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코 후비다 입에 들어간 손으로 엄마 손잡고 나들이 다니던 시절, 단군할아버지에 관한 동화책을 읽었다.
하늘에서 신의 아들이 부하들을 끌고 내려왔더니
곰과 호랑이가 그 아들에게 으르렁거렸다고 한다.
과연 신의 아들답게 그 으르렁거림이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인 줄 알아차리고,
쑥과 마늘만 먹고 백일동안 햇볕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잡식성인 곰은 풀만 먹고도 버틸 수 있었지만, 육식성인 호랑이는 쑥과 마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
바로 옆에 커다란 고기를 놔두고 고기를 찾아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결국 곰은 사람이 되었고, 신의 아들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조상인 단군할아버지라는 내용이었다.
순수하던 어린 나였기에 산타 할아버지를 믿듯 책의 내용을 믿었다.
세월이 흘러 아직 코는 후비지만 엄마 손은 잡지 않을 만큼 어른스러운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단군할아버지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단군할아버지가 우리들의 조상이라고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후, 쉬는 시간.
나는 친구들과 마치(는 3월) 100분 토론을 방불케하는 열띤 토론을 했다.
단군할아버지는 우리들의 조상인데 나는 김 씨고 너는 이씨다.
조상은 같은데 왜 성이 다를까?
과연 김단군일까 이단군일까...
물론 그중에 박단군이라는 주장과 권단군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성씨가 김 씨와 이 씨라는 것쯤은
어디서 주워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무시해버렸다.
그 심오한 토론은 의외로 쉽게 끝났다.
성이 단이고 이름이 군인 걸로...
새끼발톱이 두개로 갈라져 있으면 몽골족의 후손이라는 친구의 말을 들은 후
어릴 때 있었다던 몽고반점을 떠올리며 '아 내 조상은 단군할아버지가 아니라 징키츠칸이었구나' 하며
징키츠칸은 김 씨일까 이 씨일까 하던 고민은 얼마 후의 이야기다.
그 뒤로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 中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교복을 입는 나이가 되었다.
그때의 나는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들에 의구심을 가질만한 건전한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의구심은 단군할아버지의 이야기에 대한 기본적인 틀은 깨지 못 했다.
신은 하나님이니까, 신의 아들은 예수님이겠구나 생각했고,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듯 곰을 사람으로 바꿨겠구나 생각하며
엄마 아빠가 밤마다 운동을 해서 나를 낳았듯 단군도 그렇게 태어났겠구나 하는 생각했을 뿐이고, 나는 김징키츠칸의 후손이라 생각하는 것이
허접한 성교육을 받은 기독교 신자의 한계였다.
사실 초등학교에서 단군신화가 의미하는 것을 선생님이 가르쳐주셨을 것이다.
다만 내가 수업시간에 그리스 로마신화를 보다가 안 배웠을 뿐이지....
신의 아들이 부하들을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발달된 문명을 가진 부족이 이주해 왔다는 것을 뜻하고,
곰과 호랑이는 그 동물을 신으로 생각하는 부족들이며, 곰은 사람이 되고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한 건 두 부족이 싸워 곰 부족이 이긴 것이고,
신의 아들과 곰이 결혼한 것을 곰 부족이 발달된 문명을 가진 부족과 결합한 것을,
그 사이에서 단군할아버지가 태어난 것은 그렇게 결합된 부족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걸 중학교 국사시간에 배운 후
나는 어쩌면 산타 할아버지도 진짜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이후로, 내가 역덕후가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