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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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가지많은 나무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 하였는데
천하의 주인이라 자처하던 한나라의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만이의 국가와 부족들이 있어
때로는 한에 복속하고 때로는 반목하며 지내왔다.
한나라 경제의 후손이라는 유비의 책사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를 펼쳐
파촉을 도모하고 성도의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남만왕 맹획을 칠종칠금하던 고사에서도 보듯이
남만의 여러 나라들은 중국보다는 오히려 인도차이나 방면의 국가들끼리 교류하며 살았던듯 하다.
오랜시간 중국과 분리되어 서로 교통함이 없었기 때문에
서남이의 문화수준은 중국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진(秦)나라때부터 오척도라 하는 도로를 연결하여 중국과의 연락이 끊이지 않았으니
이 서남방의 여러 나라들은 중국과 서역을 잇는 매개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몽은 사신으로 야랑국으로 가서 계략을 사용해 통로를 열었다.
그리고 공.작 의 추장들도 자청하여 한의 내신이 되고 한나라 관리의 통치를 받았다.
이제부터 서남이열전에 대해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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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한도험 종불능유야(以為漢道險 終不能有也)
서남이의 군장은 수십명 이었다.
그러나 그중 야랑국의 군장이 세력이 가장 컸다.
야랑국의 서쪽에는 미막 이라는 부족이 수십개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전 국이 가장 큰 부족 이었다.
또 전국 이북으로도 군장국이 수십개 있었는데 그 중에서 공도가 가장 컸다.
이들은 모두 상투를 틀고 밭을 갈며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이밖에 서쪽으로 동사읍과 동북방의 접유에 이르기까지를 쉬국.곤명국 이라 이름한다.
모두들 머리를 땋고 가축을 따라 주거지를 옮기며
군장도 없이 그들이 이동하는 땅은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쉬에서 동북방으로 또 수십개의 군장국이 있는데 사국과 작도국이 가장 컸다.
작도국에서 또한 동북방으로 수십개의 군장국이 있는데 그중에서 염국과 방국이 가장 컸다.
그들의 풍속은 혹은 정착해 살고 혹은 떠돌며 살았는데 대체로 촉의 서쪽이 본거지 였다.
염국과 방국의 동북쪽에도 역시 수십개의 군장국이 살았는데
그중에서 백마국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모두가 저(티벳)족이다.
이상은 모두 파.촉의 서남 외부에 살고있는 만이 족들이다.
당초에 초나라 위왕때 장군 장교를 시켜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군.촉군.검중군의 서쪽을 공략하게 했었다.
장교는 본래 초장왕의 후손이다.
장교가 전지까지 갔는데 전지는 사방 300리이며 그 부근 수천리가 비옥한 땅이었다.
장교는 무력으로 이곳을 평정한뒤 초나라에 귀속 시켰다.
그런데 마악 귀국하여는 순간 진나라가 공격해 와서
파군.검중군을 탈취하는 바람에 초나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 버렸다.
장교는 하는수 없이 전 땅으로 되돌아가그곳 사람들의 복장으로 바꾸고
습속에 따르면서 그 땅의 군장이 되었다.
통일 진제국 시절에는 상알 이라는 자가 쳐들어와서 폭 다섯자의 도로를 개통한 후
많은 관리들을 파견하여 일대를 다스렸다.
그 10여년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자 한나라는 이들 땅을 치외의 땅으로 버려두고
촉의 요새에 관문까지 닫아 버렸다.
이렇게 교통을 막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파.촉 의 백성들은 작국의 말과 북국의 노비나 털이 긴 소 등을 밀무역 했다.
그로인해 파.촉의 백성들은 부유하고 활기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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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6년.
대행 왕회가 동월을 토벌하고 동월은 그들 왕 영을 죽임으로써 한나라의 공격을 모면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왕회는 무력을 과시하며
파양현령 당몽을 시켜 남월에게 한나라로 귀순할것을 타일렀다.
그때 남월에서는 당몽에게 촉에서 생산되는 구장 을 먹였는데
당몽은 그 맛에 혹하여 생산지를 물었다.
"이는 서북쪽 장가강을 거쳐 온것입니다.
장가강의 폭은 몇리가 되며 파우성 아래를 지나 동남으로 흘러 남해에 이릅니다."
당몽은 장안으로 돌아오자 촉에서온 장사치에게 구장의 생산에 대해 물어보았다.
"구장은 촉에서만 생산되는데 몰래 야랑 땅으로 가지고 나와서 매매 하기도 합니다.
야랑은 장가강 가에 임하고 있으며 강폭이 몇리에 이르니 충분히 배를 띄울수 있습니다."
장사치는 당몽이 촉과 야랑을 탐내고 있음을 눈치채고 계속하여 이야기 했다.
"남월이 재물을 풀어 야랑을 복속 시키고 서쪽으로 동사지역까지 거느린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들을 신하로 부리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당몽은 즉시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남월왕은 천자에게만 허락된 황금빛 수레와 좌독의 기를 세우고 다니며
그 국토는 동서로 만여리나 됩니다.
비록 한나라의 외신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한 주의 군주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장사.예장의 군사로 그들을 토벌하려 한다해도 수로가 자주 끊어지기 때문에
접근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가만히 관찰 해보니 야랑의 정병이 10만이라 하는데
이들을 동원해 장가강에 배를 띄워 불의의 장소로 남월을 공격한다면 그들을 쉽게 제압 할수 있습니다.
만일 한나라의 강대함과 파.촉의 부유함으로 야랑으로 통하는 길을 개척 한다면
그곳에 관리를 두기는 매우 쉬울것입니다."
황제는 당몽의 제안을 허락했다.
그를 낭중장으로 임명하여 천명의 군사와 치중거를 끄는 인부 1만명을 주었다.
당몽은 이들을 이끌고 파촉의 작관에서 야랑으로 들어가 드디어 야랑후 다동 을 만났다.
당몽은 다동에게 후한 선물을 준 뒤 천자의 위덕을 깨우쳐 주고
야랑에 한나라의 관리를 둘수 있도록 교섭했다.
다동은 당몽이 가져온 한나라의 재물을 탐하여 당몽의 제안을 수락했고
당몽은 다동의 아들을 그곳의 현령으로 임명했다.
야랑의 군주 다동은 속으로 생각 하기를
어차피 한나라에서 파촉을 통하여 야랑으로 오는길이 너무도 험하기 때문에
한나라가 야랑을 맘대로 점령 복속시키지는 못할것이라 판단하고
마침내 당몽의 모든 제의를 수락하여 한나라와 통호 했다.
당몽은 귀국하여 그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 했다.
한나라는 그곳에 건위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파촉의 군졸을 징발해 도로를 닦으며 북지에서 장가강까지 진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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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나라 사람 사마상여는 서이 땅의 공 과 작 지역에도 군을 설치하는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고
조정에서는 사마상여를 낭중장으로 삼아 서이로 가서 한에 복속 하도록 타이르게 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도 한명의 도위와 10여개의 현 을 설치해 촉에 소속 시켰다.
이렇게 되니 파촉의 4군 에서는 서남이의 땅으로 도로를 닦는 역사로 인해
군사들과 인부.식량 운반의 수레가 끊기지 않았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도 도로의 개통을 보지는 못했다.
사졸들은 지치고 굶주렸으며 습기에 시달려 병들고 사망하는 자가 속출 했다.
게다가 서남이의 작은 부족들이 자주 모반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계속하여 군사들을 동원했지만 힘만 소비할뿐 군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황제는 이러한 사정을 근심하여 공손홍을 파견하여 현지를 시찰 하게 했다.
시찰을 다녀온 공손홍은 "서남이를 경영 하는것은 이익이 될만한것이 없다."고 보고 했다.
한편 공손홍은 어사대부가 되어 삭방군에 성을 쌓아
황하에 의지해 흉노를 축출 하는데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간했다.
"서남이의 경영은 중지 하고 오로지 흉노 축출에 진력해야 합니다."
이에 황제는 서남이에 파견된 관리 대부분을 철수 시키고
남이와 야량 두 현에만 도위 한명씩을 두어 점차로 건위군을 자치 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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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원수 원년.
박망후 장건이 대하국 으로 사신 갔다 와서 이렇게 말 했다.
"대하에 체류할때 촉의 베와 공 의 지팡이 를 본적이 있는데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으니 견독국의 산물 이라고 하였습니다.
견독은 촉에서 수천리 떨어진 곳이고 공 의 서쪽으로 2천리가량 떨어진 곳이며
촉의 상인들이 드나들며 무역을 하고 있다 합니다."
장건이 계속하여 아뢰었다.
"대하는 한나라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우리 한나라를 사모하고 있지만
흉노가 교통로를 막고 있어 올수가 없습니다.
촉과의 길만 트이면 견독국과도 교통할수 있고
그리되면 한나라에는 이익이 있을뿐 해는 없습니다."
황제는 몹시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왕연우.백시창.여월인 등에게 영을 내려
흉노 몰래 서쪽으로 벗어나가 견독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국에 도착 했을때 전국왕 상강이 왕연우 등을 억류 해 버렸다.
상강은 한나라의 왕연우 등을 대신하여 전국사람 10여인을 시켜 견독국으로 통하는 길을 찾게 했으나
1년여가 되도록 길을 찾지 못했다.
그 이유는 거의가 곤명국이 통행을 차단했기 때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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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왕이 한의 사신들에게 물었다.
"한나라와 우리 전국과 비교하면 어느쪽 나라가 더 크오?"
"모르겠습니다."
"야랑국에 갔을때도 꼭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그러한 질문을 할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통이 두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이나 야랑국이나 자신의 나라는 물론이고 한나라의 광대함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 이었다.
한의 사자들은 아무 성과 없이 방면되어 귀환 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사신들은 전국이 큰 나라이며 한나라가 친교를 맺을만 하다고 강조 했다.
천자는 그들의 괄에 관심을 기울였다.
남월이 반란을 일으켰을때 황제는 치의후를 시켜 건위군을 통해 남이의 군사를 징발하도록 했다.
그런데 저란국의 군주는 자신이 원정간 사이에 주변국들이 자국을 침범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결국 천자의 명을 거역하고 원정을 떠나지 않는 길은 한나라에 저항하는 방법 뿐이었다.
그래서 치의후와 건위군 태수를 살해해 버렸다.
한나라는 전날 파촉의 죄수로서 남월토벌에 참여했던 8명의 교위를 출동시켜 저란국을 공격하게 했다.
그런데 때마침 남월이 이미 격파되어 8교위를 저란으로 보내지 않고
군대를 돌려 두란국을 먼저 치게 하였다.
두란국은 평소에 한나라와 전국 사이의 교통을 가로막던 나라였다.
두란이 평정 되자 남이는 저절로 무너졌다.
한나라는 그곳에다가 장가군을 설치 했다.
야랑국은 원래 남월에 의지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한나라가 남월을 멸망 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한나라를 배반했던 나라들을 도륙하고 올라오자
야랑도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야랑왕은 재빠르게 한군에 합세하여
한나라를 배반한 나라들을 주벌하는 일에 합류하고 한나라에 입조 해 버렸다.
황제는 이러한 공을 평가하여 야랑후를 야랑왕으로 삼았다.
남월을 멸망 시키고 난 한나라는 저란.공.작 등의 군장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러자 염.방 등의 군장들은 몹시 두려워 하여
ㅡ한나라의 신하가 되겠으니 어서 한나라의 군.현을 설치해 달라ㅡ고 청원했다.
한나라는 공도에 월쉬군을.
작도에 침려군을
염.방 에는 문산군을
그리고 광한 서쪽의 백마에 무도군 을 설치했다.
황제는 왕연우를 시켜 남월을 멸망 시키고 남이를 주멸한 한의 무력을 전국왕에게 과시하게 하면서
그를 달래 입조 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전국왕은 그 무리가 수만 명이나 되고
그 동북쪽에 노침과 미막이 있었는데
모두 같은 성을 가지고 있어 서로가 도왔기 때문에 그들을 믿고 한나라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노침과 미막에서 한나라 사자와 관리 및 군졸들을 침범하는 일이 잦았다.
원봉(元封) 2년.
천자는 파와 촉의 군사를 동원하여 노침과 미막을 쳐서 멸망시키고 군대를 전 에 주둔시켰다.
그러자 전왕은 서남이에서 이탈하여 나라를 들어 한나라에 항복했다.
그리고 입조 하기를 청원했다.
한나라는 전부터 전국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왕을 주살 하지는 않았다.
이곳을 익주군 으로 삼고 전국왕에게는 국왕의 옥새를 내렸으며 자기 백성의 군장이 되게 하였다.
서남이의 군장은 수백명 이었으나 오직 야랑과 전국 만이 왕의 인장을 받았다.
전국은 가장 작은 나라 였으면서도 한나라 한테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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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말미에 사마천은 이렇게 평 하였다.
초나라의 선조는 하늘의 복을 받은것인가?
주나라 시절에는 문왕의 스승이 되어 초나라에 봉함을 받았으며
주나라가 쇠한 후에도 그 영지를 사방5천리나 소유 했다.
진나라가 제후들을 멸망 시킨 후에도 오직 초의 후예만이 전국의 왕으로 남았으며
한나라가 서남이를 주멸 할때에도 오직 전국만 한의 총애를 받아 왕국으로 존속 되었다.
서남이의 정벌은 당몽이 파우에서 구장을 맛본데에서 시작 되었고
대하 의 사건은 장건이 공의 지팡이를 본데서 시작 되었다.
서이는 후일에 동.서로 분리 되었다가 드디어마침내 7개의 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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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서남이열전의 본문을 모두 알아 보았다.
서남이는 지금의 인도차이나 지역과 인도.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이란 등과 함께
투르크매니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전체를 말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이들을 모두 서쪽의 오랑캐라 칭하였으나
남월.동월과는 달리 이들 서남이의 대부분은 중국의 영토라 할수도 없고
중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라고도 할수 없다.
다만 지금의 중국 영토 내에 포함 되어 있는 광서.운남.귀주.서장.사천성등
몇몇 지역들만 떼어놓고 말한다면 현재의 중국과 인연이 있었다고 말할수도 있기는 하겠다.
이 지역들은 대체로 험준한 산악지대 이거나
아니면 광활한 사막지대가 대부분이니
그 땅들은 거의 불모지에 가까운 지역들일것이고
그러한곳에 살아가는 부족들이란것이 대부분 소수민족이며 그 백성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을것은 자명하다.
이지역의 국가들은 그저 수천의 백성으로 왕을 칭하고 수백으로 군장이라 했을것이니
중국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미미하여 나라라고 말하기도 우스웠을것이다.
그러나 이 서남이열전에서도 전편 조선열전과 마찬가지로 이들 여러나라를 복속시키는 데에는
병위보다는 재물이 크게 한몫 햇던것으로 추측 된다.
당몽이 야랑후 다동을 만난 장면만 보더라도 이익으로 설득한 정황이 엿보이니
당시의 국가간 통호가 어떠했는가 알수 있을듯 하다.
그러나 오늘의 소제목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정벌하고 통호했지만
그 통로가 워낙에 험준하여 교통의 어려움이 막대 하였으니
서남이를 정벌하여 무얼 얻었는가?
공손홍이 서남이 정벌을 반대한것은 타당하다 할수 있겠다.
차후에 대원열전이 있어 박망후의 활약과 함께 중국의 서쪽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할수 있을듯 하여
오늘의 이야기를 이쯤에서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