가리와 헝가리의 지배 아래 있던 크로아티아는 전쟁 기간 동안 약 340만명이 동원 되었는데
이는 헝가리-크로아티아의 18세~53세의 남성의 대다수가 군복무를 이행함으로써 달성한 수치다.
이중에 헝가리인은 53만 명이 전사하고 140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83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희생자의 수치로는 제국 내 헝가리계가 압도적인 피를 흘렸다. 또한 이런 대다수의 남성이 장기간
전쟁에 동원됨으로써 노동력이 감소하고 물자 궁핍에 시달렸다.
더욱이 패전으로 영토와 인구를 상실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대규모 경제 권역을 상실한
헝가리는 전후 사회체계가 마비되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헝가리인들은 사회개혁과 변화를 요구하였고 시대적 요구에 의하여
쿤 벨라에 의한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나 헝가리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 새로운 공화국은 20명 이상을 고용한 모든 기업, 광산, 금융기관을 국유화하고
소매상들의 가격결정권을 몰수하여 고정가격제와 더불어 물자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배급쿠폰제를 실시했다. 또한 토지개혁이 강행되었고 지주제가 강제로 해체되었다.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유휴주택이 공유화되어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지급되었다.
또한 헝가리 내의 강력한 보수층인 가톨릭 교회의 수도회와 수녀회가 해산되었고
종교교육이 금지되었으며, 8년의 무료의무교육제도가 공표되었다.
하지만 이런 헝가리소비에트정부의 급진적인 움직임은 수도 부다페스트를 제외한 지역과
국제적으로 반감을 사고 있었고 특히 지방 소도시와 농촌지역에서는 가톨릭의 지원아래
반혁명이 준비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가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반혁명 세력을
지원했고 루마니아는 볼셰비즘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헝가리 국경을 넘어 침공했다.
혁명 후의 공백기 후에 집권한 것은 구 귀족-지주-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받는 호르티 제독과
군부세력이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헝가리왕국을 유지했고 호르티제독은 섭정으로서
국가를 통치했지만 합스부르크 왕조의 입국은 불허했다. -1920년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의 복위가 금지되었다-
호르티 집권기간 동안 헝가리에서는 대지주제가 부활했고 불평등선거제도가 실시되었다.
소작농들은 지주들의 감독하에서 공개투표를 해야했고 헝가리소비에트 정권의 개혁은
모두 취소되었다.
호르티 집권기간 동안 헝가리는 경제 성장과 대공황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하여
다뉴브 그룹(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와 로마협정(이탈리아,헝가리,오스트리아)
를 체결했지만 다뉴브그룹의 교역량은 이들이 공업력이 미미했고 주로 1차제품 위주의 생산국이었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었으며 로마협정은 이탈리아가 남유럽 지역내 열강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공업화의 정도가 낮고 이탈리아가 지배하는 식민지가 협소하였기 때문에
역시 큰 효과는 내지 못했다.
이후 1944년에 히틀러의 독일에 대한 배신으로 인한 독일의 침공에 의해
정권이 붕괴할 때 까지 헝가리는 이 권위주의적이고 구시대적인 정권아래 통치되었다.
4. 루마니아
루마니아는 이중제국의 조각을 차지한 승전국들 중 가장 성공적이며 안정적인 입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비록 새로 획득한 영토내의 약 1/3안 헝가리,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독일인 등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발칸 여러 국가들중 가장 동질적인 민족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는 병합을 통해 인구와 영토가 약 2배 가까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압도적 다수는 문맹인 농민이었고 이들은 대지주에 경제적-사회적으로
종속되 있었다. 또한 루마니아내 정당들은 전통적인 귀족가문들의 대변자에 불과했고
이는 루마니아가 정치적-사회적으로 부패하고 정체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중반까지 유럽내 산유국이었던 루마니아의 산업은 현대 중동국가와 비슷했다.
원유를 비롯한 1차 생산품 -곡물, 육류, 석탄, 양모 등-에 국한되었고 공업화는 후진적이었다.
더욱이 석유 수출로 획득한 이윤은 대귀족가문들에 의해 사적으로 유용되거나
부패한 관리들이 차지했다.
강고한 보수주의자이자 반자유주의자였던 루마니아의 카롤 왕은 발칸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독재를 수립했다. 그는 당 내부의 분란을 이용해 민족농민당과 민족자유당 -이들은
카롤 왕의 지지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롤 왕은 군주독재를 의해 희생시켰다.-을
분열시켰고 1930년부터 1937년에 이르기 동안 수상은 18명이 교체되었다.
1937년 선거 이후 카롤은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5. 오스트리아 1공화국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프랑스혁명, 나폴레옹과 가장 격렬하게 싸우던
나라가 타의에 의하여 공화국이 되었다. 역시 합스부르크의 복위는 조약에 의하여 금지되었지만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에 비하면 성공적으로 민주주의 시스템이 자리잡았다.
좌파인 사회민주당과 우파인 보수-가톨릭-농민을 대변하던 기독교사회연합의
반목이 존재했지만 체제는 1920년 내내 유지되었다.
이런 정치적인 안정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경제는 회생 불가능이었다.
이는 헝가리의 경우처럼 인구 대다수가 전쟁에 나가 인적, 물적 자원 부족에 시달렸고
전쟁 후 제대 군인들과 해체된 제국의 독일인들이 오스트리아로 밀려들어오면서
화려했던 빈은 굶주림, 인플레이션,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더욱이 공업지대인 체코슬로바키아와 농업지대였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지역이 떨어져 나가면서
오스트리아의 경제는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는 헝가리를 제외하고는 신생국,
승전국 모두에게 증오 받는 '옛 주인'이었기 때문에 다뉴브 지역과의 교역이 정치적인 이유로
매우 제한적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교역은 독일에 편중되었지만, 생제르맹 조약에 의하여
독일과의 어떠한 정치-경제적 연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신생 오스트리아는 경제적으로
자생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 전쟁 배상과 신흥국들의 관세장벽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전쟁 직후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1914년 주택 한채를 구입할 수 있던
1만 크로네가 1922년에는 빵 한덩이 가격이 되었다. 1925년 화폐개혁으로 안정되어가던
경제는 1929년 대공황에 의해 직격타를 맞았다. 1931년 오스트리아 최대은행인 크레디트안슐다트가
도산했고 1932년에는 국제연맹에 3억실링을 대부받았지만 1933년에 실업률은 23%에 달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는 블록 경제 형성을 추진했으나 제 1교역국이던 독일과의
연합이 금지 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헝가리와 더불어 1934년 로마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탈리아 또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산업국가도 아니었고 원료나 상품을 판매할 배후 식민지 또한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경제 회생에 실패했다.
이런 경제 위기 속에서 오스트리아 1공화국은 파시스트의 준동에 붕괴되었고
독일과의 병합으로 사라졌다.
아 한 5-6편 정도로 쓰던게 이제야 마무리 됬네요. 쓸까말까 고민하다가
어떻게든 마무리는 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글을 남기고 갑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분의 역사를 다른 사람과 같이 이야기 하는 것 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설이 얼마 안남았는데, 즐거운 설 되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