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김 득 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1. 머리말
2. 한국 부임 이전의 하우스만
3. 한국군 형성과 하우스만 - '국군의 아버지'
4. 여순사건 진압의 계획자 - 학살의 말뚝
5. 한국정치사와 하우스만의 개입
6. 맺음말
1. 머리말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이 어떤 사람인지는 한국과 미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그의 고향에서조차 그가 한국 땅에서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는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에게 그가 알려진 것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이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이것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면서부터였다. 이 책이 출판되면서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이것조차 이전부터 그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군 관계인물이나 그의 배후 역할에 주목한 언론인?정치학자?역사학자들에 한정되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는 하우스만 개인을 다룬 논문이 이미 2편 나와 있다. 하우스만에 대한 논문을 최초로 쓴 사람은 밀레였다. 최근 도널드 클락은 한국군 형성과정에서의 하우스만 뿐 아니라 한강교 폭파 등의 쟁점에 대해서도 언급한 글을 한 심포지움에서 발표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하우스만의 역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와 있지 않은 상태이며, 이는 하우스만이 행했던 역할을 군 형성과정의 비사(秘史) 정도로만 취급하고 인식하는 데에도 일정한 원인이 있다. 하우스만이 주로 정보방면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우스만과 가까이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정일권이나 백선엽조차 그들의 회고록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하우스만을 언급하고 있는 정도이다. 정일권이나 백선엽의 책을 아무리 자세히 훑어보아도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다.
전직 한국군 장성들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하우스만을 언급하기를 꺼렸다면, 그 이유는 하우스만이 이들 장성들과 너무나 가까운 사이여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하우스만이 너무나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순사건 때 정보장교 자격으로 최초의 정보군 관계 대책모임에 참석했던 고정훈의 회고록에는 하우스만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나와 있다.
하우스만은 1946년 7월 26일 남한에 첫발을 딛은 이래 국방경비대 고문관?미군사고문단장 고문을 지냈고 1950년에는 채병덕과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지내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1960년대까지 한국정치의 배후무대에서 정력적으로 활약했다.
하우스만은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었고, 남한 '국군의 아버지'로 자칭했다. 자신의 회고록 제목 또한 그렇게 지었다. 어찌보면 당돌하게 보이는 이런 표현은, 그러나 사실에 가깝다. 아니 미군 장성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일개 미군 대위가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단 말인가? 하우스만의 일생은 국군의 역사, 더 나아가 군부가 수 십년 간 좌지우지했던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대부분의 정보 업무가 그렇듯 그는 베일에 싸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베일에 싸여 감추어지기에는 활동영역이 너무나 컸고, 고위층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미국의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30년을 한국에서 보낸 가장 주요한 미국 요원이었으며, 미국과 한국군부 간에 그리고 이들 정보기구 간의 연결자로서 활동했다고 썼다.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었으며, 한국판 에드워드 란즈데일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한 신문 칼럼에서 박노자는 제임스 하우스만의 역할과 행동을 아는 것은 (젊은이들이) "배우지 못한 또 다른 현대사 속에 어떤 모습들이 감추어져 있는가, 그리고 한국현대사에서 대미 관계는 어느 정도 종속적이었는가"를 아는 것이며, 하우스만을 한국사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제임스 하우스만을 한국군의 형성과정과 연관시켜 보고자 한다. 이 같은 측면은 이미 지적되어 온 바이지만, 여기에서는 아직까지 이용되지 않았던 그의 증언을 토대로 구체적인 실상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한편 하우스만은 '국군의 아버지'라는 얼굴 이외에도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남한 반공국가 형성과정은 '누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자격심사과정에 다름 아니었는데, 이 때 '좌익 빨갱이'는 너와 나를 가르고, 국민과 비국민을 결정하는 주요한 잣대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학살은 국민자격을 심판하는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여순사건 진압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는 등 반공체제 구축에 전력 질주하는 바, 하우스만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하우스만은 단지 배후에 있던 인물이 아니라 학살이 있을 수 있게 만든 든든한 말뚝이었다.
2. 한국 부임 이전의 하우스만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은 1918년 2월 28일 뉴저지주 러니미드(Runnemede)에서 아버지 존 하우스만(John Otto Hausman Sr.)과 스코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건축업자이자 청부업자였는데 이름에서 나타나듯 독일계 사람이었다.
러니미드의 중학교와 뉴저지 오두본(Audubon) 고등학교에 다니던 하우스만은 그의 나이 16세에 군 입대를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나이로는 부모 동의를 얻지 않으면 도저히 군 입대를 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형의 이름을 빌어 지원하게 되었다. 원래 제임스란 이름은 그보다 6살 위인 형의 이름이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아버지를 따라 지은 존 오토 하우스만 쥬니어(John Otto Hausman Jr.) 였다. 그는 자신이 입대한 이유를 '형은 누나를 만나러 가고 혼자 남아있는 상황' 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집은 커 보였고 '외로웠다'고 회고했다.
군대에 들어간 하우스만은 메인주 맥킨리 항구에 주둔하고 있던 5보병 연대에 배치되었고, 1940년에는 형의 이름을 공식적인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얼마간 파나마에 근무하기도 한 하우스만은 1941년 1월 24일 소위로 진급했고, 아들을 낳은 다음에는 아이오와주 데스 모인(Des Moines)항에 여성보조군(Women's Army Auxiliary Corps; WAAC'S) 형성의 임무를 맡고 차출되어 배치되었다. 이는 하우스만이 원하던 보직은 아니었으나 월급은 많았다. 하우스만의 상관은 그가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이 부대에 배치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우스만은 이 부대 교육에 필요한 군사경험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 뒤 중위로 승진한 하우스만은 6개월이 조금 넘어서 다시 대위로 승진하였다. 소위에서 대위까지 6개월만에 빠르게 승진했던 것이다.
그 뒤 하우스만은 미주리주 레오나드 우드 항구에서 활동했던 75보병 사단에 배치되어 벌지전투에서 부상병을 영국으로 후송하는 일을 맡기도 하고, 작전장교로 289보병연대 1대대에 S-3에 배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본대로 귀환하게 된다. 한국에 오기 직전까지 하우스만은 펜실바니아 군사행정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난 뒤 하우스만은 1946년 7월에 한국으로 파견되게 된다. 이 때 하우스만의 나이는 28세였다. 하우스만은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를 거쳐,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다른 동료 군인들은 거의 모두 일본에 머물러 있고 싶어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이들과 달리 한국에 선뜻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갖고 호감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군인의 자세에 충실한 판단이었다.
한국에 들어와 러치장군을 만난 하우스만은 점령지 군사행정은 싫다는 의향을 표시했다. 그의 부임 신고를 들은 러치는 "자네 기록을 보니 병사이므로 프라이스 대령이 국내 보안부서를 조직 중에 있으므로 프라이스 대령에게 신고하게. 우리는 지금 정치적인 이유로 보안부서 조직이란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입장이지"하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이 남북을 각각 점령한 상태에서 양측은 남과 북에 군대를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남북에는 미소양군과 치안유지만을 위한 경찰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남한 군대는 경찰을 보조하는 경찰예비대(constabulary)로 출발했다. 하우스만은 미군정 하에서 조선경비대 창설요원으로 배속 받으면서 남한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이후 프라이스 대령에게 신고한 후 하우스만은 춘천 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시키고 확장하는 일을 1개월 정도 맡았다. 이 당시는 경기도의 1연대만이 한국 내의 유일한 완전한 규모의 연대였다. 하우스만은 춘천 8연대의 생활에 대해 "내 군대경험 12년에 비추어 그 곳의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다.
한편 하우스만은 춘천 8연대 활동에 대해 주기적으로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배로스(Russel D. Barros) 대령에게 보고하곤 했는데, 배로스는 하우스만의 보고서를 눈 여겨 보았다. 드디어 배로스는 하우스만을 찾아와 서울로 와서 자신의 수석보좌관 일을 맡아달라고 청하였다. 1946년 8월부터 하우스만의 본격적인 활동이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3. 한국군 형성과 하우스만- '국군의 아버지'
하우스만은 1946년 춘천 8연대 근무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 배로스 휘하에서 조선경비대 집행국장(Executive Officer)이자 고문관으로 근무했다. 그 뒤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배로스 대령이 제주도지사로 발령이 나고, 송호성이 아직 임명되기 전이었을 때에는 하우스만이 사실상의 사령관 대행으로 있으면서 사실상의 총사령관 임무를 수행했다.
하우스만은 김완룡, 이지형을 시켜 미군 조직법을 번역해 군대조직법을 만들게 하는 등 군사훈련법, 군통제법, 군형법 등의 작성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하우스만의 지휘하에 경비대에서 사용할 군사용어도 영어와 일일이 대조해가며 새롭게 만들었다.
하우스만이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배치 받아 처음 느낀 것은 군대와 경찰간의 충돌이 매우 자주 일어난다는 점과 지방 좌익의 영향으로 중앙의 통제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초기 국방경비대 창설과정에서 하우스만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기준을 갖고 실전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우대했다. 당시에 군대에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일본 육사를 졸업했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했던 사람들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자 일본군 출신들은 영달을 꾀할 수 있는 두 번째 호기를 맞았다. 이들은 국방경비대의 엘리트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형근이 그랬고, 채병덕이 그랬고, 정일권이 그랬으며, 백선엽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러했다.
하우스만의 친한 한국군 친구들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본군 출신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들이 더 강한 군사훈련을 받았다는데서 찾았다. 한편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다. 그는 광복군이 장개석 장군의 '부속기계 같은 존재'였으며, '저속한 말로 불평할게 많다'고 하였다.
하우스만이 광복군을 싫어했던 중요한 이유는 광복군 출신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공산주의자를 적대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우스만은 그 예로 송호성은 공산주의에 대해 나쁘다는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점은 여순사건 때 이승만 정부와 미군이 이 사건의 발발 요인을 극우와 극좌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보는 시각과도 맥을 같이 한다. 여순사건 발발 초기에 이범석국무총리는 이 사건이 김구와 군대내 반이승만 세력이라는 극우세력과 남로당 극좌세력이 일으킨 반란으로 설명했고, 미군은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을 공식화하지 않았지만 김구에게 끊임없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을 위협하는 김구라는 존재에 대한 시각은 김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다른 미군 병사가 언제쯤이나 본국으로 돌아갈까 골몰할 때, 하우스만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국문화를 익혔고 한국말도 알아듣기 시작하는 충성스런 군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국방경비대가 만들어져가고 있던 시기에 전국을 순회하면서 군 내부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던 하우스만은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미국 군인이 되어 어느새 누구나 조언을 구하는 '한국통'이 되어 갔던 것이다.
광복군보다 일군?만군 출신을 우대하는 것에서 나타나듯 하우스만의 철저한 반공주의는 인사정책을 통해 구현되었다. 하우스만이 한국 사정에 밝아지면서, 미국 장군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책과 조치가 적합한지 그리고 한국군과 정치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하우스만을 필요로 했고, 하우스만을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한국군 장교들에게 하우스만은 작전과 군대 운영을 '조언(실제로는 지휘)'하는 고문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와 영달을 보장해 주는 직선 코스였다. 그의 마음에 들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명도 내놓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때 채병덕 총참모장이 이범석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해임하려 한 적이 있었다. 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그는 민족청년단이라는 큰 조직을 이끌면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견제하기 위해 일단 정부 요직에 앉힌 다음, 수많은 청년단체를 모두 해체시켜 버리고 이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했다. 이범석은 자신의 사지가 짤려 나가는 아픔을 겪었지만 내각의 일원으로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범석과 채병덕은 친한 사이이기는 했지만, 이범석이 중국에서 무기를 들여와 팔고자 했을 때 하우스만의 조언으로 채병덕이 반대하면서 사이가 틀어져 있었다. 그것을 잘 알지 못했던 이승만은 채병덕 후임으로 김석원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석원은 이승만의 열렬한 추종자인 임영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하우스만은 김석원을 군인으로는 보지 않고 있었다.
이승만이 채병덕을 교체하려 하자 하우스만은 "대통령 각하, 만약 채병덕을 총참모장직에서 해임시키고 김석원을 임명한다면 미군사고문단을 철수시킬 것입니다."라고 말해 버렸다.
한국전쟁 직후에 채병덕에서 정일권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하우스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군인들의 사기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총참모장을 교체하려 하였는데, 채병덕 후임으로 누구를 추천하느냐고 하우스만에게 물었고, 하우스만은 정일권이라 답했다. 물론 정일권의 미군 군사고문으로 일하게 된 사람은 하우스만이었다. 이렇게 하우스만은 군 수뇌부의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는 하우스만이라는 미군 고문관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우스만은 "그 때 모든 사령관의 파면, 임명이 내 손을 거쳐갔으며 내가 사령관과 미 대통령 사이를 연결해주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두 사람의 유일한 통로였다. 내가 어떤 사람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화 가능했으며, 내가 원한다면 국방부장관과도 바로 대화가 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모르면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하우스만은 지적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재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하우스만의 역할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하우스만은 한국군에 많은 인맥과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한 미군사고문단이 정식으로 출범할 때, 한국 근무기간을 훨씬 넘긴 하우스만은 전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다른 고문관은 필요치 않아. 나는 하우스만을 필요로 해"라고 말했다. 결국 미고문단장은 하우스만이 계속 한국에 남아 있기를 권했고, 이미 한국어도 상당히 알고 있었고, 한국 장교들의 면면을 줄줄이 꿰고 있던 하우스만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드디어 전쟁 중이던 1951년 하우스만은 한국을 떠나 국방부 국방정보부(DIA)로 자리를 옮겨 한국을 담당하게 되는데, 하우스만이 일했던 참모총장 고문 후임에는 짐 하웬이 임명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하우스만이 있으면 참모총장 고문자리가 있고, 하우스만이 가면 참모총장 고문자리도 간다라고 하면서 하웬을 연락장교로 배치하였다.
하우스만의 마음에 차고 안 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였다. 하우스만이 좋아하고 아꼈다고 해도, 그가 공산주의자로 밝혀지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그것도 하우스만이 사형 장면을 찍는 필름을 돌리는 앞에서. 김종석의 운명이 그랬다. 김종석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하우스만은 김종석의 군사적 능력과 군인의 자질에 대해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장차 한국군을 이끌어갈 대들보로 생각하였다. 하우스만은 그를 조선경비대 내의 작전교육과에서 초대 과장으로 일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순사건 뒤 숙군 바람이 몰아치면서, 김종석은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어 1949년 9월 서울 부근 수색에서 처형당했다. 이 때 하우스만은 이 처형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16밀리 무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이 필름을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 교과서'로 활용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뒤부터 하우스만은 이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로버츠 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면서 임시군사고문단([PMAG], 나중에 군사고문단[KMAG]으로 변경)이 만들어지자, 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고 이승만을 면담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승만은 수시로 하우스만을 경무대로 불러 군사관계를 묻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고 하였다. 대통령은 개별보고서를 요구하곤 했는데, 군대의 사기문제라든지 군 조직 개편 등에 관한 보고서도 요구했지만 어떤 특정 사건, 특정 인물에 관한 보고서도 요구하곤 했다.
하우스만이 총참모장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단지 참모총장의 고문일뿐 이었으나, '모든 작전에 책임을 졌다'. 사령관을 임명하는 일, 부대를 배치하고 그것이 중대, 대대, 연대이건 그들에게 임무수행을 명령한 일, 그리고 그 사령관을 감독하는 일들이 하우스만이 했던 일이었다. 사령관이 임무를 완수했는지, 그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를 감독했고 또 그 결과를 검토했다. 게릴라 토벌작전 때에는 빨치산들을 몇 명이나 체포했는지, 죽였는지, 부상자는 몇 명인지 등을 체크하는 일도 하우스만의 일이었다. 결국 하우스만은 고문이었지만, 미군이 국군을 지휘하는 상황에서는 하우스만 또한 자신이 조언하는 상관을 지휘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정일권과 고문관 하우스만이 토벌중인 백선엽 부대를 조사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빨치산이 매복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도, 정일권은 체면 때문에 예정된 길을 가자고 주장했다. 이때 하우스만은 "정, 당신은 부참모총장이고 나는 참모총장의 고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이 길로 가기를 명령한다"고 말하였다.
하우스만의 이런 권능은 하우스만이라는 한 개인의 능력은 아니었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미국군과 한국군의 당시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하우스만은 그 집약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4. 여순사건 진압의 계획자 - 학살의 말뚝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는 제주도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지창수 상사가 지도한 14연대는 이날 저녁 여수로 진입하여 경찰서와 철도경찰, 관공서를 순식간에 점령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통근기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북향했다.
광주 5연대가 여수주둔 14연대 반란 소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 20분이었고, 이 사실이 서울에 보고된 것은 9시였다. 이날 아침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에게 반란 소식이 보고되었고, 로버츠 고문단장은 즉시 관계자로 구성된 회의를 주최했다. 이 회의에는 미군측에서 하우스만(미 군사고문단 G-3), 존 리드(미 군사고문단 G-2), 트레드웰대위(전 5여단 고문), 프라이 대위(현 5여단 고문)가 참석했고, 국군측에서는 채병덕 국방부 총참모장, 정일권 작전참모부장, 백선엽 국방경비대 G-2 책임자, 고정훈 국방경비대 정보장교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여수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기동작전군(Task Force)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군사고문단이었다. 참모총장과 국방경비대 총참모장도 고문단장의 호출에 불려 나왔다. 왜냐하면 비록 이승만 정부가 세워지고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을 선언했다 하더라도 군대 지휘권은 1948년 8월 24일 이승만-하지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진압작전에 군대를 보내면서 군사고문단 장교가 꼭 대동하도록 했다. 송호성 사령관도 미군이 '임명'하였다. 그리고 하우스만은 송호성의 명령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문관이었다.
이로써 하우스만은 리드(Reed)와 더불어 남한에서 직접 전투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는 하우스만이 이전의 국방경비대에서 활동했던 시기의 활동과도 그 성격이 약간 다른 것이었다. 하우스만은 국방경비대를 확충하고 군대를 운영하는 일에는 관여했지만, 직접 적에 대한 작전을 책임지고 주도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우스만은 미 임시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책임자로, 그리고 송호성 총사령관의 고문자격으로 이 기동작전군 사령부에 배속됐다. 로버츠는 하우스만에게 공식 명령 네 가지를 주지시켰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군사령부가 사태진압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관장할 것.
둘째, 기동작전사령부를 구성하고 적절한 감독행위를 할 것.
셋째, 결과를 신속히 고문단 본부에 보고할 것.
넷째,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
이 명령의 내용을 보면 한국군사령부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장악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상 한국군은 미국의 손아귀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문서에서나 사용될 상당히 완곡한 표현에 불과했다. 국군은 반란군 세력을 진압할만한 교통?통신장비나 작전 경험도 전혀 없었다. 실제로 미군사고문단은 반란이 터졌을 때 무기, 군수, 훈련이 부족한 한국군이 과연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에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의 역할은 단지 군 작전을 옆에서 지켜보고 조언해주는 이상이었다. 모든 면에서 미군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하우스만은 그의 회고록에서 "내가 그 때 공식명령으로 휴대한 임무서에는 토벌사령부가 효율적인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진압사령부의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용을 위한 지워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다는 것만 밝힌다"고 말한 바 있다.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일단 기동작전군을 구성한 다음에는 장비와 물자를 실어 날랐다. 하우스만이 광주에 파견되는 것과 동시에 화차 2량에는 무기 화약 식량 등이 실려 광주로 떠나갔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대부분 일본식 38식, 99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제주도 파병을 위해 14연대 정도에만 M-1이 지급된 형편이었는데, 미군은 사건진압에 파견된 부대원들에게 모두 미24군 탄약고로부터 지원된 M-1 소총으로 무장시켰다.
제대로 된 비행기 한 대 가지지 못한 국군은 미군에게 수송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C47 수송기는 하루 한 번씩 서울-광주간을 오갔다. 광주에서 서울로 올리는 1일 작전 보고와 서울에서 내려오는 1일 작전 명령이 이 비행기에 실려왔고, 탄약?무기?식량 등을 수없이 실어 날랐다. 어느 하루는 쌀 6톤, 육류 20박스를 싣기도 했다. 쌀은 한국산 이었지만 육류는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무쵸 주한 미대사는 국무장관에게 "지난 10월에는 여수, 순천지역에 대한민국 사람들, 탄약, 통신장비를 수송하느라 미국 수송기가 러시를 이루었다"는 전문을 타전했을 정도였다. 10대의 L4 경비행기도 지원되었다. 5대는 광주에 배치되었고, 5대는 전주에 두어 부대간의 연락용으로 쓰거나, 여수?순천을 공중정찰하는데 사용되었다.
통신은 광주에 주둔한 미20연대가 갖고 있는 장비를 지원했다. 최신 무전기 M208이 작전 하루 이틀 뒤에 보급되어 작전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가끔 반란군은 경찰 전화선 껍질을 벗기고 통화내용을 도청하곤 했는데, 최신 무전기는 안전한 작전 수행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물자 지원에도 불구하고 여수와 순천은 즉시 진압되지 않은 채, 초기에는 진압군이 반란군에 협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반란의 진원지인 여수와 순천을 빨리 탈환하고자 시도했다. 미군 수뇌부는 "이승만 정부가 곧 전복 당할 처지에 있다. 여수는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진압해야 한다"고 진압군을 재촉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우스만은 진압작전은 순천에서 부대를 멈추고 전선을 구축하여 바다까지 밀고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전선에는 될 수 있으면 소규모 부대만을 남겨 놓고 대부분의 부대는 북쪽으로 행진시켜 지리산을 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우스만이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은 여순사건에 대한 그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건이 군인과 지방좌익세력의 합세로 인해 여수에서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그는 여수 14연대의 최초 봉기 때 골수 추종자는 불과 40명에 불과하며, 전투에서는 첫 조우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차공격을 가해 반란군의 자만심을 꺾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지창수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과 호응하여 남한에 항상적인 소요를 일으킬 빨치산 유격투쟁을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그는 파악했다. 하지만 여순사건의 발발은 조직적이거나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다. 14연대 반란은 공산당 조직이 사전에 관련되어 있지 않았고, 여수의 공산주의자들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순봉기는 한국전쟁 전 남한에서 일어난 최후의 대중적 봉기였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여순사건을 북한과 연관지어 사고했고, 그렇기 때문에 지리산 입산을 극구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하우스만에게 주요한 것은 여수?순천의 신속한 탈환만이 아니라 반란군이 산 게릴라로 침투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백운산, 지리산 등의 퇴로를 우회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 정부와 무쵸대사, 로버츠 단장 등은 여수?순천을 탈환하는 것에 변함없는 우선 순위를 두고 하우스만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우스만의 판단이 옳았다. 14연대 반란군들은 지리산 등에 입산했고 장기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우스만이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는 그릇된 것이었다. 여순사건 이후에 본격화되는 게릴라투쟁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이끌려 벌어진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여수 진압작전에는 38선 경비임무를 맡은 부대를 제외한 남한의 거의 모든 대부대가 참가함으로써, 한국군은 처음으로 연합작전 경험을 얻게 되었다. 이전에 있었던 군대와 경찰간의 마찰은 이제 군의 압도적 우위로 결판났다. 사건이 발발한 요인에는 친일 경찰에 대한 경비대의 반감이 작용했기도 했거니와, 진압작전 과정 자체를 군대가 완전히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분규를 진압하는데는 소규모 화력이 아니라 정규군의 압도적 화력이 역시 중요했다. 미국이 제공한 화력 덕분에 진압군은 순천을 24일, 여수를 27일 완전히 제압했다.
그러나 여순사건 진압은 14연대 반란군과 진압군만에 한정된 전투는 아니었다. 진압군 작전은 정규 14연대 반란 군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그 결과 여순진압작전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 희생을 불러왔다.
10월 27일 여수 전 시내를 포위하면서 작전을 시작한 진압군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잔여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동시에 시민을 집밖으로 몰아내고 민가를 샅샅이 수색했다. 반란군으로 의심되는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면 기관총을 쏘아댔고, 조금이라도 의심나면 사살되었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은 제일 먼저 전 시민을 국민학교 같은 공공장소에 모이도록 명령했다. 나오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된다는 말을 듣고는 만일 진압군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서 모두 모이라는 장소에 나왔다.
당시 심사의 기준이 된 것은 교전중인 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地下足袋 . 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주민들 가운데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사람도 반란군으로 간주되어 끌려 나왔다. 의심되는 사람의 변호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 되었고, 이 때문에 시내는 공포분위기로 완전히 뒤덮였다. 위헌적인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협력자 색출과정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고,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의 기본권리조차 무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증명하는 주위 정황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이나 기준은 찾아볼 수 없다. 협력자 색출은 단지 믿음직하지 못한 혐의만으로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해 희생된 인명의 숫자조차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러한 유혈 과정 속에서 이승만 정권은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반공체제 확립의 법적 지주를 마련한 셈이었다. 학교에서는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졌고,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가입해야만 했다.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한국전쟁 직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수들과 함께 제1차적인 학살 대상이 되었다.
여순사건이 종결된 뒤 미 국방부는 '효율적이고 신속한 진압작전의 공로'를 인정해 1949년 1월 10일 하우스만에게 미 공훈장을 주었다. 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다음가는 4번째 서열쯤의 훈장이었고,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 이런 훈장은 드문 일이었다. 아니, 미군은 당시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우스만의 훈장에는 학살의 공도 포함되어 있을까?
하우스만이 국방경비대와 국군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남한에 반공국가가 세워지는 때였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다. 1949~50년 사이에 미국무성과 주한미대사관을 오고간 문서의 대부분은 인플레이션 억제와 이승만이 병력과 끊임없는 물자 지원요구로 채워져 있다.
한국전쟁 때 패주하던 이승만과 채병덕 총참모장이 미국 개입 소식을 듣고 감격스러워 했고 그래서 군 작전권을 대전에서 종이쪽지 하나로 맥아더에게 헌납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 모른다.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지원으로 남한은 반공국가의 모양을 점점 갖추어 갔지만 제주도와 여수에서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죽었다. 얼핏 국군?경찰?청년단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학살의 배후에는 이 사실을 묵인한 미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남한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조직체이자 반공이데올로기의 보루로서의 대한민국 군대가 만들어진 것은 여순사건 뒤 대대적으로 실시된 숙군 때부터였다. 숙군과정을 주도한 김창룡은 만주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들을 검거한 경력이 있었고, 북한에서 소련군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남하했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과정은 빨갱이 사냥 이상의 것이었다.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고 그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군대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에 대한 사냥을 마음놓고 자행했다. 단지 반공이라는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사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 자기에게 마음 들지 않는 인간을 가차없이 숙청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다.
김창룡의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지만,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우스만은 숙군 상황을 매일 매일의 일일보고를 통해 이승만에게 보고하였다.
김창룡과 하우스만은 반미?반일 성향을 가진 공산주의 박멸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 열성적이었다. 김창룡은 군내부의 숙청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한 인물로서 '스네이크 김'으로 악명을 떨친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악명은 하우스만에게도 해당되어야 할 것 같다. 한번은 무쵸 주한 미대사가 재판도 없이 제주도에서 민간인 20명을 총살한 사실을 보고 받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때 하우스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 과거에는 이같은 민간인 200명 또는 더 이상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는데, 이제 숫자가 20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진보이다."라고. 무쵸조차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던 이 의연한 대답은 그의 황폐한 정신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무쵸 대사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었고, 나중에 워싱턴에서 하우스만을 다시 만났을 때, "자네가 당시 그렇게 말했다네"라고 상기시켜 줄 정도였다.
이런 그의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김창룡이 '스네이크'였다면, 하우스만은 이 뱀이 활개치고 놀 수 있는 공간과 담력을 키워준 '대사형(大蛇兄)'이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자신의 손에 붉은 피를 묻히려고 하지는 않았다. 민간인학살을 지켜보고 옆에서 이 과정을 점검하던 다른 미군 장교들과 같이, 하우스만 또한 학살현장을 목격했지만 스스로가 학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에 대한 언급도 그러하다.
경비대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데리고 가서 나무 막대기에 묶어 놓고 끝이 뾰족한 대나무 막대기로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를 보여주면서 주민을 처형했다. 또 주민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구덩이 가에 서게 하여 다른 주민들이 대나무 막대기로 그 사람을 찔러 구덩이에 빠뜨린다. 그러나 대나무는 상처만 내지 실제로 죽이지는 못하므로 경비대 군인들이 구덩이에 넘어진 주민들 위에 석유를 부어 산채로 태워 죽이곤 했다. 제주도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자행되었다.
하우스만은 경비대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을 단지 '목격'만 하고 자신의 손은 하얗게 남겨두었을까?
물론 하우스만은 학살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수 천명의 공산당을 처형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이는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었다. 다시 질문이 이어졌지만 하우스만의 대답은 "잔학 행위는 없었다"였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좋다라는 하우스만의 반공주의는 끈질긴 것이었다. 1948년 6월, 제주도 9연대에서는 문상길 중위가 그의 부하와 함께 박진경 연대장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 달 박진경 대령 암살범인 문상길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박진경은 일본 외국어학교 출신으로서 영어를 잘 해 미군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군정장관 딘은 그를 총애하여 직접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러 제주도로 내려올 정도였다. 박진경은 이에 부응하여 15세 아이를 사살하는 등의 무차별 체포작전을 폈고, 이는 도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진경을 쏜 군인은 "박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재판정에서 말하였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인권옹호연맹이나 법학가동맹은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동기를 참작하여 감형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상길은 몇 달 뒤 사형되었다.
전임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은 처형 광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총살형은 수주일 후에 수색에서 집행되었다. 3인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대령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총살 현장의 광경은 참관자들의 마음속에 이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문상길의 처형은 군 내부 좌익세력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하우스만이 한 짓이 여기에 그친다면 그래도 다행이겠지만, 이후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남하하기 시작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압박했을 때였다. 대통령은 라디오로 서울을 지킨다는 허위방송을 전국민에게 떠든 채 몰래 달아나 버리고, 채병덕은 사무실에서 위스키를 비워가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경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다. 미8군에 의하면 국군 9만 8천 명 가운데 한강을 건너온 군인은 불과 2만 4천 명 뿐이었고, 경찰 병력 중 피난 간 사람은 4,500명에 불과했다. 다리 위에서는 피난 가려는 시민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인민군을 피해 피난 가던 국민들은 모두 수장되었다. 어떤 미군 장교는 이 폭파로 인해 5~800여 명이 죽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대 육사교장이었던 이형근은 현장을 목격한 뒤, 유엔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인민군이 선수를 친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누가 한강교 폭파의 명령을 내렸는가? 이승만 정권은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공병감을 적전비행죄(敵前非行罪)로 몰아 사형까지 시켰지만, 최창식 부인 옥정애의 재심청구 요청으로 1964년 10월 결심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한강교 폭파의 책임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그 죄가 돌아갔다. 최창식에서 채병덕으로 죄인이 바뀌었지만, 두 경우 모두 정치적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점은 공통된다.
그럼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퇴역을 맞아 한국을 떠나 있었고, 라이트(Wright)부단장은 일본에 있었다. 또한 책임을 맡아야 할 선임 통신장교인 챨스 스튜리스는 자신은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며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5?16 후 재심판결에서는 채병덕을 한강교 폭파의 명령권자로 밝혔는데, 채병덕의 고문관은 하우스만이었다. 또한 하우스만은 자신은 한강교 폭파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김백일이 폭파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지만,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는 입장이었다. 한강교는 하우스만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이었기 때문일까?
당시 최창식 공병감의 미군측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짚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었으며,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최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만약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이 채병덕이라면, 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이었던 것이다.
5. 한국정치사와 하우스만의 개입
하우스만은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초기에 하우스만은 장관들만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 미국인의 신분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경무대에 들어앉아 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나 응하기 위해서였다.
하우스만은 10여 년이 넘게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는 최후 통첩을 한 것도 하우스만이었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불붙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더 이상 남한의 통치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이에 하우스만은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 지지 철회를 통고하였다. 하우스만은 송요찬에게 "당신이 가서 미국 정부는 경무대의 탱크를 철수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발언이었다. 당시 하우스만은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글이 너무 길어 다 붙여지지가 않습니다.
읽기좋게 단락 나눠서 두번이나 올렸는데, 두번다 잘리는 군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na0242&logNo=140150306850 여기가서 나머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말하는 건국과, 안보가 무엇인지. 근현대사를 보면 알수가 있지요.
미군정과 매국노에 의해 만들어진 반공국가 60년.. 그래서 그들은 건국 60주년이라고 축배를 들었던 것입니다.
국가의 정통성? 60년전에 새로 만들어진 반공국가는 딱 60년어치의 역사만 가지고 있습니다.
http://search.daum.net/search?w=news&q=%EA%B1%B4%EA%B5%AD%2060%EC%A3%BC%EB%85%84&spacing=0&cluster_page=2&fixed_pc=3593&fixed_c=10779&search_date_infos=6:20080814150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