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아들과 블럭을 열심히 쌓은 뒤 한 번에 무너뜨리는 '공든 탑이 무너지는 부실시공' 놀이를 한 시간 정도 한 뒤 더 놀고 싶어 하는 아들을
뽀로로와 노래해요 6곡을 불러주며 달랜 뒤 간신히 재웠다.
와이프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와이프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애써 내 눈빛을 회피하고 있었다.
마음속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 설거지를 했을 때 둥그런 대접을 닦으면서 덩실덩실 원을 그리며 춤추는 듯한 동작의 수도사의 마비의 파동
기술이 떠올랐다.
'이... 이러면 안 돼!' 나는 머릿속에서 디아블로를 잊기 위해 설거지를 급하게 마치고 청소기를 들었다. 아이가 깰까 봐 조용한 1단으로 하고
있는데 지켜보던 와이프가 "오빠! 좀 빨리빨리 해!" 라고 했다. 순간 머릿속에 어제저녁에 주운 일정 확률로 공격속도를 두 배로 올려준다는
전설 대봉 '비룡'이 떠올랐다. 나는 수도사처럼 양손으로 청소기를 잡고 공격속도 아니 청소기를 2단으로 올리고 청소를 좀 더 빠르게 끝냈다.
'설거지할 때도 청소할 때도 디아블로가 생각나다니 내가 제대로 미쳤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들의 블럭 상자를 들고 가던 와이프가
청소기 줄에 걸려 넘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괜찮아?" 하고 달려 갔을 텐데, 넘어지면서 다양한 모양의 빛의 3원색 블럭들을 바닥에 흘리는
와이프의 모습을 보니 실컷 두들겨 맞고 보석을 바닥에 뿌리는 보석 고블린 같았다. 내가 청소기 줄을 제대로 처리 못 해서 와이프가 넘어졌다는
미안한 마음에 빠르게 블럭을 주웠고, 와이프 역시 '내가 제대로 못 봐서 몸개그 했네..' 하며 우리 둘은 빠르게 블럭을 주워 모았다.
그 모습은 마치 보석 고블린을 때려잡고 하나라도 더 전리품을 줍겠다는 가난한 천민 여자 야만전사와 대머리 수도사의 모습 같았다.
집안일을 대략 마치고 우리 부부는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핸드폰으로 인증기 번호를 보고 있는 내게 와이프가 물었다.
"오빠 그런데 요즘 어떤 게임 해? 오빠로 롤인가? 그거 하는 거야?"
"아니 롤은 안 해. 롤 예전에 해봤는데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너 트롤이지? 이런 소리 듣고 다시는 안 해.."
"트롤이 뭔데?"
"내가 집안일 할 때 지켜보는 너의 심정 같다고나 해야 할까?"
"답답한 거구나.."
"그럼 오빠는 어떤 게임 하는데?"
"디아블로 3..."
"디아블로건 미아블로건 적당히 해. 나이 들어서 뼈 삭아.."
"그래야지..그런데 나.."
"가지마."
"응."
어제 하루 디아블로3를 쉬었는데, 아침 출근해서도 내 수도사가 잘 있는지 걱정된다. 바지만 구하면 나도 드디어 울리아나 세트 다 모아서
세트던전 이라는 곳을 구경하러 갈 수 있는데... 그나저나 카탈라 나쁜 년 내가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감전돼서 죽고, 불타 죽으면서 어렵게 모은
핏빛파편을 그렇게 갖다 바쳐도 울리아나 바지를 주질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