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을 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제1, 태종 춘추공
여기서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대식가라고 그대로 믿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 구글링하면 많이 나옵니다 )
그러나 이 말은 은유로 받아들여야지,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현대기준으로 꿩한마리에 보통 2~3인분 정도 합니다. 꿩이 고기가 상대적으로 적고, 당시 꿩을 야생이라고 추정하여 ( 고대 쒕사육기록이 없어서 ) 2인분이라고 가정해도, 아홉마리면 18인분입니다. 쌀이 서말이면 24kg이구요. 대체 어떻게 사람이 하루에 24kg의 쌀과 18인분의 고기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요. 고대에 밥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먹었다는걸 감안해도, 한끼에 8kg을 먹는건 불가능합니다.
현대 밥그릇 하나가 보통 350g이고 고구려시대 밥그릇이 1800g(약 5배)라는 엄청난 차이를 감안해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걸 정말 왕이 그렇게 많이 먹었다고 해석하는건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그 말 뒤에 따라오는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을 하였다"라는 기록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태평성대에 풍요로왔다는 말이거든요.
여기에 한국고유의 상물림 문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수라상은 남은 음식을 먹는 개념으로 ‘상물림’을 했다. 지밀의 퇴선간에서 남은 찬을 받아 지밀상궁이 둘러앉아 식사를 했고, 저녁 퇴선은 그 다음 날 아침에, 아침 퇴선은 그날 저녁 왕이 먹지 않은 음식으로 상물림을 했다.
이 풍습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록으로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조선시대에 등장하기는 하나, 이 문화를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문화로 단정하기에는 사료가 부족하구요 ( 이걸 판단하기에는 고대 경제문화사료가 매우 부족합니다 ). 그러나 고대 농업생산력이 조선보다 더 낮았음을 감안할때, 이 풍습이 오래된 것이라고 추정할수는 있습니다 ( 단언하지 못함은 아쉽습니다 )
그러니 저 음식은 무열왕 혼자 먹는 양이 아니라, 무열왕의 궁정 전체에서 먹는 양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상은 그렇게 차리더라도 상물림 되면서 궁인들이 실제 대부분 먹겠죠 )
따라서 저 기록은 무열왕이 대식가라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당시 궁정이 그런 큰 소비를 할 정도로 나라 물산이 매우 풍요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무열왕 대식가론 이제 그만 봤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