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6년 6월 9일자 조선군사령관이 육군성앞으로 보낸 전보(朝特35)에 따르면 "6월 7일 정오경 봉오동 동방 약 2,500m 부근에서 4면의 고지를 점령한 약 200여명의 불령선인들로부터 사격을 받아...불리한 지점에서도 용맹하게 응전 4시간 후 적을 격퇴하였는데..아군은 병졸 1명이 죽고 적들의 손해는 불상하나 24구의 시체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고 되어있다.
7월 3일 간도 국자가(局子街)의 일본 영사분관 소속 경부 와쿠이(和久井)가 조사한 『복명서』에는 "아군(일본군)은 전사 병졸 1명, 부상 5명, 7명 또는 10여명이라고 하는자도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자료는 상해 독립신문이 최초 보도한 6월 22일자 기사내용과 상당히 부합한다.
이 신문에 따르면 "적 사상병 12명 아군(독립군)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고 되어 있다. 이 시체가 독립군의 시체인지 아닌지는 별론으로 하고 일단 일본측 자료와 일치함으로써 피아간의 피해규모가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은 임시정부 국무원으로부터 입수한 통신을 받은 후 "호외"보도가 이어지면서부터 조금씩 사실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적 120명을 섬멸하였다"로 내용이 수정되었다.
6월 24일 이 신문은 조금더 구체적으로 "적의 사망자 60, 부상자 50이고 아군은 부상자 2명, 촌민의 사상자는 9명"으로 보도하였다. 6월 10일 간도국민회 제1남부지방회의『호외』에서는 또 "적 전진부대 150명을 섬멸하고 아군사망자는 근근히 3명"이라고 보도하였다.
3일 뒤 간도국민회 제2지방회의『공보』에서는 "적의 대대장, 중대장, 준사관 각기 1명, 병졸 49명이 즉사. 중경상자 수는 미상. 아군의 황백하, 군인 주택렬 두氏 등이 약한 경상을 입고, 피해를 받은 부녀와 아동이 16명이며 그리고 소6두, 개 2마리가 피해. 무기 20자루 및 기타 잡품 약간을 노획"이라고 보도하였다.