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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대타협과 그 후폭풍
게시물ID : history_192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11
조회수 : 1101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01/07 23:42:17
대타협(Ausgleich)

유럽사에서 접미사로 대(大)라는 의미가 붙는 사건 중에 제 머리속에 떠오르는 건
대타협과 대역전 뿐인데, 둘다 근세 이후의 오스트리아와 관련이 있는 사건이군요...

제가 쓰려는 글은 앞에서 쓴 글에 이어서 대타협의 정황과 그 결과물들에 대하여 쓰겠습니다.
대타협의 자세한 상황보다는 그 과정과 결과가 제국 내 주요민족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중점으로 쓰겠으니, 대타협의 자세한 전말을 원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황후 씨시와 헝가리 정치가 언드라시 쥴러의 관계같은 것은 생략하고 담백하게 쓰겠습니다.)


300px-Franz_Joseph_1865.jpg프란츠 요제프 1세의 사진을 보통 노년기 사진으로 쓰는데 
                                                            이왕 쓰는거 젊은 시절 사진으로 올려봤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67년 3월 15일 제국의 이원화, 즉 대타협을 공표했습니다.
이 공표의 효력은 동년 6월 12일부터 발효되었는데 이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헝가리인이 제국의
지배민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 또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각자 통치하는 지역에서 
아무런 제한없이 합의하에 통합된 국방, 외교, 재정사무를 제외한 광범위한 범위의 자결권을 
보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A-H Map.gif
Österreich-Ungarn_1898.jpg

기억을 더듬고 구글 맵을 뒤져서 저 두 지역의 상징적인 경계령이 된 라이타 강의 대략적인
위치입니다. 
라이타강은 제 기억과 구글맵에 나온것이 맞다면 강치고는(다뉴브나 라인에 비하면) 그렇게
큰강은 아닙니다만 이강은 중세부터 독일-오스트리아와 마쟈르-헝가리의 전통적인 경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두 지역의 상징적인 경계선이 됩니다.

두번째 그림의 노란색의 오스트리아의 지배아레 놓인 지역을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
치스라이타니엔(라이타강 이쪽), 건너편 초록색의 헝가리의 지배지역이 트란스라이타니엔
(라이타강 저편)이라고 불립니다. 물론 폴란드-루테니아인이 사는 갈리치아나 루마니아인이
거주하는 부코비나 같은 경우에는 라이타강 저편이지만 두지역이 헝가리와 연관성이 적고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분할로 근세에 들어 획득한 영토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령으로 남습니다.

한개의 국가에서 중요한 사무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무를 분리하고 의회도 따로 설치함으로써 
제국은 외면적으로는 두동강난것 처럼 보이지만 국방, 외무, 재정의 사무가 공동으로 처리되고 
관세, 무역, 중앙은행의 화폐발행 같은 경제적 문제도 10년에 한번씩 공동으로 합의하여
처리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국정의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일원적인 통치가 기능하는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국방, 외무, 재정을 담당하는 장관이 오스트리아계와 헝가리계가 나눠 가지고 번갈아서
 차지했기 때문에 제국의 이원화는 분열보다는 새로운 정합의 성격을 강하게 띄었습니다.)
황제는 두 국가의 이해가 상충되는 부분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보유함으로써
근대이전에 나타났던 양국간의 사무에 서로 독립적이거나(ex 영국-하노버) 일방적인 속방화와 
다를 바 없던(ex 에스파냐-포르투갈,프랑스- 나바라) 동군연합과는 전혀 상반되는 
'상당히' 균등한 권리를 가진 정합국가가 탄생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해결방식에 행복할 수 없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로만 이루어진 국가였다면 이 정합체는 오늘날에도 
존재할 수도 있었겠지만 제국의 민족분포는...
b0013361_4f6ea4690f31a.png
시쳇말로 노답상황이었습니다. 제국 내 민족은 비교적 지역단위로 뭉쳐있었지만,
역사적, 경제적 이유로 민족분포가 상당히 뒤섞이 상태였습니다. 
헝가리의 경우에는 몽골의 침략으로 인구가 증발하면서 그 빈자리를 슬라브계 민족이
비집고 들어와있었고(카르파티아산맥 이남의 트란실바니아 같은 곳은 
원래는 헝가리인이 많이 살았지만 몽골 침략이후로는 위에 지도처럼 루마니아인
사이에서 흔적만 남습니다.)
이 문제는 현대까지 남아서 루마니아에는 1차대전 이후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헝가리계와의 갈등이 남아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제외한 슬라브계, 특히 체코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당혹감을 감출수 없었습니다.
체코계가 앞장서 친오스트리아적 슬라브주의를 주장하며 제국의 연방화를 요구했는데
그 결과가 슬라브계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격하시킨 제국의 이원화로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더욱이 산업화가 진행되고 교육수준이 높아 이른바 "민족문화"를 보존할 수 있다고 간주된
체코민족과 달리 이당시만 하더라도 제국 내 슬라브계는 상당히 "후진적"이었습니다.
슬로바키아계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계층이 제대로 형성되 있지 않아서
민족운동을 이끌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고 크로아티아나 폴란드는 중세부터 내려온
전통있는 민족이라는 것이 오히려 민족주의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중세로부터 기원하던 두 민족 혹은 어족은 사회변혁에 보수적인 제국의 일부분 답게
귀족-평민간의 격차가 상당히 큰 이른바 귀족민족이었기 때문에
수직적으로 단절되어 수평적인 대규모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오히려 크로아티아와 폴란드의 상층계급은 제국보다 더 반동적인 정치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오스트리아내 폴란드 귀족들은 농노해방령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에 미숙하고 민족문제에 어색하고 온건한 오스트리아령에 남은
슬라브계보다 민족문제에 있어서 강경한 입장인 헝가리의 통치하에 들어간
슬라브계의 운명은 헝가리의 강력한 동화정책에 '수혜자'가 되느냐 아니면 헝가리내의
이등민족대우를 감수하느냐 두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슬로바키아는 초기에는 자발적인 헝가리화를 유도하였고 후기에는 강력한 동화정책의 세례를
받습니다. 루마니아인들은 제국 내부에서 중세 이후로 단절된 민족이라는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에
-오스만 투르크의 루마니아 지역 정복 이후로 그들의 전통적인 지도계급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헝가리인들은 이들은 근본없는 이등민족 정도로 대우하고 슬로바키아의 헝가리화에 집중합니다.
크로아티아의 경우에는 복합적인데, 크로아티아의 상층 귀족계급은 전통적으로 헝가리 왕국의
봉신이었던 역사가 있지만, 근세 이후로는 오스트리아의 민족갈등 유발 정책으로
헝가리에서 일어난 민족운동을 크로아티아인들이 진압하는등..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크로아티아의 경우에는 이른바 귀족민족(...) 답게 대우한 편입니다.


또 서론이 엄청 길어졌군요....

이런 상황속에서 제국 내 슬라브계의 '엘리트'이자 '첨병'인 체코계가 가장 격렬한 반발을 합니다
체코계는 일부 자치권이 부여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의 지역의회에서
의원직을 포기하여 제국에 불만을 표시합니다.
빈 정부는 이런 저항에 처음에는 지방의회를 새로 구성하겠다는 등 무시하는 입장을 취합니다만
체코인들의 집회가 점차 강경해지고 반제국정서가 확산되어가자 
헝가리에게 허락된 지위를 '빠른 시일안'에 체코에게도 부여하겠다는 공수표를 남발합니다.
이전에도 이런 공수표에 여러번 넘어갔던 체코인들의 저항은 사그러지지 않고 
시위는 수만명단위로 확산되어갑니다. 이에 빈 정부는 강경책으로 선회하여
프라하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일단 질서를 회복하게 됩니다.

170px-PalackyLitho.jpg제 글에 개근하고 계신 팔라츠키 선생님....

팔라츠키를 위시한 체코계 지도자들은 제국과의 연대를 포기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대안이래봐야 '슬라브의 해방자' 러시아 뿐이었습니다. 마침 이 시기는
알렉산드르 2세가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시하던 시기로 러시아에 비교적 자유주의적 훈풍이
불던 시대였기 때문에 대안으로서의 러시아의 매력이 커보이던 때입니다.
그러나 대개 러시아의 패턴대로 역시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와 정치가들은 기본적으로 슬라브민족의 통일은
제민족간의 평등한 관계 속에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차르'의 아래에서 슬라브 제민족이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슬라브 민족간의
언어적, 문화적, 종교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방문한 팔라츠키와 동료들은 이런 러시아의 태도에 당연히 황당해 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직접 방문하게 되면서, 러시아의 후진성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러자 그들은 자신들의 파트너를 러시아에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로 변경하게 됩니다.

이들은 프랑스에게 독립된 체코가 프랑스의 주요한 적이 될 프로이센의 옆구리를 찌르는 단검이
될 수 있다는 전략적 시각을 제시하며 설득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큰 그림보다는 작은 그림에 
집중하면서 이를 사실상 거부합니다.
(비스마르크가 보오전쟁 이전에 나폴레옹 3세에게 영토보상을 약속했는데 -아마도 남독일의 일부나
룩셈부르크-  이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오전쟁 이후에 벌어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궁극적으로 통합된 독일이
국경 너머에 실제로 나타나면서- 이것이 급진전 됩니다.
프랑스의 수상 티에르는 체코가 독립한다면 이를 지원하겠다고 약속- 1차대전 후에 실현될-
체코 독립국가를 비밀리에 약속합니다. 그러나 1870년대에 프랑스는 보불전쟁 패배로
영향력이 상당히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시적인 효과로 나타날 수는 없었습니다.

제국의 이원화 이후 체코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친오스트리아적 슬라브주의가 사멸하고
자치권확보에서 독립국가 건설로 옮겨 가게 됩니다. 이를 파악한 제국 정부는
1871년 9월 2일에 체코계가 주도하는 보헤미아 지역의 권한을 인정하고 
1867년의 이중체제를 그들이 인정하다면 자치권의 확대와  지방의회의 권환을 확대해 주겠다는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A-H Map.gif
삼중제국? 그림판 발편집.. 양해부탁드립니다.

이것은 황제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중체제가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 삼중체제로
변형 될 수 있다는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는데, 궁극적으로 이러한 생각은
제국내 기득권층인 독일-헝가리계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합니다.
특히 독일계 지도자들은 황제가 이 성명서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독일제국에 참여하겠다는
엄포를 놈으로써 이 성명서를 취소하게 합니다.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이런 해프닝을 보고 체코계의 환심을 사려다 독일계의 분노까지
 일으켰고 체코계의 분노도 감당해야 할것..이라고 정확한 논평을 남깁니다.)
이러한 황제의 태도는 체코 지도자들의 분노를 샀고 이후 그들이 제국과의 어떠한
타협이나 협상도 거부하고 은둔하여 소극적인 저항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과는 별도로 이미 교육, 경제 분야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한
지방의회에 불참하는 것에 의해 경제적, 교육적 손실이 체코계에게 상당히 누적된 상태였기 
때문에 체코계 정치인들은 지방의회에 재참하게 됩니다.
-제국 정부는 이를 두고 체코계가 항복했다고 오판함으로써 민족문제 해결의 마지막 기회를
 상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정부는 보헤미아 지방의회와 지방정부의 관료, 더 나아가
내각의 일부 관직-중요성이 높지않은 문화부장관 같은-도 배정하면서 일종의
부스러기 양보를 함으로써 이들의 불만을 무마하려 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법령에 의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관공서에서는 독일어와 체코어를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조치를 취하거나
(그러나 이것은 관공서-개인간의 관계에서 체코인이면 체코어를 사용한다는 것일 뿐
관공서 내부에서의 행정언어나 관공서간의 공식언어는 여전히 독일어였으므로 
실제적인 언어적 동등성은 아니었음)
이런 부스러기 양보중에 가장 획기적이 었던 것은 1882년에 프라하 대학이
독일계 대학과 체코계 대학으로 분리된 것이었는데 근세이후 독일색이 짙었던 프라하대학에서
체코계 대학을 분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족적 색채를 띄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계층의 양성이 가능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필연적으로 이 체코 프라하대학은 체코 민족운동의 요람이 됩니다.-



으아 일단 이것이 1880년대 초기까지의 이중제국 성립과 그 결과에 대한 제 정리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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