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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 ‘공비 만행’으로 조작
<시사저널> 취재반은 46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청원서에 담긴 사건 현장을 직접 찾았다. 그 결과 재구성한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때는 1949년 12월24일, 경상북도 문경에서도 오지라 할 수 있는 산북변 석봉리 석달부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날 정오께 중무장한 국방군 70여 명이 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불문 곡직한 채 26호에 달하던 마을 가옥에 불을 지른 후 놀라 뛰쳐나온 주민들을 마을 앞 논두렁에 몰아세웠다. 곧바로 주변에 설치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삽시간에 부락민 66명이 시체로 변했다.
학살을 마친 군인들은 동네 저편 산자락으로 이동해 마침 방학식을 마치고 하교하던 국민학생 15명을 모아놓고 집중 사격을 가해 10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어서 이 마을 이장 채명진씨(당시 29세)의 인솔 아래 문경 중학교 건립을 한 벼 공출작업에 동원됐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마을 청년 7명에게도 총탄 세례가 퍼부어졌다. 약1시간에 걸친 양민 살륙 작전으로 전체 주민 1백24명 중 86명이 죽었다. 그 가운데는 여자 가41명, 국민학생이 10명, 채 돌을 넘기지 않은 애도 5명이나 포함돼 있다.
당시의 끔찍한 학살사건은 중앙 정부에도 그대로 보고됐다. 사건이 일어난 지 3주일여가 지난 이듬해 1월17일 신성모 당시 국방부장관이 헌병과 장갑차 20여 대의 호위를 받으며 사건현장을 찾았다. 신장관은 생존 유족들을 불러모아 위로 연설을 한 후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내려온 뒤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공비들의 소행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의승 당시 문경경찰서장과 이기용 산북면 지서주임이 ‘공비 출몰 총살’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 당하는 선에서 해괴하게 매듭이 지어지고 말았다.
사건 이듬해 일어난 6.25전쟁과 이승만 정부의 공포정치 아래 하소여커녕 입도 한번 벙긋하지 못한 채 한맺힌 세월을 살아가던 유족들은 사건이 발생한지 11년이 지난 4.19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억울한 사연을 풀어줄 것을 호소할 수 있었다. 사건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국회에 제출하자 국회에서는 1960년 5월23일 주병환 ․ 윤용구 두 의원으로 구성된 ‘문경양민 학살 진상조사반’을 사건 현장에 파견했다.
현장조사 후 국회조사반은 유족들의 진정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한 뒤 ‘박모 대위가 인솔한 70여명의 병력에 의해 저질러졌던 이 학살은 당시 정부에서 알고도 그 뒤를 흐려버렸다는 방증을 얻었다. 또 군인들을 안내한 인근 주민 2명을 찾아냄으로써 앞으로 구성될 5대 국회가 이 자료를 토대로 전모를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전모가 드러나면 정부로부터 유족에게 상당한 보상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듬해 발생한 5.16 쿠데타는 이 모든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국회에 학살 진상 규명을 진정했던 유족 대표 이시형씨와 채홍락씨는 포고령 제18호 위반죄로 체포돼 두 달간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이후 유족들은 역대 군사정권 아래서는 입도 못 열고 피맺힌 가슴을 쓰다듬으며 살아야 했다.
당시 지휘관 박재한씨, 토벌작전 수행 시인
사정이 이러함에도 사건 발생 4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경 양민 학살에 대해서는 신성모 당시 장관이 조작한 사건 내용이 정부의 공식기록으로 남아 있다. 취재반이 산북면사무소에서 확인한 피학살자들의 호적부에는 하나같이 '1949년 12월24일 공비 출몰 총살’이라고 사망 원인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이같은 사건 조작이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 임을 알려주는 증거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수없이 남아 있다. 취재반은 46 년 세월을 넘나들며 누가 왜 이 가공할 사건을 저질렀는지, 역대 정권의 은폐가 얼마나 국민을 기만한 행위였는지를 다각적으로 파헤쳐 보았다.
우선 60년 5월 국회 조사반의 현장조사 당시 증언자로 나섰던 학살부대 인솔자를 수소문한 끝에 이 두 사람이 아직도 문경군 호계면 선암리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노성근씨(74)와 장성한씨(71)가 그들이다.
“우리 마을(선암리)은 사건이 난 석달부락 산너머에 자리잡고 있다. 그날 아침에 국방군 70~80명이 기관총 ․ M1소총 ․ 방한복으로 중무장한 채 동네에 들어와 밥을 지어달라고 했다. 식사를 마친 군부대는 젊은 우리 두 사람을 지목해, 처음 오는 곳이니 길을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산너머 첫 마을이 석달부락인데 집들이 보이니까 지휘관이 이 마을로 들어가자고 했다. 동네에 인기척이 없으니까 군인들은 화가 치민 말투로 ‘국방군이 와도 환영하지 않는 것을 보니 빨갱이 마을이다’라고 투덜거리며 집집마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이 뛰쳐나오니까 모이라 해놓고 그냥 총을 쏴댔다. 우리는혼이 다빠져 벌벌 떨고 있는데 군인 한 명이 ‘당신들도 여기 있으면 죽여 버릴 테니까 빨리 돌아가라’고 해서 얼른 돌아왔다.”
사건 당시 산북면사무소 서기로 학살 현장 구호 활동을 담당했던 천규철씨(68 ․ 전 문경읍 장)는 이 사건을 이승만 정부가 직접 개입해 조작 은폐했음을 설득력있게 뒷받침한다.
“나는 학살 다음날 연장의 지시를 받고 석달부락에 들어갔는데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집은 다 불타고 피범벅이 된 시체들속에 주인 잃은 개가 배고픔을 못견뎌 인육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 당시 공비는 애매한 양민을 대낮에 죽이는 일은 없었다. 공비가 죽였다면 약탈한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었다. 군인들이 학살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뒤에 신임 문경 경찰서장이 공비의 소행이라고 적은 보고문을 면에 보내와 그대로 호적에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 사건을 조사했던 문경경찰서장이 왜 직위해제됐는가가 열쇠이니 그를 만나보라.”
취재진은 당시 직위해제된 이의승 전 문경경찰서장을 찾아 수소문했으나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경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사건 직전 문경군수를 지냈고 5공 때는 국회의장을 역임했던 채문식씨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1949년 12월24일 문경군 산북변 석봉리 석달골에서 일명 석달골 사건이란 사건이 발생했다. 아주 산골인 이 동네 사람들이 공비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해서 군인들의 추궁을 받았다. 군인들은 산골부락 30여호 남녀노소를 전부 모이게 했고 그들이 둥그렇게 모였을 때 군인들이 사격을 가해 모두를 사살했다.’
각도를 달리한 추적 끝에 취재반은 가까스로 문경 양민 학살 현장 지휘관의 행적에 접근 할 수 있었다. 강원도 강릉시에서 건설업을 운영해온 권응용씨 (65)의 제보가 결정적인 단서였다.
“68년에 나는 강릉 대동건설속초 양양 지역 출장소장으로 있었다. 당시 태백지구 출장소장이 박재한씨였는데 회식장에서 박재한씨는 내가 문경지역 출신임을 알고는 흑시 석달부락 사건을 아느냐고 물었다. 공비들이 학살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고 답했더니 그는 ‘야! 내가 그때 부대를 지휘해 문경군 동로면 수평리에 주둔할 때 갈평쪽으로 빨갱이 토벌하러 갔다가 석달 사람들이 밥해줬다는 정보를 듣고 싹 죽여버렸다’고 호기있게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나는 그 때 큰 충격을 받았지만 어디다 내놓고 말하기도 어려운 시절이라 속으로만 담고 있었다. 그 뒤 박씨와는 거의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지난해 문경에 유족회가 결성됐다는 보도를 보고 전화해 직접 만났다. 나는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유족들을 찾아가 사과하고 화해하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소대장으로 수평에 주둔하다 석달을 토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는 전쟁중이었고 기록도 국방부에서 다 소멸해버려 없다고 발뺌했다. 국회에서 진상조사를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미안한 일이지만 박씨와 함께 증언대에 서서 대질 확인할 용의가 있다’고 권씨는 말했다.
올해 76세인 박재한씨는 경기도 이천군 모자면에 살고 있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전화로 이루어졌다.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에 있을 때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부락 토벌작전을 수행하셨지요?
-그 마을 작전 아주 쉽게 했어요. 포위 딱 해서 공격해 전멸시켰으니까…
-그때 양민들이 모두 죽었는데요.
- 산북에서 거기 하루이틀 있다가 거기서 나와 군부대 가지고… 대원들이 나가서 한 것이라 잘 모르겠는데요.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히고 사죄할 용의가 없나요?
-당시 석달부락에 공비 백20명이 있다 해서 포위해서 작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늙고 병들어 기억이 잘 안나요.
-군적 사항을 말씀해주시 ::;
- 나는 소대장이었고, 뒤에는 군적을 소멸해서 잘 모르겠고… 늙어서 기억이 안나요.
박씨와의 인터뷰는 20여분간 계속됐지만 나머지 부분은 횡설수설로 이어졌다. 시종 몹시 겁에 질린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증언한 내용의 핵심은 그가 석달부락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고 시인한 점이다. 학살과 조작 은폐로 얼룩진 46년 세월의 하늘 아래에서 피멍 든 가슴을 쓰다 듬으며 살아온 피학살자의 유족들과 가해자와 국민(국가)의 양심이 그동안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공존해 왔음을 확인한 취재반은 이 사건 진상 추적을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출처 |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3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