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성 종교에 대한 회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본격화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에 대한 의문과 회의는 내가 모든 것을 의심하는 습관을 갖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전도사인 동시 자기 신앙에 만족하고 확신하는 삶을 사는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셨다. 그녀는 매우 유쾌하고 화통하며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삶에 대한 고뇌와 의문으로 잔병치레에 시달리던 나에겐 그녀의 삶을 향한 담대함과 적극적인 태도는 아주 바람직하게 여겨졌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녀를 내 삶의 모델로 삼게 되었다. 나는 요즘 말로 자폐끼가 있었고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 고통받고 있었기에, 그녀의 활달함, 적극성이 부러웠고 또, 몹시 탐이 났다. 당시 내가 나를 어떻게 가두고 있었는지에 관한 몇몇 사건이 지금도 별 노력 없이도 떠오른다.
음악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선생님과 목청껏 노래 부르며 저마다의 끼와 재능을 왕성하게 발휘하는 동안에도 나는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그저 입만 벙긋거리는 시늉만 내곤 했다. 나의 이런 실체를 남이 알까 두려워했고 그러면서도 진심으로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아이답게 마냥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함께 어울리고 싶어했다. 당시의 나는 나를 그대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고 그저 위인전 등을 집에서 혼자서 읽는 것에 재미를 삼고 있었다. 내가 간절히 바라던 그 무엇을 그녀가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묘한 흥분과 설렘으로 이끌었고, 곧 나는 그녀에게 흠뻑 빠지게 되었다.
지금의 기준에서는 위헌 소지가 있는 일을 그녀는 당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곤 했다. 그녀는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당당히 요구했고,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지난주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는 출석하지 않은 이유를 묻곤 했다. 그녀에 대한 내 호감, 호기심, 열망, 호의 등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그녀의 이런 행동은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낯설기는 했어도 속으로도 조금도 반감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녀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는 과정에서 나는 내 세계에서 차츰 벗어나 아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깨닫게 되었고 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노래와 음악, 어울림은 나를 생생히 살아있는 존재로 탈바꿈시켰고 나는 긍정적 체험을 통해 더욱더 그녀를 본받는 일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고아원, 양로원 등 봉사를 통해 나란 존재 자체가 세상의 그 누군가에게는 가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고, 작고 사소한 선의와 실천조차 의미 있고 쓰임 있을 수 있음에 눈 뜨게 되었다.
그녀에게 감화 받은 까닭에 다니게 된 교회의 담임 선생님께서는 어머니나 학교 선생님 보다 훨씬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대학생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눈에 번쩍 띄는 미인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온화한 가운데 따스했고, 자신이 맡은 아이들에게 매우 친절했으므로 그녀는 아이들에 무척 인기가 있었다. 아기 오리떼가 어미 오리를 뒤따르 듯 많은 아이들이 그녀 곁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며 그녀의 관심을 저마다 받고자 아우성 대곤 했다. 나는 여전히 내 실체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과 예의 바름이라는 가면으로 감추는데 익숙했기에 그녀에게 살갑게 다가서지 못했고, 마음으로는 그녀의 애정, 관심, 손길, 어루만짐 등을 욕망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를 티 내지 않고자 했다. 그녀를 둘러싼 아이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질투와 경쟁을 조용한 관찰자인 나는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교회에 오래 다닌 까닭에 그녀와 친한 몇몇 아이들이 그녀를 독차지하고자 나와 같은 신규 진입자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내곤 했고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그녀와의 일정한 거리 안으로는 다가가지 않자 그제야 몇몇 아이들이 나를 동료로 받아들여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선생님과 아이들과는 보이지 않는 거리를 둔 채 좋아하는 노래 부르기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한데 몹시도 어려운 난제가 곧 내게 닥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헌금 문제였다. 당시 나는 어머니께 하루에 오십 원을 용돈으로 받고 있었다. 이때 오락실 게임 요금이 딱 오십 원이었다. 갤러그, 벽돌 깨기 등 오락에 심취해 있던 나는 용돈을 모조리 게임하는 데 쓰고 있었기에, 교회 헌금 시간만 되면 헌금 내는 시늉만 하고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이런 처치 곤란한 상황이 매 주일마다 반복되니 교회 다니는 일에 점차 흥미 자체를 잃게 되었다.
이때 나를 구원해준 것은 바로 교회 선생님이셨다. 그녀는 아이들을 예배시간 전에 따로 불러내어 아이 한 명당 이백원을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그녀 덕분에 금전 문제에서 해방된 나는 처음 몇 주 동안은 기쁨과 행복, 고마움과 감사함에 마음이 따뜻했고 또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충만했다. 매주 이백원이라는 일정한 돈이 생기자 나는 새로운 갈등에 처하게 되었다. 백 원짜리 동전 한 닢만 헌금 통에 넣고 나머지 한 닢은 떡볶이를 사 먹거나 오락을 하는데 쓰자. 아니, 아무도 모를 테니 걱정하지 말고 헌금 내는 시늉만 하고 그 이백원을 모두 나 자신을 위해 쓰자. 아니야, 그러면 착한 선생님을 실망시킬 거야. 그건 나쁜 마음이야. 이런 생각들로 내 작은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곤 했다. 이 내적 갈등이 최종적으로 하고는 싶은데, 차마 할 수는 없다.로 결론난 얼마 후 그녀는 자기 생일파티에 나를 비롯한 자신이 담당하는 아이들을 초대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선생님은 굉장한 부자일 거야. 우리들에게 매주 200원이라는 거금을 나눠주시잖아. 모르긴 해도 아마 으리으리한 큰 저택에서 살고 계실 거야. 이런 상상으로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생님은 나와 아이들을 내가 익히 잘 아는 동네로 이끌었다. 그것을 보고 뭔가 이상한데? 이 동네를 거쳐가시려는 것일까, 이 작고 가난한 동네에서 선생님이 누군가 만나서 우리와 함께 생일 파티 장소로 인솔하시려는 건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데 놀랍게도 선생님께서 한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집으로 들어가시더니, 얘들아 다 왔어. 여기가 선생님 집이야. 모두 들어와서 신발 벗고 방으로 올라오렴. 하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예 하고 큰소리로 대답하더니 우르르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안에서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대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대에 배반당한 나는 황당한 마음을 머금고 일행 중 맨 끝으로 그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비록 작고 비좁았으나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소박했으며 정갈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구조 또한 부엌과 방 한 개로 단조로웠다. 실망감으로 잔뜩 풀이 죽은 나는 주변을 대충 훑어보곤 얼른 신발을 벗고 방 안에 들어섰다. 선생님과 아이들로 이미 발 디딜 곳도 없이 꽉 찬 방은 내가 앉을 자리조차 없어 보였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나를 위해 선생님께서는 얘들아 우리 친구를 위해서 조금씩 양보하자. 고 온유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협조로 겨우 내가 자리에 앉자 선생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가셨고, 곧 작은 상을 들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상 위에는 초코파이 한 상자와 과자 몇 봉지, 음료수 한 병, 종이컵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방 그 어디를 둘러보고 또 살펴봐도 제법 값이 나갈 물건이라곤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금도 없었고 은도 없었다. 그저 값싸 보이는 비닐 옷장과 성경 등이 빼곡히 꽂혀져 있는 허름한 책꽂이, 책상, 의자가 방 안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이제야, 나는 선생님이 결코 부자가 아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선생님은 가난하시구나. 부자여서 우리들에게 매주 200원이라는 거금을 주신 게 아니구나. 이때 아이들과 선생님이 초코파이에 생일용 초를 꽂고 초에 불을 붙였다. 아이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거의 동시에 부르기 시작했고, 선생님께서는 그런 아이들 훈훈하게 바라보셨다.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려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훅 하고 촛불을 껐다. 조용한 관찰자로 이 광경을 쳐다보던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에게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아이들에게로 잔잔하게 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 막히게 따사로우며 온화한 그것으로 선생님도 아이들도 나도 우리 모두가 충만해 있었다. 남자니 여자니, 선생이니 학생이니 부유하고 가난한 것 등을 초월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하나가 되어 있었다. 가난 속에서도 세상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대신 그녀는 맑은 가난을 누리며 자기 신념을 삶 가운데서 잔잔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경이요 새로운 그 무엇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종교인의 현존의 힘을 느꼈다.
그래서 과연 나는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내가 기독교인이 되었는지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나는 이 생일 파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사건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스스로의 길을 찾는 탐구자요, 구도자가 되었다. 진리에 관한 내 입장은 불가지론 내지 불가지론적 다원주의쯤 될 거다. 그녀들의 나를 향한 전도는 과연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성공한 것인가?
협소한 의미에서의 전도를 기준한다면 내가 교회를 떠났으니 그녀들의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은 광의의 의미에서라면 나는 적어도 교회란 틀, 성경이라는 틀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광야를 걸어왔다. 길 없는 길을 내가 걸어갈 수 있게끔 실천자만이 드러낼 수 있는 현존의 힘으로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그 무엇을 깨닫게 한 어느 무명의 종교인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녀와 그녀의 실천을 종종 떠올린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종교인들이 전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진리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도 다른 이에겐 그렇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소중한 것으로 절대화하는 그 어떤 존재나 대상도 다른 이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내 삶의 전부요 의지처요 지팡이요 생명과도 같은 그 무엇도 다른 이에게는 단 한 푼의 가치도 없을 수 있다. 진리는 결코 조직화될 수 없고 그러해서도 안 된다. 진리는 특정 교단이나 조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요 그러해서도 안 된다. 그 어떤 책도 진리 그 자체를 온전히 품을 수는 없는 까닭에 책 자체를 진리와 동일시하거나 절대화하는 동시 모순이 생겨버린다. 진리는 실제로 이런 속성을 지녔다.
전도는 삶의 본이 되는 것으로 행하고, 어쩔 수 없이 전도해야 하거든 먼저 자신이 한 점의 미혹 없이 그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부디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이런 준비나 점검 과정도 없이 불량품일지도 모르는 그것으로 사람들을 잘 전도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을 벼랑 끝이나 구렁텅이로 안내하는 것으로 결코 기뻐할 일이 아니요 그러해서도 안 된다. 전도하려는 제품 자체에 하자는 없는지 부디 진실하게 꼼꼼하게 따져보라. 먼저 자신이 직접 온갖 것들을 겪어 본 후 실천 가능한 것만 전하라. 이렇게 기본이 닦이고 준비가 된 이후에도 권유는 가능해도 권유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전적으로 상대의 몫임을 명심하라.
가난한 전도는 남의 이름을 파는 것이요, 부유한 전도는 자기가 살아온 삶 자체를 파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