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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59.동월열전(東越列傳)
게시물ID : history_193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1
조회수 : 64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1/19 01:10:11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http://www.podbbang.com/ch/6526   <ㅡㅡ 팟캐스트를 들으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

blog.daum.net/carilla


*동월열전(東越列傳)

 

남월을 지나 이제 그 옆동네 동월이다.

사실 필자도 남월 동월 하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기를 읽으며 중국 남방의 여러 부족이야기를 처음 접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러한 남쪽 작은 여러 나라들에 큰 관심이 가져지지 않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곳 동월의 백성들 역시 예전 오월시대부터 중원과 교통하며

그들만의 문화를 이루어 나갔다.

 

춘추전국시대때 이름 날렸던 오왕부차와 월왕구천이 패망하고

그 후손들이 명맥을 이어갔던 동남쪽 해안가에 살던 사람들은

진나라 시대를 거쳐 한제국 개창 때까지는 평화롭게 살았다.

 

항우와 유방의 쟁패기에 남동쪽을 근거로 했던 항우는

자기의 배후인 이들을 크게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항우를 버리고 유방을 도왔다.

오왕 비 가 반역하자 동구 사람들은 오왕비 를 베고 봉우산을 지키며 한나라 신하로 복속했다.

 

지금부터 동월열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역불능구 덕불능부(力弗能救 德弗能覆)

 

민월왕 무저 와 월의 동해왕 요 는 모두 월왕구천의 후손이니

그들의 성씨는 추씨였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진에서는 그들의 왕위를 모두 폐하고 군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영토를 민중군으로 편입 시켰다.

 

그후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하게 되자 무저와 요는 월인들을 이끌고

파양현령 오예에게 귀순했다.

오예는 이른바 파군이라 불리던 인물로 제후들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 시켰다.

 

그무렵에는 항우가 제후들을 호령하고 있었는데

항우는 무저와 요를 왕으로 삼지 않았다.

그래서 무저와 요는 반발하여 초에 붙지 않았다.

 

한이 항우를 칠때 무저와 요는 월인들을 이끌고 유방을 도왔다.

그래서 한나라 5년에는 무저를 민월왕으로 삼았고

무저는 옛 민중군 동야 땅에 도읍하게 되었다.

 

효혜제 3년

황제는 고조때 세운 월나라의 공적을 칭찬했다.

"민군 요는 공적이 많았고 백성들도 그를 잘 따른다."

 

그러면서 요를 동해왕으로 삼아 동구에 도읍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동구왕이라 불렀다.

 

그로부터 여러세대가 지나 효경제 3년에 오왕 비 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민월을 포섭하려 했다.

그때 민월은 오에 협조하지 않았고 오직 동구만이 오를 따랐다.

 

오군이 패배하자 동구에서는 한나라가 내건 현상금을 받기위해

단도에서 오왕 비를 살해했다.

이는 한나라의 세작이 금전으로 동월을 매수한 때문 이었다.

 

어쨌든지 오왕을 주살한 덕으로 동구사람들은 모두 주살을 모면하고 귀국 할수 있었다.

 

오왕의 아들 자구는 민월로 도망와 있었다.

그는 동구가 자기의 부친을 죽인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수시로 민월왕에게 동구를 칠것을 권유했다.

 

건원 3년.

드디어 민월은 군사를 일으켜 동구를 쳤다.

동구는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고 곧 항복할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동구는 사자를 급히 황제에게 보내 위급을 호소했다.

 

황제는 동구의 호소문을 놓고 태위 전분에게 하문했다.

그러나 전분은 다음과 같이 대답 했다.

"월나라 사람들은 옛부터 서로 다투어 공격하는일이 다반사 였습니다.

또한 그자들은 한나라에 대해서도 자주 반역 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군사를 동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나라 때에도 복속시키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자 중대부 장조가 전분을 힐책하며 나섰다.

"힘으로 월나라를 도울 수 없고 덕으로 월나라를 덮을 수 없음을 걱정일 뿐입니다.

만일 참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무엇 때문에 버려두겠습니까?

진나라는 함양조차도 버렸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월나라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작은 나라가 궁지에 빠져 천자께 달려와 위급함을 알렸는데

천자께서 구원하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 곳으로 가서 호소해야 합니까?

또 어떻게 모든 나라를 자식처럼 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들은 황제는 이렇게 말을 했다.

"태위와 더불어 계략을 논할수 없다.

그러나 짐은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았으므로 호부를 내어 군국의 군사들을 징발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장조에게 사자의 표시인 절부를 주어 회계군에서 군사를 징발해 쓰도록 명했다.

회계군 태수는 호부가 아니기 때문에 출병을 거부했다.

다급해진 장조는 한사람의 사마를 베어 천자의 뜻하는 바를 밝힌후 드디어 병사를 동원할수 있었다.

그러나 장조가 바다를 건너 동구를 구원하기도 전에 놀란 민월군이 동구에서 철수해 버렸다.

 

동구에서는 나라 전체가 중국으로 이주하겠다고 간청했다.

그래서 한에서는 온 백성을 양자강과 회수 사이로 이주하도록 허가했다.

 

건원6년.

민월왕이 남월을 쳤다.

남월은 천자와의 약속을 지켜 감히 군사를 마음대로 동원하는 대신 천자에게 호소했다.

천자는 대행 왕회와 대농 한안국을 장군으로 삼아 회계에서 출격하게 했다.

그런데 한군이 대유령을 넘기전에 민월왕 영 이 군사를 내어 험지에서 길을 막고 나섰다.

 

그때 영의 아우 여선이 재상과 대신들을 가만히 불러 상의했다.

"우리 민월왕은 맘대로 병사를 동원해 천자의 명령도 없이 남월을 쳤소.

이에 필시 천자의 군사가 우리를 치러 올것이니

지금 막강한 한나라의 군사들을 우리가 어찌 막아낼수 있겠소?

혹시 요행으로 이번 싸움에서 한군을 막는다 해도

결국 한나라는 다시군사를 보내어 우리를 토벌할것이니

우리는 결국 멸망 할수밖에 없을것이오.

그러니 우리가 살길은 우리 왕을 죽여 천자에게 사죄하는 길 밖에는 없소.

만일 천자가 사과를 받고 군대를 철수 시킨다면 우리 민월은 무사할 것이고

혹시 천자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땐 우리도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그래도 힘이 부치면 바다 복판으로 도망치면 그만이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찬성했다.

그래서 왕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사자를 시켜 왕의 목을 대행 왕회에게 가져다 바쳤다.

 

왕회가 말 했다.

"우리가 원정 온 목적은 민월왕을 주살하기 위함인데

이제 왕의 목을 얻은데다가 사죄도 받고 싸우기 전에 항복까지 받았으니

이보다 더 큰 승리는 없다."

 

왕회는 군사의 행군을 멈추고 한안국에게 이 사실을 통보한 후에

말을 달려 민월왕의 목을 황제에게 바치고 보고하게 했다.

 

황제는 조칙을 내려 두 장군의 군사를 철수하게 하고 이렇게 말 했다.

"원흉은 영 이다

그러나 오직 무저의 손자 요군 추 만은 이번 모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낭중장을 사자로 보내 추를 민월 요왕으로 삼고 민월의 조상들 제사를 받들게 했다.

 

여선이 영을 죽인후 그의 위세는 민월 국내에서 절대적 이었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그를 지지했다.

여선은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요왕은 힘이 없었다.

자기 부하들 마저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

그래서 왕위의 정통성을 지킬 방법이 없었다.

 

황제도 이 사실을 들었다.

"여선은 지난날 영과 함께 반란을 도모했지만

나중에 그의 형 영을 주살한 공로가 있으니 한나라가 굳이 그를 정벌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여선을 동월 왕으로 세우고 요왕과 함께 월나라에서 병립하게 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원정5년.

남월이 반란을 일으켰다.

동월왕 여선이 상서했다.

ㅡ병사8천을 이끌고 누선장군을 따라 여가 등을 치려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ㅡ

 

그래서 황제는 이를 허락 했다.

 

그러나 여선의 생각은 달랐다.

군대를 게양에 주둔시킨뒤 바다의 풍파가 심해 진군할수 없다는 핑계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다리 걸치기 식으로 몰래 남월과 내통까지 하고 있었다.

한군이 파우를 격파 할때까지도 동월군은 꿈쩍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누선장군 양복은 본국으로 사자를 보내 동월을 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군사들이 지쳐 있다고 생각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를 해산시키고 교위들을 예장군의 매령에 주둔시켜

천자의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원정6년.

밀정이 여선에게 보고 했다.

"누선장군이 우리 동월을 치기위해 국경에 임박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선은 드디어 모반을 일으켰다.

 

추력을 탄한장군으로 삼아 한군의 집입을 막도록 했다.

추력은 백사.무림.매령 등으로 침입해 한나라의 교위 세명을 죽였다.

 

이때 한나라군대는 대농 장성과 산주후 치 가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동월의 군세가 강한것이 두려워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안전한 곳으로 물러났다.

 

이에 노한 황제는 두 장군을 적전에서 물러난 죄로 참수 하였다.

 

한편 여선은 위타를 본받아 무제 라는 옥새를 새겨 스스로 황제에 즉위 했다.

한나라에서는 횡해장군 한열을 구장에서 출격시고

누선장군 양복을 무림에서 출격하게 하고

중위 왕온서를 매령에서,월후 두사람을 과선장군과 하뢰장군으로 삼아 각각 약야와 백사로 출격하게 했다.

 

원봉원년 겨울.

한군은 일제히 동월로 진격했다.

 

동월은 본래 험준한 지형을 방패삼아 한군과 맞서고 있었다.

특히 순북장군은 요새의 책임자로 누선장군의 군사들과 무림에서 맞서싸워 교위 두명과 장리를 베었다.

그러나 순북장군은 누선장군의 부하 원종고에게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원종고는 나중에 어예후로 봉해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나라 조정은 당시 강회지간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던

월나라 출신의 연후 오양 을 월나라에 들여보내 여선을 타이르게 했다.

그러나 여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횡해장군의 군사가 동월로 먼저 쳐들어 갔다.

이에 오양이 자신의 휘하군사 7백을 거느리고 여선에 맞서 한양에서 월군을 공격했다.

그러면서 건성후 오 를 따라 요왕거고에게 달려가 함께 모의 했다.

 

"원흉은 여선 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협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한나라 군사가 이르렀는데 그들은 수도 많고 강합니다.

 

여선을 죽이고 스스로 한나라 장군들에게 귀순하면 다행히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드디어 여선을 죽인뒤 병사를 이끌고 횡해장군에게 투항했다.

 

그래서 한나라에서는 요왕 거고를 동성후에 봉하고 1만호를 주었다.

건성후 오 는 개릉후에 봉하고

월에서 귀순한 연후 오양은 북석후에 봉하고

횡해장군 한열 을 안도후에 봉하고

횡해교위 복 을 요령후로 삼았다.

 

기타의 장군들은 아무도 공이 없어 봉을 받지 못했다.

 

동월의 장군 다군은 한나라 군사가 이르자 휘하 군사를 버리고 항복 했으므로

봉을 받고 무석후가 되었다.

 

논공행상이 모두 끝난뒤 황제는 선언 했다.

"동월은 땅이 좁고 험한곳이 많다.

게다가 민월 사람들은 사나운데다 배반을 자주한다.

동월은 사람이 살곳이 못되니 이들을 모두 강회 사이로 이주케 하라."

 

그런 이후 동월의 땅은 무인지경이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글의 말미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월은 비록 오랑캐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들 조상은 일찌기 백성들에게 큰 공덕을 끼쳤다.

그래서 나라는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여러대를 지나 오면서 월은 언제나 군왕으로 있었고

구천은 한차례 패자로 칭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대역을 범했고 나라를 멸망 시켰으며

결국 백성들을 중국으로 이주시키고 말았다.

같은 조상의 자손이지만 요왕 거고 등은 오히려 봉을 받아 만호후가 되기까지 했다.

이것으로 짐작 하건대 월이 대대로 공후로 내려온것은

월나라의 원조인 우왕의 여덕 때문일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상으로 동월열전을 모두 알아보았다.

 

동월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인지 수시로 배반하고 자립하여는 시도를 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한나라의 영향력이 쉽게 미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매번 모반한것은

남쪽지방 사람들이 성정이 거칠고 중원에 비하여 제도문물이 단순한 탓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단순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입조를 하고 중원 문물을 받아들여 예의범절에 구속되는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을 터.

천자가 어쩌고 법령이 저쩌고 하는것이 못내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저 북쪽의 흉노들이 자유롭게 말달리며 살아가는것에 집중할뿐

예의범절같은것에 구애되지 않은 이치와 다를것이 없어 보이는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중국에서는 발달된 문물의 힘으로 사이팔만을 억압했지만

끝내 그들은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을뿐 구속되거나 억압당하는것을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일부 집권세력에 의해 한나라에 귀속되어 천자의 명을 따르고

한나라의 속국으로 살아가게 된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중원의 뜻에 따라 조상의 땅을 버리고 강회지역으로 강제이주를 하게 되었으니

고향을 버리고 그 어느곳으로 가면 쉽게 안정을 바랄수 있겠는가?

 

스스로 자강하여 독립된 나라를 가짐만 못하니

백월등이 한나라의 속국노릇을 한것은 그 또한 집권층의 어리석음 때문인가 한다.

뜽금없이 하는소리지만 티벳의 독립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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